- 아름다운 지구(1) -

이남덕 칼럼/지구(地球)는 하나

2007-09-23     관리자

지난 여름 하안거(夏安居)가 끝나자 그 다음날(8월 7일), 정초에는 계획도 없었던 일본 나들이를 떠나 일주일 동안 동경과 경도(京都) 히로시마(廣島)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72년에 학교 재직 중 안식년을 맞아 약 2년 동안 외유했을 때 일본에 7개월 동안 머물렀었으니 27년 전 일이다. 이 어려운 경제난 속에 내 주머니 털어서 간 여행이 아니고 일본의 ‘노무라(野村) 생애교육(生涯敎育)센터’라는 여성들의 민간단체의 초청을 받아 다녀온 나들이였다.
이 단체는 36년 전 가정주부들의 자발적인 볼런티아(자원봉사) 활동으로 시작해서 1970년에 제1회 전국대회를 개최하여 금년은 제30회대회이고, 한편 1977년에 시작한 국제 포-럼은 4년마다 유네스코나 OECD 등 국제기구와의 협조 아래 금년은 제7회 대회를 동경에서 열었던 것이다.
이번 대회에 내건 테마는 “지구는 하나”라는 것인데 이 테마는 ’70년 제1회 일본 전국대회에서도 “지구인으로서 인간으로서”라는 테마였었으니 이 모임의 성격이 지구가족으로서의 각성을 얼마나 간절히 절규하고 있는가 짐작할 수 있다.
대표인 노무라 이사장의 말에 의하면 ’69년 암스트롱이 달나라에 갔던 날, 원시생명 이래 오로지 지구만을 주처(住處)로 삼고 진화한 인류가 다른 천체에 발을 디디고 우주에서부터 지구를 객관시한 그 사실이 너무나 벅찬 감동을 불러일으켰었다고 한다.
그런데 또 한편 이 과학의 발달은 인류가 핵(核)을 보유하고 이것을 인류에게 실험을 하고 있으니 이 현실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커다란 각성을 촉구하고 나선 운동이었던 것이다. 지구인으로서 인간으로서 특히 생명을 낳아 키우는 어머니의 입장, 여성의 입장에서 좌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나와 노무라 여사와의 만남은 ’73년 2월 인도 부처님 성지(聖地) 여행길에서 이루어졌다. 앞서 말한 대로 72년에 일본에 머물렀다가 구라파로 가는 길에 대만을 거쳐 인도에 들렀었다. 나는 이 때 내 생애 중 가장 감격스러운 생의 전환기를 부처님 성도하신 부다가야에서 경험하였다. 그 다음날 라지기르(王舍城)에 들렀을 때 노무라 여사 일행을 숙소 방가로에서 처음 만났고, 연이어 뉴델리로 돌아가려고 파트나 비행장 대합실에서 우연히 재회하였다. 비행기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대화를 나누었는데 비록 몇십 분의 짧은 대화였지만 우리는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을 느끼고 헤어졌다. 노무라 여사는 그 때의 우리들의 만남을 ‘영혼의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근자에 나온 그의 수상집 『木シ水陽の中よ』 맨 첫머리에 쓰고 있다. 74년 봄에 귀국하여 얼마 안 되었을 때 노무라 여사 일행은 나를 이화대학까지 찾아준 일이 있다.
그날 쌀쌀한 날씨 속에 뜻밖의 손님을 맞아 어리둥절했었고, 내심 그들의 사회활동에 대한 열의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민간단체에 의한 자발적인 사회활동이 이 땅에서는 훨씬 그 수준에 못 미치는 듯한데 말이다.
그들의 방한(訪韓) 목적은 평생교육〔生涯敎育〕이라는 이념활동을 통하여 어린이부터 청소년 나아가서 국민교육 차원에서도 크게 이바지하지만, 전세계적인 평화운동을 일으켜 민간외교의 차원에서도 한몫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우리 국내사정은 72년도에 남과 북이 통일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키게 한 ‘7·4공동성명’이 발표되고 일년도 채 안 가서 냉랭해지더니 드디어 ‘유신정치’로 돌입했던 때라, 그 봄날씨가 몹시도 쌀쌀했던 것으로 기억되는가 싶다.
그 후 우리 국내정치는 유신정권을 위시해서 내리 80년대까지 군사정권의 연속이었으니 민주화운동도 탄압 속에 허덕이는 판인데 어느 겨를에 민간단체의 볼런티어 운동이 제대로 이루어졌을 리 만무하다. 생각할수록 우리의 국토분단은 그 길이만큼 우리의 의식을 낙후시키고 있는 뼈아픈 현실이다.
유신정권의 첫머리에서 이들과 만난 나는 아무 것도 그들에게 베풀어 줄 것이 없는 형편이었고, 거꾸로 손님인 그들에게 저녁을 초대받아 나간 자리에서 그 얼마전에 서사시 형식으로 쓴 『단군탄생』을 그들에게 선물로 주고, 우리의 개국신화의 내용을 군데군데 즉석 번역으로 알려주었다. 노무라 여사는 특히 단군신화가 아이를 낳는 여성의 이야기라는 데 놀라고, 곰녜(熊女)의 아픔에 감정이입(感情移入)이 되었다. 그날 우리는 우리 한반도의 남북분단의 아픔이 마치 싸우는 두 아들 틈에 끼인 어머니의 마음같이 찢어지는 심정이라는 것을 공감했던 것이다.
내가 이번 모임에 참가하게 된 동기는 27년 전에 느꼈던 이 공감대를 노무라 여사가 잊지 않고 정년퇴직 후 세간살이에서 멀어져 산 속에 살고 있는 나를 끈질기게 주소를 추적하여 불러낸 것인데, 그 초청열의에 대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극성스러워서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면 참가 동기치고는 매우 한심한 얘기가 되겠는데 사실이 그러했다. 거의 매일같이 국제전화가 걸려오고 초청에 필요한 온갖 서류와 그동안 발간되었던 노무라 센터의 통신문(현재 161호), 그리고 출판된 책자들이 산 속까지 배달되었다.
이 모든 활동이 일본 사회 각계 각층의 부인들의 후원 아래 이사장을 중심으로 한 간부들과 그 밑에 소임을 분담한 여러 부서의 회원들이 그야말로 자기 시간, 자기 비용, 자기 노력을 희생하면서 헌신적으로 하는 봉사활동이라는 데 감명이 컸기 때문에 나도 적극적인 자세로 이 모임에 참가할 마음이 저절로 생기게 된 것이다.
노무라 센터가 과거 30여 년 동안에 세계 80여 개 국에 국제 네트워크를 폈고 이번 3일간의 국제 포럼 참가자만 해도 세계 각국에서, 그리고 일본 국내 각계 각층에서 첫날 3,000명 연(延) 6,000명이었다고 하니 주최자측만 극성인 게 아니라 일본 사회 전체가 교육을 위시한 인간의 가치추구에 얼마나 열과 성(誠)을 다하는지 피부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참가국의 이름을 보면 미국이나 영국, 불란서 등 알려진 큰 나라들만이 아니라 세력이 미약한 제3국들, 이 방면에 소매한 나로서는 이름도 생소한 작은 나라들, 항상 분쟁이 그치지 않는 아픔을 가진 나라들까지 광범위한 것이었다. UN과 같은 국제모임에서 큰 나라나 작은 나라나 한 표의 가치는 동일하다. 이런 민간운동을 통해서 주제로 삼는 교육문제에서뿐 아니라 민간외교의 측면에서 정부 외무부가 하는 일보다 더 알찬 성과를 얻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앞에서 이 모임에 대한 나의 참가동기가 매우 수동적인 것처럼 말한 것은 그들의 볼런티어 정신이 매우 열성적이었음을 증명하기 위한 표현이었고 내게는 여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내 생애를 바쳐 기원하는 두 가지 문제가 있음을 이번에 더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첫째는 한 인간으로서 이 우주 속에 태어난 한 생명으로서 어떻게 하면 진리와 하나가 되는 깨달음의 차원으로 도달하느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내가 태어난 이 땅, 이 지구와 우리의 국토를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을까, 구제적으로는 조국통일의 과제는 가장 절실한 우리 민족의 기원인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나의 소원은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정신과 일치함을 새삼 느끼게 되어 온 세계 사람들과 우선 한 마음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이번 기회에 동참하는 것이 고맙게 생각되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부처님 성지순례 중에 노무라 여사와 만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었고, 예불 때마다 세계 평화와 우리 나라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내 기도를 부처님이 들어주신 것이라고 혼자 기뻤다.
3일 동안의 강연토론 중에 내가 맡은 부분은 사흘째 되는 날의 ‘국제심포지엄’의 첫 발언자로 미리 보낸 연설문을 발표하였고, 계속해서 마지막 순서로 이번 모임 ‘지구는 하나’ 선언문의 선언위원으로 각기 간단한 메세지를 발언하였다.
우리의 지구가족으로서의 각성을 함께하기 위해서 전체의 선언문과 나의 발언에 관한 얘기를 다음에 실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