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심수행하는 길밖에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선지식 탐방/충북 괴산군 공림사 탄성 스님

2007-09-23     관리자

불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부끄러웠던 무인년 세밑, 종단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시는 탄성 큰스님을 뵙기 위해 길을 나섰다.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사담리 공림사, 낙영산(落影山)이 병풍처럼 도량을 싸안고 있는 공림사의 평온, 그 도량의 안락함 속에서도 스님의 넉넉한 인품과 수행의 힘을 감지할 수 있었다.

스님, 답답해서 이렇게 찾아 뵈었습니다.
“답답해할 것 없습니다. 사바세계가 존속하는 한 시비는 끊이지 않지요. ‘스님들도 아직 수행의 과정에 있는지라 중생심은 그대로 가지고 있고, 수만생을 이어온 속습(俗習)이 남았기 때문에 불상사도 생기는구나’하고 이해하세요. 자기 앞에 큰 감을 놓으려고 하다 보니 지혜가 흐려져 그러한 일이 벌어졌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불자들에게 가장 큰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고 할 수 있는 80년 10·27법난 때도 수습대책위원장으로 활약해주셨고, 한국불교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94년도 조계종개혁불사 당시에는 개혁회의 총무원장으로 중책을 완수하시고나서 수행자의 본모습으로 돌아가시어 사부대중의 신뢰를 한몸에 받으신 스님께서 이번에 또 중책(전국승려대회 대회장)을 맡으신 것을 보고 모든 일이 원만해결되리라 기대하는 불자가 많습니다.
“내가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저 젊은 스님들, 뜻있는 스님들이 애쓰는 것을 보고 뜻을 같이한 것뿐이지요. 또 내가 욕심이 없다기보다 그게 내 길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한 것이니 칭송받을 일도 없습니다. 사실 발심 수행자는 대통령을 하라 해도 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집 지을 때 서까래도 필요하고 기둥도 필요하듯 종단이 잘 운영되려면 수행승도 있어야 하고 행정승, 포교승이 다 구족해야 하지요.
이번 분규의 첫 단초가 된 것은 삼선문제였는데, 법적으론 삼선이라 할 수 없으나 어쨌든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선거에 출마한 것도 잘 한 일은 아니지만, 그것을 빌미로 폭력을 행사한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 중립을 지킨다고 해서 폭력을 방조한 정부 관계자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지요.
여하간 한쪽에서 일부 물의를 일으키는 이들이 있더라도 수행하는 사람은 흔들림없이 수행에 힘써야 합니다. 일부 승려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나 그게 우리 종단의 전부는 아닙니다. 지금도 밤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하는 선방 수좌들이 전국 도처에 있으니 우리 불교의 미래는 희망적입니다.”

출가하신 지 50여 성상이 지났는데도 초발심으로 수행에 힘쓰시는 스님을 흠모하는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출가 인연 이야기가 남다를 듯싶은데요.
“남다를 건 없고, 처음부터 생사의 길을 깨우쳐 주신 은사(금오 스님)를 만났으니, 복이 많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지요. 열일곱 살 때 절에 갔다가, 우연히 ‘삼일 동안 닦은 마음은 천년에 길이 남을 보배요, 백년 동안 탐한 물질은 하루 아침의 티끌(三一修心 千在寶 百年貪物 一朝塵)’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너무나 좋아서 출가할 결심을 했지요. 어떻게 출가하는지 몰라서 세월만 보내다가 스물한 살 되던 해 가을, 아는 스님께서 갑사로 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갔지요. 갑사 중사자암에서 금오 스님을 처음 뵙고, 행자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봄 금오 스님을 은사로 수계를 받았지요.”

은사이신 금오 스님을 오랫동안 시봉하셨다고 들었는데, 금오 스님께서 강조하신 수행의 지침은 무엇이었는지요?
“오로지 참선수행으로 용맹정진해야 함을 강조하시면서 글공부는 말리셨지요. 출가의 목적은 성불하자는 것인데, 글공부로는 성불할 수 없다시며 참선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대중들을 일년에 두어 차례 탁발하러 내보내셨습니다. 부처님께서도 하루에 일곱 집씩 돌며 탁발을 하셨는데 그것은 중생들과 인연을 맺기 위함입니다. 스님들은 법보시를 하고 중생은 공양을 올리며 좋은 인연도 맺고 하심도 하고, 탁발을 하면 여러 모로 마음공부가 많이 됩니다.”

참선수행만 강조하는 바람에 정작 세상사람들의 삶에 구체적인 이익을 주지 못한다는 말도 들립니다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상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포교도 참선수행해서 깨달음을 이루면 일시에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몇 해 전에 입적하신 성철 스님만 해도 어디 포교한다고 돌아다니셨습니까? 평생을 산속에서 수행만 하셨어도 일시에 큰 포교를 하셨지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숲속의 맑은 공기처럼 여러 수행자들의 수행의 힘이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마음이 맑으면 국토가 청정하다’는 부처님 말씀과 ‘도인이 나오면 나라가 평안하다’고 한 옛 스님들의 말씀을 예사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입으로 백날천날 떠들어봐야 무슨 덕이 있겠습니까? 치열하게 정진하는 수행의 힘이 본질적으로 세상을 맑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수백명이 큰배를 타고 가다가 침몰했을 때 배 안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섣불리 중생들과 함께하겠다고 하다가는 같이 물에 빠져 허부적거리면서 저도 못 살고 남도 못 구합니다.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또다른 배를 가지고 가서 구조를 해주어야지요. 그처럼 내가 수행해서 깨친 뒤에 남을 건져야 합니다. 먼저 제 눈이 열려야 남을 인도해 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나 또한 초발심자경문에 나오는 말씀을 듣고 출가했기 때문에 경전공부하기가 원이었던 터라 은사스님께 참선만 해야 하는 까닭을 여쭈었더니, ‘방안에 들어앉아 종이 위에 금강산 이름을 천 번 쓰고 천 번을 외웠다 해도 금강산에 가본 일이 없다면 과연 그 사람이 금강산에 다녀온 사람보다 금강산에 대해 더 잘 안다고 할 수 있겠느냐? 글자나 경구에 얽매이지 말고 부지런히 참선에나 힘쓰라’고 하셨는데, 직접 수행하면서 그 참뜻을 알게 되면서 은사스님에 대한 고마움이 절절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조계종 사태도 승가교육부재의 현실이 빚어낸 게 아닌지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50년대 정화운동에 힘쓰느라 승가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아 지금까지도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정화 직후만 해도 서로 주지소임 안 맡겠다며 선방으로 들어가는 풍토였는데 이 즈음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니….
그래서 더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것만이 살 길입니다. 경전, 곧 부처님의 말씀은 쉽게 말하면 노정기(路程記)라 할 수 있습니다. 서울이 목적지라 하면 서울 가는 길을 알아야 제대로 갈 수 있으니 경전공부도 필요하나 노정기를 달달 외운다고 해서 서울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직접 길을 떠나야 하지요. 그렇듯 스스로 수행에 힘써야만 깨달음을 이룰 수 있기에 수행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6·25 전쟁의 와중에서 인민군에게 끌려갔을 때 관음주력으로 목숨을 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참선 수행과 염불, 관음주력은 어떻게 다른지, 또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감금되었을 때 딴 생각은 하지 않고 관음주력만 열심히 했지요. 신원사에서 같이 수행하던 노스님의 면회 덕분에 살아났는데, 그때 노스님께서 ‘새벽예불을 마치고 불현듯 면회갈 생각을 했고, 하루 종일 기다리면서까지 내무소장을 만나 석방시켜 달라고 한 것은 내 힘이 아니라 관세음보살의 가피’라고 하셔서 그런 소문이 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듯 기도를 하다 보면 이슬비에 옷 젖듯 알 수 없는 가피를 입게 됩니다.
옛 스님들은 참선을 활줄에 비유하고, 염불, 기도, 주력 등은 활등에 비유하시면서 참선은 빠르고 염불은 느리다고 하셨는데, 나는 염불이든 참선이든 얼마나 열심히 정성껏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염불한 사람이 죽어서 저승에 갔는데 자기 창고에 염불이 가득 차있더랍니다. 저승사자가 염불을 까부르라고 하길래 그대로 했더니 다 날아가 버리고 알맹이는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우리가 입으로는 염불을 하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제멋대로 서울 갔다 부산 갔다 했기 때문이니, 그저 일념으로 간절히 해야 함을 깨우치는 얘기입니다.
나는 처음에는 관음주력을 했고, 나중에 참선 수행을 했습니다. 관음주력을 하면서 쉽게 삼매에 들 수 있었는데, 내 힘이 부족할 때는 불보살님들을 의지하는 염불과 주력으로 먼저 몸과 마음을 조복받고나서 참선수행하는 것도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옛 스님께서 고양이가 쥐잡듯이, 닭이 알품듯이, 6, 70 과부가 외아들을 잃고 자식 생각하듯이 간절하게 수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고양이가 쥐잡을 때 보면 쥐구멍만 바라보지 일체 다른 데에는 눈길을 주지 않아요. 닭도 마찬가지입니다. 알을 품다 안 품다 하면 곯아버립니다. 또 늙은 과부가 외아들을 잃었을 때의 심정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원력을 세워 수행하면 견성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애가 사람이라는 것은 틀림없듯이 모두 견성할 수 있지만, 애가 곧바로 사람 구실을 할 수는 없는 것처럼 보림을 잘 해서 도력을 얻어야 생사에 자재할 수 있습니다.”

스님, 수행하면 현실적으로 어떤 공덕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 듯합니다.
“불교는 정법(正法)입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이 삿되게 믿으면 사도(邪道)가 됩니다. 어떤 것이 사도냐? 이 세상 살아가는 게 답답하니 뭐 좀 알았으면 하는 생각을 내면 그 틈을 타서 삿된 것이 들어와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뭘 보여줍니다. 방안에 앉아서도 서울 일이 환히 보이고, 사람을 보면 그이의 앞일이 보이는데, 그것을 도(道)라고 착각하면 큰일입니다. 그것은 도가 아니라 삿된 겁니다. 또 뭐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나중에는 그놈한테 당합니다. 설령 부처님이 나투더라도 그 형상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금강경에 ‘무릇 상이 다 허망한 것이니 모든 상이 상 아닌 줄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고 하신 말씀처럼 수행하면서 형상이 나타나면 즉시 경계해야 합니다. 만일 형상에 끄달리게 되면 미치광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모든 중생은 각기 그 업에 따라 육도윤회를 하는데 이를 면하는 길은 마음을 깨치는 길밖에 없어요. 보통 이 몸뚱이를 나라고 믿고 사는데, 이 몸은 지수화풍 사대가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인연이 다하면 불기운은 불로 물기운은 물로 본래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몸은 참으로 내가 아니고 가짜요, 이 마음이 참나인데, 말로만 마음 마음 하지 실제로 자기 마음을 모르지 않습니까? 이 자기 마음을 깨달아 생사해탈하자는 것이 불교인 만큼 현실적인 공덕에 연연하지 말고, 그저 무조건 수행해야 합니다.”

종단의 원로스님으로 출가수행자들에게 특별히 해주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전생부터의 원력이 있어야 출가하는 것입니다. 초발심을 잊지 말고 선방에 가라고 떼밀고 싶군요. 공부가 되든 안 되든 선방은 공부하는 장소이니까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습니다. 절 살림 때문에 주저앉는 분들이 많은데 공부가 우선입니다. 열심히 정진해서 상구보리하고 중생구제하는 것이 우리 출가자의 본분사입니다.
‘한 자식이 출가해서 구족(九族)이 생천(生天)한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팔만사천 지옥을 중이 아니면 채우지 못한다’는 말도 있는데, 중노릇 잘 하면 부처가 되어서 수많은 중생을 제도할 수 있지만 잘못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벌어서 자기가 먹고사는데 수행자는 집도 밥도 이 옷도 시주것입니다. 옛 스님들은 시주것이 무서워 먹는 것도 일부러 나쁜 것만 드셨지요. 시주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는 철저히 정진해서 깨달음을 이루는 길밖에 없습니다.
또한 날이면 날마다 새롭게 발심해야 합니다. 발심수행만 하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가 스님네이고, 발심 않고 수행 안 하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이가 또 스님네라는 것을 명심하고 용맹정진할 것을 당부드립니다. 종무행정을 아무리 잘 해도 불교발전 이룰 수 없고 국민에게도 득이 안 됩니다. 수행 잘해서 깨닫는 것이 모두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길입니다.”

스님, 기묘년 새해가 밝아오고 있습니다. 불자들의 가슴에 새희망을 불어넣어주는 한말씀 더 부탁드립니다.
“부처님께서 ‘자기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自燈明 法燈明)’고 하신 말씀을 되새기면서 진리 자체인 법을 의지해서 흔들림없이 정진할 것을 부탁드립니다. 출가, 재가 할 것 없이 수행인이 많이 나오는 길밖에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수행하지 않으면 내생에 인간 몸 받기도 힘들다는 것, 생사가 두려운 것을 깨닫고 수행해야 합니다.
또한 수행과 동시에 복을 지어야 합니다. 지혜와 복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이웃과 화목하고 힘닿는 대로 사회사업도 하고 봉사도 하고 불사도 하면 그것이 다 복이 됩니다. 만일 전생에 복을 많이 짓고 지혜가 없으면 현생에 재산은 많되, 그 재산을 끌어안을 줄만 알지 베풀 줄 몰라 그 과보를 그대로 받습니다. 미래에 복의 씨앗을 뿌리지 않은 과보를 받기 마련이지요. 또 수행을 해서 사람은 지혜로운데 복을 짓지 않으면 먹을 걱정을 하며 삽니다. 불자라면 누구나 스스로 수행하면서 마음을 깨치고, 가진 것을 이웃과 더불어 나누며 살아야 하지요.
모쪼록 몇몇 승려들에 의해 벌어진 종단일에 마음 상하지 말고 스스로 수행하고 복짓기를 빕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인데 마음을 매했기 때문에 중생놀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해서 깨치면 모두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수행의 힘이야말로 급변하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힘써 수행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