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란 잘 난 사람이 내는 것

2003-09-17     관리자



지금 젊은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70 년대만 해도 버스에는 안내양이란 젊은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차 문에 매달려서 짐짝같은 손님들을 그 가녀린 손으로 밀어 태우고 차비를 받고, 때로는 차고지에서 청소부 대신 차도 씻고 하는 그런 힘든 일을 하던 우리의 누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먹고 살기 어려운 6- 70 년대, 우리 누이들은 이런 안내양이라도 좋은 취직 자리로 알고 또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그런 가슴 아린 사정이야 알 리 없던 혈기 왕성한 20 대 때 저의 눈에도 이상한 일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툭 하면 안내양에게 화내는 일이었습니다. 일이 힘들고 여러 사람을 대하다 보니 어찌 어린 우리 누이들이 언제나 공손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종종 오만하고 불친절한 말들이 나오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옆에서 보는 제가 느낀 이상한 점은, 안내양이 오만한 말투나 짜증내는 언동을 보일 때마다 이 때만은 나이 드신 이나 젊은이나 회사원이나 아주머니나, 누구나 할 것 없이 안내양이 잘못하는 순간을 기다리기나 한 듯 너도나도 조금도 참지 못하시고 분기탱천한 정의를 부르짖는 시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야단을 치면, 그래서 행여나 안내양이 대꾸를 하여 시비라도 붙으면 온 사방에서 세상 말세나 된 듯 그릇된(?) 안내양을 한심해 하며 같이 야단을 치는 것이었고, 그러면 어린 안내양은 제대로 반박도 못한 채 울먹이기 일쑤였었습니다.


저도 그런 분들과 조금도 다름없었으니,저야 그 당시 정의감에서 둘 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자칭 '정의감의 사나이'었습니다. 그런 저였으니여 조금이나마 잘못이 있다 싶을 땐 늘상(?) 그렇듯 불의를 못 참는 정의로운 이가 되어 원칙을 강조하며 단죄하고, 사정없이 저 또래, 또는 많아야 몇 살 위일 어린 그녀들을 다그쳤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이 마침내 울먹이고 물러 설 때면은, 불의를 참고는 못 배기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 같은 우쭐함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고 죄송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때 떠나지 않던 한 가지 의문은, 과연 (저를 포함한) 지금 정의의사도가 된 저 분들이 젊고 건장한 남성들 앞에서도 지금과 같이 불의를 참지 못하며 분기탱천하여 자신의 바른(?) 생각을 주장하고 항의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그 질문을 저 자신에게 다시 돌아보았을 때,대답은 결단코 'No!' 였습니다.


제가 용감하게 보이고 정의의 투사처럼 보였던 것은, 단지 그들이 저보다 약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아! 사실 저는 알고 보면 '정의'의 '정'자(字) 근처에도 못 가는 용기 없는 나약한 젊은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보다 못난 자, 약한 자 앞에서만 억눌렸던 저의 정의감을 한껏 뽐내었고 그리고 그런 모습을 스스로 멋있게 생각했던 것뿐이었습니다.


한 입이라도 덜어 동생들 공부 시키고자 그 힘든 일을 하던 우리 어린 누이들이 세상을 알면 얼마나 알고 힘이 있으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그런 외로운 어린 누이의 아픔은 알지 못하고 저를 포함한 온 사람이 만만히 보고 그렇게 모질게 굴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정의의 모습을 보이는 분 중에 물론 언제나 정의로운 분들은 있을 것이고, 또 그런 분들에게는 저의 이런 생각은 결례가 되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만, 부끄럽게도 저는 그렇게 못난 가짜 정의의 사도였던 것입니다.
분기탱천한 정의라는 게 고작 저보다 못나고 약한 자들 앞에서나 큰소리치는, 그런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성철 큰스님은 제자들에게 늘 '사람 못 된 것이 중 되고, 중 못 된 것이 선방 수좌 되고, 선방 수좌 못 된 것이 도인 된다' 며 사람 노릇하지 말기를 강조하셨다고 합니다. 요즘은 무슨 인연인지 이제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 듯합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인간이 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아니라 여러 뜻을 함축한 것일 터이니, 가령 사람 노릇한다고 이것 저것 다른 데 신경 쓰지 말며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오직 공부에만 집중하라는 뜻도 그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철저한 하심(下心,스스로 낮아지는 것. 곧 겸손을 의미하는 불교 용어)이 아닌가 합니다.


수행자란 모든 중생을 섬기고 공양하는 자리에 늘 머물러야지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면 안 되는 법! 모욕 받았다고 항의하고 내 뜻과 다르다고 다투며 나를 무시한다고 섭섭해서야 어찌 도를 이루고 중생을 제도할 수 있겠습니까? 모욕이니 분노니 하는 것은 스스로 높은 분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지 저희같이 낮은 이들에게는 어불성설인 말씀입니다.


수행자는 때리면 맞고 주면 주는대로 군말없이 받으며, 일체 중생을 섬기고 공양하며 감사하며 지내야 하리라 봅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화란 잘난 사람이 못난 사람에게 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자신에게 잘난 구석이 없으면 화를 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야 잘난 곳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이니, 제가 야단 맞고 무시 받았다고 섭섭해 할 것도 성낼 것도 없는 일입니다. 잘난 사람이 잘난 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또한 잘난 체 하다 보면 남을 무시할 수도 있는 법인데 뭐 그리 섭섭하겠습니까? 억울하면 출세하란 말처럼, 억울하면 저도 잘나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잘 나지 못한 저를 보고 잘나지 못했다고 말하고 놀릴 뿐인데 저는 어리석게도 일일이 분노하고 싸우려 들었던 것입니다. 모두 잘난 줄 알았던 저의 착각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날에 제가 대단히 잘난 줄 알고 지냈던 날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화도 내고 크게 다투기도 했지만 이제는제 잘난 맛은 어디론가 곧잘 가 버리고 중생에 대한 한없는 공경심이 점점 제 가슴에 일어 옵니다. 비록 조금씩이지만 말입니다. 아내에게도 자식에게도 이웃들에게도, 제가 그 분들보다 잘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제가 착각에 빠져 아내보다 잘 났고, 자식보다 나은 줄 알고 야단 치고 훈계했던 것입니다.


화란 잘난 분들이나 내시는 것! 그러므로 화 내는 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도 잘날 것이 없는 저는, 이제는 어떤 분들이 어떻게 저를 대하여 오시더라도 오직 존경과 감사를 드리며 살아가리라 다짐해 봅니다. 그것이 비록 작심삼일로 끝난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패를 거울삼아 또 다른 삼일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쉬지 않으면 마침내 이루어지는 법!
그래서 금생엔 기어코 아상(我相)이 빚어내는 서글픈 윤회의 사슬을 꼭 끊어 볼 생각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시아본사아미타불




이 종린 合掌





반성!: 화내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09/18-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