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화의 밑그림은 감사

특집 - 회향하는 삶

2007-09-23     관리자

분에 넘치는 생활에 탐닉하며 자제력을 잃은 사이, 국제통화기금의 올가미에 걸려 어느 누구도 물심양면의 심리적 어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요즈음입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우리 불자들의 영원한 귀의처인 불교계 일각에서 또 다시 분규에 휘말려 이를 지켜보며 가슴앓이를 앓고 있습니다. 이런 때 간절히 생각나는 어른이 계시니, 설법 한마디 없이도 보현행원의 실천으로 내 인생행로의 바른 방향타가 되어 주셨던 홍도(일명 방울) 스님이십니다.
갓 시집 가서 처음 맞는 부처님 오신 날 어머님을 따라 조계사 법당을 함께 참배하게 되었습니다. 법회를 마치고 법당을 나와 돌계단을 막 내려서는데 자그마한 비구스님 한 분이 백송 밑에 서 계시다가 백년지기처럼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우리 앞으로 다가와 “이 절에 살고 있는 홍도라는 스님입니다.” 하며 합장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따라 합장의 예를 올렸습니다. 스님과의 첫 만남은 이렇듯 예기치 않게 이루어졌습니다.
그 후 스님은 남산 자락에 작은 암자를 세웠다가 다시 녹번동으로 자리를 옮겨 보현사 불사를 마치셨고 우리는 스님과 만나는 순간부터 열반에 드실 때까지 보현사 신도로 행복했습니다.
스님을 만날 때마다 불교계에 떠오른 현안 문제의 해결은 모두 스님의 몫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군경부대에 군경승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관계여로에 청원하기 위해 늘 손에 서류 뭉치를 들고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시던 모습, 세계불교도대회의 성사를 위해 부족한 보현사 불사기금을 먼저 희사하며 동분서주하시던 일, 종립대학 동국학원에 부속의과대학을 세우기 위해 모 여의전을 교섭하다 타대학에 빼앗기고 마냥 허탈해 하시던 모습, 한편 젊은 불자를 길러 내서 그분들이 지금 불교계 각계각층에서 동량재가 되어 활동하고 있음은 스님의 서원이셨던 인재양성의 원대한 꿈의 실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의 일에 늘 앞장서셨던 일을 지금 와서 생각하니 스님은 진정한 불사야말로 내 일 네 일이 둘이 아닌 불이(不二)임을 확연히 깨닫고, 말 없는 가운데 보현보살 십대행원 중에서 ‘수희공덕원’의 철저한 수행자요, 완성자로 ‘회향’의 참 모습까지도 내보이셨음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방울 스님이란 애칭에서도 짐작되지만 스님은 걷는 법 없이 늘 뛰어다니다시피 어려운 이웃 속에, 사건 현장에 어김없이 목탁을 들고 달려가셨습니다. 홍도 스님의 식사법은 참으로 유별났는데 저작하는 시간도 아까운지 물에 밥을 말거나 김칫국을 부어 입에 붓듯이 훌훌 마셔 버리시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건강에 좋지 않다고 말씀드리니 하도 바빠서 그렇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결국은 과로와 조식으로 영양섭취도 미흡해서 간의 손상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사바세계와의 인연이 다했음을 짐작하고 그토록 마음이 바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님의 일화 중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일이 가정방문 생일불공입니다. 가족 중에 생일이 있는 날이면 영락없이 이른 새벽에 초인종 소리가 납니다. 뛰어 나가보면 스님이 서 계셨습니다. 식구들이 한자리에 둘러앉아 합장을 하면 김이 무럭무럭나는 백설기를 내 놓으시고 미니 향을 피우고 속사포같이 빠른 속도로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로 거룩한 생일불공 의식은 끝나지만 부처님의 가피력의 충만함에 환희하곤 했습니다. 떠나시기 전에 꼭 바랑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셨는데 한국불교연구원의 불연 이기영 박사님의 근간이었습니다.
한번은 어느 스님의 병문안을 가자고 서두르셔서 따라 나섰더니 불광사 법주이신 광덕 큰스님께로 인도하셨습니다. 병석에 누우셔서도 해맑은 눈빛과 환한 미소로 맞아 주시던 스님과의 인연도 이렇듯 홍도 스님을 통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좋은 만남처럼 중요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광덕 큰스님과 고인이 되신 불연 이기영 박사님을 인고의 사바세계에서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음은 내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불은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74년 7월에 불이회가 탄생했습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같은 해 이기영 박사님은 한국불교연구원을 5월에, 광덕 큰스님은 10월에 불광법회를 창립하셨습니다. 불이회를 창립하고 정신적 지주로 이기영 박사님을 지도교수로 광덕 큰스님을 지도법사로 모시고 오늘까지 활동하고 있으니 홍도 스님이 맺어 주신 소중한 인연의 열매 맺음이라 하겠습니다.
젊으신 나이로 열반에 드신 스님은 돌아가셔서도 각종 불사에 동참토록 채근하며 선도하고 계심을 실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한번은 삼선포교원을 잘 짓고도 상륜을 못 올렸다는 목수 신영훈 선생님의 간곡하고도 안타까운 글을 읽고 어쩐지 마음이 끌려 찾아 나선 적이 있습니다. 지광 주지스님을 뵙는 순간 앗! 소리를 지를 만큼 홍도 스님을 닮아 계셨습니다. 삼선포교원의 상륜부 불사를 인연으로 신라시대 황룡사 구층탑 이래 역사적 전당으로 꼽히는 보탑사 상륜부 불사까지 마치었으니, 스님은 가셨으되 인연 있는 불자들의 마음 속에 빛으로 돌아 와 지금도 끊임없이 못 다한 불사를 하고 계심을 알겠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는 동안 세상으로부터 알게 모르게 입은 은혜가 태산 같습니다. 그래서 내 평생화의 밑그림이 감사 일색임을 알겠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서 재단법인 보덕학회를 설립하고 불·법·승 삼보를 호지하는 일을 시작할 때 광덕 큰스님과 이기영 박사님은 지도편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청년불자 양성을 위해 ‘우리는 선우’에, 여성의 권익증진을 위해 ‘여성문제연구회’에 향산학술장학회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회향의 삶이 따로 존재할 리가 없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여법하게 살면서 부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하며 그 감사의 마음을 나와 불이인 이웃을 위해 함께 나누는 삶이 진정한 보현행원의 완성인 회향이라 생각합니다.
어려운 IMF 시대를 맞아 비록 가진 것이 없다 해도 우리 불자들은 ‘무재(無財)의 칠시(七施)’를 통해 세상을 불국토로 바꿀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정법을 호지하고 사람들 가슴 가슴마다에 희망의 불을 밝히는 전등이 되어 나설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