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치지 못한 편지 한 장 -

엽편소설/ 말(馬)처럼 뛰는 말(言) 생각하기

2007-09-23     관리자

귀뚜라미 울음 소리 들리다 문득 그치더니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늘의 별들이 조심스레 움직이는 발소리가 사위에 내려앉는 밤입니다. 뒤란 우물 가를 뛰어다니던 바람이 훌쩍 고욤나무 꼭대기로 뛰어올랐다가, 제 방 작은 창문을 흔듭니다. 달그락거리는 유리창이, 문득 애처롭게 느껴집니다. 문을 열고 팔 벌려, 바람을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되고 싶고, 비가 되고 싶고, 꽃이 되고 싶던 어린 날의 제 모습에서, 참으로 멀리 와버렸다는 생각이 슬몃 들었습니다. 무슨 청승인가 해도 외로움에 그만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반쯤 남은 초를 찾아 불 하나를 살랐습니다. 전등을 껐습니다. 오롯 피어난 촛불이 혼자 있는 방에 온기를 되살렸습니다. 따뜻함, 편안함, 온화함, 포근함으로 말해지는 감정이 제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뒤이어 편지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썼던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편지가 떠올랐습니다. 하얀 종이 한 장을 책상에 펼치고 그리하여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로 작정했습니다. 당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끝내는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말입니다. 그런데도 쓸쓸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에게 편지를 쓰려고 하는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가슴 벅찬 이….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어릴 적 불렀던 노랫말처럼 올해도 과꽃은 피었습니다. 예전의 꼭 그 빛깔 그 모양의 과꽃이었습니다. 코스모스도 피었습니다.
옛 그대로의 코스모스였답니다. 바람 부는 대로 하늘거리는.
어찌 그 꽃들이 바로 그 꽃들일 수 있는가. 당신이 따져 물으신다면 저로선 할 말이 없습니다. 그처럼 믿고 싶을 뿐이었노라 할 따름입니다. 무의미하고 무책임한 대꾸겠지요. 알면서도 자꾸 마음이 그처럼 쏠리고 있는 요즘입니다.
몸과 마음 모두 허약해진 탓인가요? 아, 옛날이여! 를 떠올리며 회고(懷古)와 의고(擬古)로 버무려진 값싼 감정 나부랭이라 질책하셔도 그럴듯한 이유 하나 꺼낼 수 없는 제 자신이 딱할 뿐입니다. 그런 과꽃과 코스모스가 시들었습니다. 주린 배를 어우르며 보릿고개 그 험한 고개를 넘도록 도와주던 어린 날 기억 속의 진달래 꽃과 아카시아 꽃들도 마른 땅 흙먼지 날리는 추수걷이 끝난 무논이 그렇듯 이젠 모두 제 발등 밑에 꽃이파리를 떨구고 겨울을 견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주 긴 겨울이 될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아주아주 매운 추위가 몰아닥칠 것이라고 덧대어 말합니다. 그렇다면 춥고 긴 겨울이 분명하겠지요. 사흘 동안 추울지라도 이어 나흘 동안은 따스한 삼한사온(三寒四溫)이었기에, 겨울나기 쯤은 두려워하지 않았었거늘 이젠 두렵습니다. 환경오염 탓에 지구 곳곳 이상 기후로 피해가 속출했던 지난 여름의 경험이 추위에 주눅들게 한 것은 아닙니다. 시간 때문입니다. 긴 겨울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시간은 무엇인가요? 지구의 자전주기를 측정해 얻은 단위라는 뜻만으로는 사실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무엇입니다. 간단히 시간은 공간의 상대 개념이다 해도 어렵긴 마찬가지입니다.
가만.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다시 천천히 내쉬는 사이 그 틈은 아닐까요? 그 틈에서 일어나는, 당신과 저 같은 인간이 소유한 감정의 변화, 그 흐름이라면 어떻습니까? 그래야 찰나(刹那)가 겁(劫)의 또다른 이름으로 다가서지 않겠습니까? 그래야만 제 아무리 긴 겨울일지라도 어린 아이 눈꺼풀 한 번 감았다 뜨는 틈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견딜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두려움에 둘러싸인 자신을 어쩌지 못합니다. 비루하고 초라하고 나약한 제 자신을 알기 때문입니다. 견디기만 하면 견뎌내기만 한다면, 키 작은 민들레 노란꽃 위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인손 앓아 빠진 자리에 손톱 돋듯 개울 얼음장 밑으로 봄이 온다고, 천둥 같은 소리가 아니라 잎새를 간지르듯 속삭이는 소리조차 어디에서고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제가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힌 까닭은 모르긴 해도 이 때문인 듯합니다. 스스로 가로지른 빗장을 열어야만 나올 수 있는 마음 속 감옥임을 모르고 누군가 밖에서 열쇠를 던져주거나 손을 내밀어 꺼낼 줄 것이라고 믿는 그런 어리석고 어리석은 수인(囚人)일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불에 달구어지면 하모니카 소리가 나는 주전자 때문입니다. 가스렌지 위에 물을 끓이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 했습니다. 잊은 지 오래인 숭늉맛을 대신해 길들여진 커피 한 모금의 달콤한 유혹에 그만 자리를 잠시 비웠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수인(囚人)이었습니다. 아니, 수인입니다. 제 마음의 주인이 아니라 제 마음 속에 갇힌 그러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버렸겠습니까?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들로 인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제 가진 것 많은 줄 모르고 남 가진 것만 부러워했습니다. 그 하찮은 욕심이 자유, 기쁨, 행복, 사랑, 진실, 믿음, 용서, 은총, 찬양, 평온, 나눔, 은혜, 겸손, 자비의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증오, 의심, 반목, 집착, 거짓, 탐욕, 시기, 배반, 오만, 쾌락, 자만이 들끓었습니다. 자신으로 인한 것임에도 세상 탓으로 돌렸습니다.
불행했습니다. 물론 지금 이 순간은 아닙니다. 미지(未知)의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 때문입니다. 외람되지만 당신도 저처럼 외로울 것만 같아섭니다. 해도 순전히 제 감정이 문제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낮에 동네 한 바퀴를 돌다가 그랬습니다. 담 밖으로 가지를 뻗은 커다란 감나무를 바라보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열매를 딸지라도 까치 몫으로 몇 개 정도는 남겨 두었을 것이라는 짐작과는 달리 그저 잎사귀 떨군 가지만 뎅그라니 남은 삭막한 모습을 보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가진 것 별로 없어도 이웃과 나누며 살았던 아름다운 모습을 그만 잃어버렸다는 뒤늦은 깨달음이 제게 왔습니다.
아, 생각이 납니다. 무릎께 나온 골덴 바지 밑단 닳아빠진 구두 뒷굽, 깃 삭은 중절모의 아버지 구부정한 등이 선술집에서의 한 잔 술에 불과해진 모습으로 저녁 어스름을 헤치고 비스듬히 걸어옵니다. 바른 손에 들린 새끼줄 끝, 대롱거리는 고등어 자반 한 마리와 함께 말입니다. 흐릿한 불빛 아래의 저녁상 어린 자식들 앞으로 밀어주시는 젓가락질, 살 한 점 먹지 않아도 배부른. 이어 구멍 뚫린 양말을 기우시던, 헌실 풀어 벙어리 장갑 손뜨개질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도 보입니다. 이웃 아주머니 모두 모여 집집의 김장을 돌아가며 끝내고 연탄 광에 한 달 지필 연탄만 쌓여도 넉넉한 월동준비였던 그 때를, 젊으셨던 당신들의 가난하지만 당당했던 그 시절을 여태껏 부끄러워 감추고만 싶은 애써 기억에서 지웠던 참으로 어리석은….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쓰는 이 편지 덕분에 꽃을 바라볼 때면 아니 꽃을 떠올리기만 해도 눅눅해졌던 어린 시절을 지나, 그믐의 밤하늘에 스러지는 달처럼 쇠락(衰落)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는 까닭을 말입니다. 빔(空)이, 곧 참(滿)이었습니다.

참, 잊을 뻔했습니다. 빨간색 우체통을 기억하시는지요? 우체부 아저씨가 전해 주는 편지를 받아들 때보다도 그 우체통에 편지를 넣을 때의 마음의 떨림이 돌이켜 보면 더 좋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솔직히, 형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이 편지 또한 순전히 그러한 마음의 발로입니다. 당신께 전해지지, 끝내 못할지라도. 그리하여 전 이 밤이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의 있음이 저의 있음으로 이어지는 이 밤이기에 당신이 사양할지라도 전 거듭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추신. 편지 한 장 쓰지 않으시렵니까? 굳이 제 주소를 밝히지 않는다손치더라도 이미 당신은 아실 겁니다. 제 나이나 제 성별과 무관하게 당신 속에 자리잡은 미지의 당신을 말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 시간입니다. 당신이 편지를 쓰실 바로.
다음 편지를 쓰기까지, 내내….

촛불마저 끈 어두운 방. 그는, 그녀는 오랫동안 앉아 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깊고 편한 잠을 자고난 뒤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는지도. 역시,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녀는 그는 이제 외롭지 않다는 점이다. 바둑이가 앞서 걷던 눈길을 혼자 걷는다 해도 결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