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 망명수기 <17> 탈출

티벳 불교 총수이며 국가원수인 비구 달라이 라마의 망명 수기 : 내 나라, 내 겨레

2007-09-23     달라이 라마

  제 11장 탈 출

  날이 밝아 왔으나 안경 없는 시야는 흐렸다. 강변의 긴 풀을 큰 칼로 헤치며 길을 냈다. 사실은 중공군 복병을 수색하는 칼이었다. 가죽배로 도강하고 가다보니 먼저 온 가족과 동부지역 병사들이 30 여명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북경에서 5년간 세뇌공작을 받다가 온 소년도 있었는데 이틀 후 전사했다. 선발대로 떠났던 사람들이 조랑말을 구했는데 안장은 없었다. 서둘러 떠났다. 처음 몇 마일이 위험했다.

  길을 따라가는 행군이 아니라 불편해도 오른쪽에 중공군부대가 사정거리 안에 있고 그들의 자갈채취장도 있어 돌아가는데도 자갈길의 발굽소리는 정적을 깼다. 진로를 못 찾아 헤매는 사람들은 티베트국군이 수고했다. 강이 얕아 중공군이 거저 건너올까 봐 저지할 병력을 남겼다. 앞으로는 황량한 전도뿐이다. 새벽 3시경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척후를 보내니 선발대가 우리의 통과를 미리 알려 놨다고 했다. 눈치 챈 사람도 있고 영문 모르는 사람도 있었으나 일단 휴식을 취했다.여기서부터 동부지역 병사 400명이 추격을 막기로 했다. 지휘자는 스무 살의 청년으로 그에겐 다른 이, 삼백 명이 우리 일행을 위하여 배속되어 있었다.

나는 어딘가 잠시 피했다가 라사로 귀환할까 했다. 도로라고는 중공군이 관장해서 다닐 없고 그들이 못 따를 산으로 숨어서 유격대와 함께 행동해야 했다. 히말라야를 넘어 부탄으로 입국하고 다시 인도로 갈 계획인데 우리는 갠지스강 상류를 건너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공군이 나의 탈출 발견 즉시 수색명령이 하달될 것이고 우리는 곤궁에 빠지게 된다. 

앞을 막는 산부터 오르기 시작했다. 8시쯤 해가 떴으나 숲은 산에 가려 응달진 채 저 멀리만 훤했다.  사시사철 눈 덮인 높이까지 오르는데 조랑말과 노새는 지쳤다. 이때 우리에 합류한 노인이 자기의 백마를 내게 줬다. 일행은 기뻐하며 용기를 얻었다. 우리나라에선 이런 선물이 길조를 뜻한다.

산은 뒤쪽은 가파른 모래비탈이라 말들은 아껴두고 사람은 그대로 올랐다. 밑에 오기까지는 서너 시간 걸렸고 골짜기엔 눈을 뜨지 못하게 강풍이 몰아쳤다. 다행이라면 중공군도 눈을 못 뜨고 찾을 테니 안심이었다. 10마일 무인지경을 통과하여 나루를 건넜다. 강가에 동부유격대와 흰옷 양팔에 노란색으로 표시한 부락지원대도 마중나왔다. 그러나 라사의 소식을 듣자 모두 울었다. 마을 이름은 어울리지 않게 행복이라고 했다.

수백 년 평화롭게 화목하게 살아 온 티벳촌락이 위기에 부닥뜨리게 됐다. 이들도 달라이 라마를 위하여 싸우겠다고 했다. 오후 4시 반쯤 부락 절에 도착하니 밤 아홉시에야 후발대가 찾아왔다. 무려 18시간 쉬지 않고 온 길이다.
내각은 돌에 맞은 사람과 중공군 부대 안에 있는 사람에게 티벳의 자유를 위하여 희망을 갖고 최선을 다하자고 편지를 띄웠다.

나의 일행 백 명, 군인 삼백 오십 명, 유격대 오십 명중 백 명은 중공군이 차단할 도로를 선취하려고 먼저 출발했다.
닷새간을 산길로만 움직였다. 낮에는 분산하고 밤에는 절이나 마을에서 쉬었다. 유격대는 수시로 연락하는데 누구를 경호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지나는 곳마다 중공에 항전하는 유격대가 반겨 주었다.

계속 이동하며 앞으로의 대책을 강구했다. 유격대와 라사에도 연락하며 다시 중공과 평화교섭도 벌여보기로 했다.장소는 국영 가까운 남쪽지역의 중심지로 정했다. 내가 티베트 내에 있는 한 중공군도 조건을 제시하고 라사폭파도 막을지 몰랐다. 국경으로 근접하여 어머니와 누나가 편하게 동생을 내가 맡았다. 그 후 그들은 훨씬 수월하게 멀찌막이 앞섰다. 전지용 라디오는 미국의 소리 방송이 라사의 불안을 보도하며, 내가 행방불명이라 했다. 우리는 인도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하루는 말 탄 유격대를 만났는데 그 속에는 7개월 전 유격대를 회유하라고 보낸 사람도 섞여 있었다.   중공군이 나를 찾으려고 출동했고 라사는 포격을 당하고 자기들은 한바탕 접전을 했다고 소식을 전했다. 곧 나의 개인비서 연락도 왔다. 별궁에서 부상당하고 쓴 편지였다. 며칠간 여러 사람의 소식을 종합하니 그렇게도 노력한 라사포격 방지는 백지가 되고 말았다.

 3월 20일 새벽 두시 내가 라사 탈출 48시간 후 중공군이 나의 움직임을 모르고 진종일 별궁을 포격했단다. 다음은 포탈라궁, 시내, 다음은 사찰, 시민들이 얼마나 희생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별궁 안팎만도 수천 명이 죽고 기도하던 법당만 남았단다. 시내는 불을 질렀고 포탈라궁의 내 거실도 파괴했고 제 13대 달라이 라마승도 폭파했다.첫날 포격을 끝내고 중공군은 별궁일대의 승려시체만 살펴 나를 찾다가 밤에야 나의 탈출을 알았고 그전만 해도 별궁에 있으리라 집중 포화를 조준했다.

시체마저 못 찾자 시내고 시민이고 무차별 포격을 했단다. 시민은 막대기와 칼과 소총으로 대포에 항전했다. 자기 몸 하나도 지키지 못할 무기로 중공군을 해칠 수 없었다. 갈 길은 하나였다. 티벳 사람들은 8년 내내 중공군을 동조하지 않았고 중공은 무자비한 학살로 다스려왔다. 내가 머물러 백성에게 보탬이 될 일은 없어졌다. 중공군에게 잡혀가는 일만 남게 되었다.  이제 인도로 망명해서 희망을 잃지 말고 백성들을 위하여 진력하는 일 뿐이었다. 그러기에 앞서 남쪽에서 정부를 세우기로 했다. <계속>

 

홍교 김일수 옮김 
마하보디협회 한국지부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