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이커 안에 담긴 산수유, 그 빨간 열매 -

엽편소설/말〔馬〕처럼 뛰는 말〔言〕 생각하기

2007-09-23     관리자

휴게실에 켜놓은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하면서도 동욱 씨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이 시간에, 내가, 여기에, 왜? 게다가 출근하자마자 서투른 핑계로 쏟아지는 눈총을 피하며, 서둘러 와보니 무려 40여 분이나 일찍 도착한 것이다. 그래도 누구를 원망하랴. 남의 일처럼 무관심으로 버텨왔지만 어차피 아내 혼자만의 일은 아니니. 해도 영 찜찜했다. 지나는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듯 싶어, 슬슬 짜증이 일어나는 그런 마음 속의 분탕질에 쓸려 끝내는 죄 없는 아내를 원망하기까지 했다. 아니면 그만 둘 것이지 이게 무슨?
약속 시간 1분 전. 되돌아갈까, 말까, 본관 건물로부터 불과 십여 미터 떨어진 삼층 건물 입구에 다다를 때까지 그는 수없이 망설였다. 꼭 여기까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뒤처지는 발걸음을 겨우겨우 이끌고 이층계단을 더듬어 올랐다.

내일 당신 오래요.
밑도끝도 없이 현관을 들어서는 동욱 씨를 마주보며 아내가 말했다. 마치 나랑 수퍼 좀 가요. 혹은 새로 나온 비디오 테이프 좀 빌려오세요. 오늘 밤에는 텔레비전 프로가 볼 만한 게 없거든요 따위의 말처럼, 대수롭지 않게.
나? 누가?
양복 상의를 벗어 옷장 속에 걸어두고 돌아서는 그의 얼굴 앞에 얼굴을 바싹 들이밀고 마주 선 그녀는 그러나 쉽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니 내가 왜? 그리고 누가 날?
재처 묻는 말에 생각난 듯 띄엄띄엄 늘어놓는 말인즉,
용하다는 한의원 쫓아다니며 한약도 먹어봤지만 다 소용없더라. 당신도 아는 대로 결혼 십 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임신 한 번 못하지 않았느냐. 고등학교 동창 인순의 언니가 있는 병원은 제일 유명한데, 당신 모르게 불임 클리닉을 다녔다. 몇 가지 검사를 받았지만, 불임의 원인은 모르겠단다. 기분 나쁘겠지만 당신이 무정자증이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없단다. 당신과 같이 오라는 걸 갖은 변명을 대면서 물리쳤다. 이번 경우에는 다르다, 당신이 반드시 도와주어야만 하는 일이다. 잠깐이면 된다. 지금 내 난자가 아주 잘 자란 상태라서 내일 당신의 정자와 만나게만 한다면 임신 가능성이 아주 높단다. 그러니 내일 꼭, 당신이….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여자라는 사실로 말미암아 어딘지 좀 쑥스럽고 행동이 부자연스럽게만 느껴진 동욱 씨는 고개를 떨군다. 마침내 이층 계단을 전부 오르자 내부가 들여다 보이는 투명한 대형 유리가 보이고 이미 두 쌍의 부부와 대학생인 듯 젊은 사내 두 명이 있었다. ‘ㄱ’으로 놓여진 소파 양쪽에 앉은 사이에 끼인 듯 앉았던 그의 아내가 발딱 일어선다.
제 시간에 왔네요.
반갑게 맞는 아내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 자리에 서서는 대형 유리의 왼쪽 맨 가장자리에서부터 90센티미터쯤 떨어진 부근을 곧게 그어내린듯한 4밀리미터쯤의 홈을 내어 만들어진 여닫이 문의 바로 위에 ‘체외수정연구실’이라는 표지를 훑어본다. 다가가 문을 밀고, 저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저어…. 그러자 그의 등 뒤를 한껏 높인 목소리가 넘어 안으로 내달린다. 저기요! 하자, 안쪽에서 들려나는 밋밋한, 문 옆 탁자에 놓으세요. 원무과에서 돈 주고 받아온 양식 한 장을 문 안쪽에 바로 붙여댄 탁자 위로 내려놓는데, 뚜껑 위에 반창고 붙인 조그만 비이커가 그의 눈에 잡힌다. 어디에 사용되는 물건인가…? 한데, 옷자락을 당기는 아내의 손길에 물러난다. 그들이 그러는 모습을, 소파(사실은 ‘ㄱ’의 꺾인 부분은 떨어져 있고. 얼핏 눈여겨 보지 않으면, 문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거의 벽과 흡사하게 만들어)에 앉은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아예 서로의 시선이 만나지 않도록 잔뜩 긴장된, 그러면서 일종의 보안유지 같은 꽉 다문 입술. 한 발 앞서 ‘ㄱ’의 꺾인 부분으로 다가서는 그녀를 위해, 젊은 사내들이 앉을 만큼의 자리를 내준다. 앉자마자, 자신의 엉덩이를 그들쪽으로 밀치며 좁은 틈을 만들더니 그의 팔소매를 끌어당긴다. 해서, 소파 끝에 엉덩이를 겨우 걸친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았는데, 오른쪽 어깨 뒤에 있던 벽이 스르르 뒤로 밀려들어가는 바람에 그는 되일어난다.
끝났냐? 짜샤. 후딱 끝내지 그깟 걸 가지구 질질 끄냐?
그녀 옆에 앉은 젊은 사내가 점퍼 깃을 이어폰 꽂은 귀 밑까지 곧추 세운 동그란 무테 안경의 애띤 사내에게 면박을 준다. 바로 그 비이커를 왼손으로 감싸쥔 사내는 겸연쩍은 웃음을 배어물고, 유리문 앞으로 다가간다. 마침 흰 까운을 입은 머리를 뒤로 묶어 앞이마가 싱그럽게 보이는 한편, 단호하고 차가운 표정의 젊은 여자가 서 있다가 무덤덤 건네받는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며. 그와 그의 아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마주본다. 사실, 이층 계단을 올라 그 표지를 보는 순간 뜨악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는데 그녀도 그랬던 모양이다. 이분생식 아메바, 개구리의 수정란 따위가 수정이라는 어의(語義)에서 전해지는 전부였을 만큼 어느 부분에선 생명의 경외감마저 불러 일으켰거늘.
이윽고 정충선 씨, 나직한 방금 전의 그 여자의 목소리가 문을 밀치고 들려난다. 문 옆에 비껴 섰던 사내와 재빠르게 주고받는 누런 봉투 하나. 이어 ‘ㄱ’의 첫 획 부근에서 기다리던 사십대 초반의 부부가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간다. 그들을 비껴 봉투를 받은 사내와 그의 아내 옆에 앉았던 두 사내가 야, 늦겠다. 늦긴 오늘 제낄까? 수업 하루 빼먹는다고 뭐? 용돈도 두둑한데… 를 주고 받으며 계단 아래로 사라지기도 전에 여기에다 받아 오세요. 등을 보이며 돌아서는 여자의 냉랭한 얼굴과 비이커를 든 사내의 애매모호한 그림이 그려진 얼굴이 교차된다. 그럼 당신은 매점에 가 있어. 끝내고 갈께. 아하, 그것이었구나. 싱싱한 사내의 정충은 돈으로 사고, 비실비실한 정충의 사내들은 돈을 주고, 정충도. 빌어먹을. 그는 저도 모르게 부아가 치민다.
십여 분 쯤 지난 뒤 사내가 달리 굳은 표정이지만 마찬가지로 비이커를 오른손으로 감싸쥐고 걸어가 왼손을 뻗어 벌린 문 틈으로 밀어넣고는 급히 계단을 내려간다. 천천히 움직이며 여자가 다시 비이커를 안쪽으로 옮기고 난 후 오른손 약지로 문을 밀어, 오광희 씨, 부른다. 벽 같은 문으로 사라진 사내와 동행인 듯한 여자와, 그와, 그의 아내만이 남는다. 나이 탓일까, 두 번째 사내와 첫 번째 사내 중간 쯤의 나이로 짐작되는 세 번째 사내는 오 분이 채 못 되어 나온다. 여자가, 동시에 일어나 팔짱을 낀다. 왼팔을 내맡긴 사내는 여자를 내려보며 씨익 웃어보인다(그래, 저쯤은 돼야지. 까짓, 어차피 목적이 하나인 바에야).
마침내 강동욱 씨가 불려진다. 내 이름이련만 왜 이렇게 낯선가. 하면서도 그 역시 일어나 비이커를 받는다(좀, 웃으면 안 되냐? 환자 대하는 태도가 그게 뭐냐? 시집도 안 갔을…. 하긴 환자라고 붙이기엔 부르는, 불리는 양쪽이 다 어딘가 좀, 우스운. 오래 기다리셨지요, 손니임? 오늘은 손님이 많아설랑. 조금만 기다리시우. 2호실이 먼절꺼유. 그래두, 걔가 솜씨는 젤이유, 젤. 능글맞은 웃음을 실실 흘리며 젊은 동정(童貞)들을 유혹하는 사십을 넘어선 아낙이 아니라는 점에서 심심한 위로를?).
문을 열자, 무릎께로 누인 갈색 비닐 간이 침대, 왼편에는 세면대와 휴지통, 오른쪽에는 풀어진 두루말이 휴지가 놓인 텔레비전, 그 옆의 옷걸이. 어디서부터 시작을 한담? 그는 문을 닫고난 후 잠시 우두망찰, 낯선 환경 속에 내버려진 아이의 황망한 마음처럼 한동안 서 있는다. 마주보이는 커튼이 흔들리는 사이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한 그루, 열매 없는 가지에서 잎사귀 하나 떨어진다. 가을이구나. 마음 자락이 서늘하게 누그러진다. 풀어진 휴지 끝이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처럼 텔레비전 화면을 양분하는 아래, 작은 글씨가 쓰여진 스티커.
‘먼저 POWER를 누르시고 CH4에 맞추시오. 단, 볼륨은 더 이상 키우지 마시오. 사정은 준비된 용기에다, 정확히 하시고, 정액을 채취하시고 나면 반드시 POWER를 눌러 꺼진 상태를 확인한 후 용기를 제출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파워를 누르시라…? 유난스레 커다란 젖가슴 가리지 못한, 단지 움직임을 약간 둔화시키려고 떠받친 브래지어의 여자, 허리 숙여 손바닥만한 팬티 벌려 다리 넣는데, 침대에 누워 담배 피우는 남자. 대화가 존재하지 않는 장면. 검은 색 브래지어와 팬티의 여자, 붉은 루즈 칠한 자신의 입술, 길게 혀 내밀어 훔친다. 뒤이어 환한 대낮. 건물 빠져나온 붉은 색 스포츠카 운전석, 팬티 보일 만큼 말려 올라간 짧은 스커트의 여자 아랫도리에 다가서는 카메라. 허, 참. 저걸 보고 내 마음의 흔들림을 꼬드껴라?
거의 삼십 분이 지나서야 문이 열린다. 초조하게 기다리며 구겨졌던 그의 아내 얼굴 주름이 펴진다. 유리 안쪽, 앞이마가 시원한 여자의 얼굴에서 냉랭한 기운이 지워진다. 비이커를 받아들며 빙싯 웃고는 고생하셨어요, 한다. 고생? 무슨…, 하다 등 뒤의 아내가 그는 궁금해진다. 환하게 웃자. 웃자고, 다독거리며 돌아서는데 깔깔 소리내어 웃는 그녀.
당신 지금 웃는 거 맞죠?
입술꼬리가 돌돌 말려 외려 심각해진 그. 그러나 남의 손을 빌린다지만, 자신의 정자를 감싸안는 아내의 성숙한 난자를 떠올리니, 비로소 웃음이 인다.

이 놈한테, 이 얘기를 해줘, 말어?
계단을 내려오는 중간에 아내의 밋밋한 아랫배를 가리키며, 그가 말한다. 하자, 입을 손으로 가리며 웃는 그녀. 남은 손을 그러잡는 그.
여보야, 오늘 밤에 모처럼 우리 사랑 한 번 할까?
하니, 삼십대 중반을 넘긴 그녀의 얼굴이 가을날 가지마다 가득 달린 산수유 붉은 열매처럼 예쁘게 물든다. 동욱 씨 마음 속으로 그 산수유 닮은 딸아이가 아장아장 걸어온다.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