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성학] 부드러운 말 한마디

삶의 여성학

2007-09-23     관리자

오랜 만에 대학동창이 만나자고 한다. 그다지 친하거나 자주 만나던 친구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 동안 어떻게 변했을지, 혹시 못 알아 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며 약속장소에 나갔다.

모습을 보는 순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고 “너 쭜쭜 맞지?” 하며 서로의 변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웃음부터 터뜨렸다. 그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너랑 친하던 쭜쭜는 뭐 하니?”, “지각 잘 하던 쭜쭜는 어디 사니?” 하며 주변 인물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 사람 저 사람 기억나는 대로 입에 올리며 잠시나마 대학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 속으로 그렇게 한참을 수다떨고 난 후에 시작된 그 친구의 이야기는 뜻밖에 요즈음 남편과의 잦은 다툼으로 결혼생활이 말이 아니라고 한다.

워낙 회사의 일을 집에 와서 시시콜콜 털어놓는 남편이 아니었기에 속사정을 잘 알지는 못해도 그저 회사를 잘 다니는 줄로만 알고 화목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부터 남편의 귀가시간이 늦어지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처음엔 한두 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였는데 하루 이틀이 아니라 계속해서 남편의 귀가시간은 늦어졌고 이런 와중에 서로 다툼은 잦아졌고, 이런 일이 제법 계속되자 이 친구는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혹시’ 하는 마음에 한동안 남편을 의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뉴스를 보면서 꽤 많은 직장인들이 일자리를 잃었으며 이번 대학졸업생들에게는 더욱 취업문이 좁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남편이 회사에서의 스트레스가 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 동안 남편을 의심했던 자신을 탓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잘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그날은 반주(飯酒)까지 곁들인 저녁상을 준비하였고 마침 남편의 귀가도 다른 날보다 일렀다고 한다.

이 친구는 남편 옆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남편의 노고를 위로하고 앞으로 잘해보자는 다짐을 하려 하는데, 뜻밖에 남편은 술을 한 잔 하더니 “회사를 그만 다니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순간, 이 친구는 자신도 모르게 “그게 무슨 말이냐.”며 펄쩍 뛰었고 남편은 그때부터 말문을 닫고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다.

며칠 전에도 밤 11시가 넘어서 이제 집에 간다고 전화한 남편이 새벽 1시가 넘도록 도착하지 않자 ‘또 늦는군, 정말 지겹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조금 지나서는 ‘혹시 신고가 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과 불안에 싸여 있었으나 잠시 후 아파트 복도에서 남편의 발소리가 들리자 이 친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내다보지도 않고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들어오는 남편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과 곱지 않은 언행으로 쏘아붙이고는 축 늘어진 남편의 어깨를 보면서 ‘아차 잘못했구나.’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큰소리로 화를 내는 남편이 너무나 야속하여 속이 상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점점 안색도 나빠지는 남편이 너무 안쓰러운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말만 하면 남편은 화를 내고,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원하지 않는 말이 불쑥 튀어나와 이제는 겁이나 말을 꺼낼 수도 없으니 답답해 죽겠다고 한다.

이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마도 이런 상황의 가정이 꽤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그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고 전달하는 대화의 요령이 없어서 일이 점점 커진 것이다. 마침 얼마 전에 가정생활관련상담소에 연구원으로 있는 친구가 준 자료에서 본 부부간 대화의 기술에 대한 내용이 떠올라 그것을 적용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앞으로는 남편이 늦게 오면 무조건 화를 내지 말고 “당신이 늦게 오니 기다리는 동안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제 안심이 되네요.”라고 솔직하게 말을 하면 분명 지금처럼 악화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 친구는 “아유 그렇게 간지러운 말을 어떻게 하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부부이기 때문에 서로를 생각해주는 것이 당연하고 실제로 일어난 남편의 행동과 자신의 걱정하는 마음을 그대로 말로 옮기면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대화의 기술은 매우 단순한 것이다.

대화의 요령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순화시켜서 표현할 수 있다. “당신이 늦게 오니 기다리는 동안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제 안심이 되네요. 실은 당신이 가정을 소홀히 생각하는 것 같아 좀 섭섭했어요.”라든지, 자신의 희망사항을 담아서 “당신이 늦게 오니 기다리는 동안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제 안심이 되네요. 조금만 더 일찍 들어오시면 참 좋겠어요.”라고 말을 할 수 있다.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배려와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자신의 희망사항을 전달하는 것이 문제를 예방하는 동반자적 대화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처럼 쉽고 부드러운 말 한마디가 바로 서로의 언 가슴을 녹이는 감로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