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산순례기] 11.시가체(Shigatse)의 사원들 2

수미산 순례기 11

2007-09-23     김규현

기원의 오색깃발, ‘타루쵸 경번(經幡)’

친구따라 강남 간다던가, 짚차(지프)와 도반이 생긴 김에 라사에의 귀로를 며칠 연기하고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새벽에 시가체를 뒤로 하였다.

하루거리에 몽고제국의 영광이 서려 있는 대사원 ‘사캬 사원(Sakya. 薩迦)’의 웅위함이 기다리고 있고 이틀거리면 대설산 히말라야의 만년설이 빛나고 있을곳에 도착할텐데, 그까짓 티벳어 몇 자 배우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랴. 뭐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티벳어 개인교사일텐데.

차는 마치 외계의 혹성 같은 황량한 벌판을 가로지르며 달린다. 오늘따라 예의 티벳 특유의 푸른 하늘 대신 먹구름이 낮게 깔리고 때때로 멀리 광야 건너편으로 모래기둥이 하늘로 솟구친다. 그 속을 까마귀 몇 마리가 오늘 이승을 떠난 영혼을 물고 하늘로 올라 가는지 천천히 비상한다.

오늘 날씨처럼 가슴 또한 답답해진다. 어저께부터 집요하게 머리속을 헤집고 들어오는 화두 하나. 그것은 바로 이 땅의 미래였다. 어제 오후 타시룬포 사원에서 잠시 만난 11대 판첸라마(班禪) 때문이었다. 그 화두는 저녁 내내 지방유지들이 마련한 거창한 환영회에서도, 밤 늦게 혼자서 거리를 거닐 때에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달라이라마와 함께 민족의 앞날을 헤쳐나가야 할 양대산맥의 하나인 판첸라마가 이제 겨우 10살 짜리 어린이라니…. 그 가녀린 어깨 위에 얹혀 있는 민족의 장래! 한때는 중앙아시아를 호령했던 대제국을 이룩하여 이 척박한 고원 위에 찬란한 불교 문화의 꽃을 만개시겼던 티벳 민족! 그들은 이대로 중국에 동화되어 세계무대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는가?

하염없는 상념에서 깨어보니 차는 갸초라 고갯마루에 올라 있었는데, 티벳의 고갯치고는 높지 않은 해발 5천m급이었지만, 항상 그렇듯이 그곳 역시 돌무덤 쵸르텐이 여러 무더기 서서 거센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곳에 꼽혀 있는 나뭇가지에는 이곳 사람들의 기원이 달린 오색의 깃발이 괴이한 소리를 내며 펄럭이면서 인간의 뜻을 하늘에 전하고 또 신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고 있었다. 일행은 돌 하나씩 집어 쵸르텐에 얹으며 합장한다. 해동의 나그네도 따라서 돌 하나를 얹으며 속으로 물어 보았다. “천지신명이시여! 굽어 살피소서, 당신의 선량한 백성들을…”.

사캬 사원 (薩迦,sakya)의 영광이여!

점심 때가 넘어서야 차는 라사-카투만두 간의 공로인 우회도로를 벗어나 소로로 접어들어 한참을 달려서야 사캬 사원에 도착하였다.

누운 코끼리 같다는 이름의 회색빛 산기슭에 자리잡은 이 유서깊은 거대한 사원은 멀리서 보면 사원이라기보다는 암회색의 높은 담장과 각루를 갖춘 사각형의 요새 같았다. 티벳의 전 사원들을 답사한 내 눈에 익숙한, 인도식·중국식이 가미된 양식과는 다른, 한 마디로 특이한 모습이었다. 회색바탕에 흰색과 붉은 색의 띠를 두른 색채도 이채롭지만, 사방에 방어용 누각을 배치한 점 등등은 사원이라기보다 견고한 중세형의 방어용 성곽이었다. 다만 가운데에서 빛나는 금빛 지붕만이 사원의 모습을 조금 풍기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 사캬의 역사를 알면 간단히 이해된다. 이 사원은 몽고가 티벳을 지배할 당시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알려진 대로 한 시대 전세계를 지배했던 것에 비해 몽고 제국의 가시적 유산은 그리 많지 않다. 건축도 마찬가지여서 몽고식하면 떠오르는 것은 그저 이동식의 천막(켈)뿐 웅장한 성곽이나 사원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는다. 몽고의 역사는 정복했던 민족 속으로 동화되어버린 탓이다. 문화가 없었던 대제국이 주는 역사의 교훈이 된 셈이다. 그렇게 사라져버린 몽고 제국의 영광이 아이러니칼하게도 이곳 티벳 고원에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되살아난 몽고 제국의 영광이여!

드디어 몽고 병사의 말발굽 소리가 들릴 듯한 거대한 정문 앞에 섰다. 온통 회색으로 칠한 목조건물이 나그네를 맞는다. 사캬란 이곳 말로 ‘회색의 땅’을 뜻한다. 이것에서 연유되어 지금 티벳의 4대 종파의 하나인 사캬파의 특징은 색깔로 구분되어 회색바탕에 흰 색·붉은 색의 띠를 두른 것으로 상징된다.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다 보면 가끔 만나는 같은 색깔의 민가들은 바로 사캬파의 집이란 뜻이다. 사캬파의 기원을 이렇게 시작해보자.

토번(土幡) 왕국의 전성기가 지나고 티벳이 분열되어 있을 11세기, 라사에서 4백km 떨어진 중앙 티벳(창 지방)의 한 지방 - 땅의 색깔이 온통 회백색이어서 사캬라고 불려왔던 곳- 에서 쿤(昆)이란 토호족이 민족 중흥의 기치를 내걸고 기존의 종파인 닝마·카규에 이은 새로운 종파를 옹립하여 1073년 이곳에 사캬 사원을 세우게 된다.

그 후 사캬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릴 인물들 - 조카·삼촌이 태어나니 그들이 바로 판디타(班智達)와 빠스파(八思巴)였다. 먼저 삼촌이 몽고로 가 민중의 신임을 얻고 뒤를 이어 빠스파가 원(元) 왕실에 들어가 티벳의 문자를 변형해 몽고 문자를 만들기도 하고 종교가 없었던 왕실을 감화시켜 불교를 원나라의 국교로 삼게 만들고 그는 원의 왕사(王師)가 된다. 이때 불교는 비로소 범세계적인 종교로 변하게 된다. 이미 종주국 인도에서는 불교가 사라진 지 오래였을 당시였다.

그가 그렇게 8년간 원나라에 머물다 고향으로 돌아오자 원세조 쿠빌라이칸은 사캬 법왕(法王)의 칭호와 함께 13만 호의 봉록을 주어 티벳 전역의 통치권까지 주게 되어 지금의 법왕제도가 생기는 효시가 된다. 고향 사캬에다 도읍을 정한 빠스파 법왕은 민족의 통일에 힘쓰는 한편 문치에도 힘을 기울여 티벳은 또 한번 불교 문화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1268년 그는 옛 사원의 건너편에 새로 웅장한 사원을 심혈을 기울여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이 사캬 사원이다.

원나라의 후원으로 완성된 공사는 전 중앙아시아 불교국가들의 힘을 모은 합작품으로서 후에 포타라 궁전이 완성되기 이전에는 티벳 고원의 최고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원나라의 짧은 통치와 함께 사캬파의 세력도 쇠잔해져서 그 바톤을 지금 티벳의 실력파인 게룩파, 곧 달라이 종파에게 넘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숨어 들었으니 권력의 속성이란 그런 것일지라도 후인으로 하여금 허망함을 금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웅장한 건물과 2만 권의 경서들과 1천 점의 당카 및 수많은 조각상들은 당시의 문화의 찬란함과 영광을 되새겨 볼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