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음에 진리의 꽃을 피우라

불광법단

2007-09-22     관리자

이 글은 광덕 스님께서 불광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녹음, 편집부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지혜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지혜는 겉껍데기에 있어서 걸렸던 생각을 뚫고 깊은 마음에 들어서 얻어진 지혜를 말합니다.
반야가 지혜 가운데 가장 최고의 지혜입니다. 일심염송해서 지혜에 도달해버리면 이제까지 허망한 것을 붙잡고 매달려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깊은 정에 들어가고 지혜를 얻어서 그 다음에 해탈을 얻는 것입니다. 해탈은 자재를 얻는 것, 걸림이 없는 것, 법신진리, 진리인 몸을 회복해서 진리인 공덕을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 하루하루 몸이 건강해지고 평화로워지고 사업이 원만해지고 나라가 잘 되고 하는 데다 어떤 기도의 목표를 두고 수행도 합니다마는 필경 궁극적인 진리인즉슨 역시 이 진리 속에 자기확립을 하는 것, 그렇게 자기확립을 한 바에 의해서 지혜를 쓰고, 그 진리로써 자기를 삼아서 생사에서 해탈하는 대자유를 이루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도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삶 가운데서 이제까지 윤회생활을 해왔습니다. 누구든지 지금 금생에 있다고 하는 것은 전생이 있었습니다. 전생과 나와의 관계는 바로 부모를 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런데 부모를 통해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부모를 선택한 그 자기는 바로 전생의 또 자기입니다. 영적 동질성, 부모와 자기의 영적 동질성이 서로 통해서 그 부모를 선택하게 되고, 그 부모인연으로 그 집안에 태어납니다.
그 때 부모와의 영적인 동질성 때문에 그 집안의 유전같은 것을 상속하게 됩니다마는 금생이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전생이 있고, 바로 금생은 전생의 내생입니다. 또 동시에 금생은 내생의 전생이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이 있다고 하는 사실은 내생이 분명히 있고 전생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서 우리 마음이 근본이 되어서 이 마음쓰기에 따라서 제왕도 되고, 혹은 부자도 되고, 장군도 되고, 학자도 되고, 혹은 그 반대로 좋지 않은 일을 하고, 고통받는 일을 하고, 악도에도 떨어지고, 천상에도 태어나고, 아귀도 되고, 수많은 일을 해가면서 수많은 세계를 돌아가는 것은 바로 그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음을 쓰기에 따라서 착하고 훌륭하고 지혜스런 마음을 쓰면 그에 상응해서 지혜스럽고 밝은 마음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밝은 마음에 따른 그 세계를 만나게 됩니다.

마음을 어떻게 쓸 것인가

물론 어두운 마음을 쓰면 어둡고 시커먼 것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거기만 찾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갖고, 깊은 마음을 지혜스럽고 착하게 쓰면 그것에 상응하는 집안에 태어나게 됩니다. 훌륭한 자녀를 갖고 싶고, 훌륭한 영이 자기 집안에 태어나게 하고 싶거든 그 부모가 밝고 깨끗하고 훌륭한 심성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부모가 마음이 탁하고 거칠고 어두운 상태를 가지고 있으면 거기에 유사한 영이 그 집을 찾아옵니다. 통로가 같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동의영성(同意靈性)이라고 합니다. 이쪽에서 가는 측도 자기 심성에 알맞는 것밖에 보이지 않고 받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사람이 같이 모여서 한집안 식구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가문도 되고 한집단사회, 한나라, 한백성도 되는 것입니다.
탐진치(貪瞋痴) 삼독심을 버리지 못하고 삼독심을 제멋대로 부리면 그야말로 삼악도(三惡道)라고 하는 고통 많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고, 오계(五戒)를 배워서 오계를 가지는 사람들은 바로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착한 마음의 기준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계를 받든 안 받든 그런 오계정신을 지닌 사람들은 그래도 인간으로 태어날 부분이 있지만 오계고 뭐고 다 팽개쳐버리고 그때 그때 목적달성을 위해서 온갖 짓을 다하는 사람은 기준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옛날에는 부도덕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도덕이 아니라 부도덕. 그런데 요즈음은 부도덕이라기보다 오히려 무도덕, 도덕이 없는 세상이 된 듯합니다. 도덕이 없는 묘한 삶이 정말 때로는 성인군자가 될 수 있는가 하면, 동물보다도 더 망측스런 행을 떳떳하게 하고 있는 그런 세상도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을 바로잡는 길은 계법을 닦는 것입니다. 이 계율이 이 세간에 머물 진리를 깨달아 증득하는 뚜렷한 목적이 있는 불교는 대인격을 완성시키는 무상의 정신이다.

불교는 염세(厭世)가 아니라 응세구제(應世救濟)이다

불교교리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삼법인(三法印) 진리의 첫째가 제행무상의 진리이다. 불교는 염세적으로 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주의 운동을 설명하신 것으로 시간과 공간 속에 내재하여 있는 물질과 비물질이 제각기 자성대로 머무름이 없이 시시각각 변화천류(變化遷流)해 가는 과정이요, 자연법칙으로 무시무종이 있어 온 진리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허망하여 버려야 할 슬픈 염세가 아니며, 본래부터 죄를 짊어지고 나는 죄인의 세계도 물론 아니다. 내 마음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서, 부처님도 될 수 있는 매우 희망적인 세계요, 갈 것도 없고 올 것도 없는 바로 이 자리, 이 세계이니만큼 최대한으로 잘 살아야 할 세계이다. 그 많고 많은 사람의 얼굴 모습이 천인천색(千人千色)이요, 만인만색(萬人萬色)으로, 제각기 다르듯이 중생의 업이 다르고 근기가 다르니 부처님이 거기에 마땅한 천백억 화신의 응신으로 제도하시는 응세구제가 또하나의 불교의 특징이다.

불교는 차별이 아니라 일체평등이다

불교의 평등권은 연기법의 진리를 기본으로 말하게 된다. 인간대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모든 생명이 연관관계로 존립되어 있는 것으로 만물일체가 하나하나 단절된 개체로 독립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이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 일체가 공통된 원리와 요소가 분화된 것이니 시공 속에 깊은 연관관계로 더불어 존립되어 있는 동근(同根)의 원리다.
이와 같이 중생과 부처가 이원적(二元的)이 아니요, 동일법성(同一法性)으로 중생도 성불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갖춘 가능성과 존엄성을 인정하는 차원높은 불교의 평등관이다. 여기에 비해 유일신교의 평등관은 신 앞의 만인이 평등하다. 즉 조물주와 피조물 다시 말해 인간과 신은 본질적으로 다른 어디까지나 주(主)와 종(從)으로 유일신은 나의 주인이요 나는 주를 따르는 종으로 제아무리 노력해도 피아(彼我)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 상대적 차별을 전제하니 평등일 수 없다.
또한 자기가 아닌 다른 신에 의해 구원되어 천당에 나서 영생한다는 즉 상대적 고락의 세계에서 영원히 산다는 게 목적이다. 그러나 천당도 신도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상대적 세계에 불과한 세계이니, 복이 다하면 다시 윤회하는 세계로, 생이 있으면 반드시 멸이 필연적으로 있게 되는 상대성 원리로 영생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불교의 목적은 상대적 세계를 초월해 절대열반의 세계, 본래 생사없는 진리를 깨달아 생사를 자유자재하는 성불을 이루는 데 크나큰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서양종교와는 근본적으로 엄격히 다른 고차원적 종교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다른 교와 같은 차원에서 ‘종교는 선을 행하라는 것으로 결국 같은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얼버무리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착오로 만겁을 지내도 윤회를 벗어날 수 없는 생각이다.
불교는 종교라고 하기 이전에 대우주의 근원실상이며, 현대과학이 따르지 못하는 초과학적 원리로 삼천대천세계의 거대한 삼라만상을 하나로 접었을 때 마음 심(心)자 하나요, 마음은 일체를 머금어 있는 바탕으로 참으로 미묘한 정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