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산순례기] 10.시가체(shigatse)의 사원들1

수미산 순례기

2007-09-22     김규현

강물 속의 저녁노을

너무나 찬란하였다. 만년설이 녹아내려 대하를 이룬 티벳평야의젓줄, 얄룬장포(Yarlung Tsangpo)강의 수면 위에 비친 저녁노을은 너무나 찬란하였다. 길 떠난 나그네의 가슴속 깊이 응어리진 바닥 모를 슬픔마저도 끄집어 낼듯, 그렇게 처절하게 찬란하였다.

해발 평균고도 4천m 이상의 티벳 고원에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학의 일반상식이 통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거리감각이라든지 색채 감각 같은 것이 그 예이다. 공기 중의 산소밀도가 희박하고 또 공해 없는 환경 탓인지는 몰라도 인간의 뇌세포 및 감각기관이 좀 이상해져도 객관적 판단을 흐리게 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저 평범한 물체라도 티벳 고원의 야성이 살아 있는 햇빛 속에서 바라보면 마치 살아 있는 듯, 물체의 가장자리에 오로라 같은 빛의 망막이 쳐진 듯 보이며 물체의 가운데는 초점이 흐린 듯하게 보인다. 그렇기에 모든 물체는 강렬하게 보이며 색채 또한 ‘샛’이 라는 접두사를 붙여서 불러야 할 정도이다.

지구상 어디에도 저녁노을은 아름답겠지만 특히 티벳 고원의 노을이 찬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위에서 지적한 것 때문이리라. 거기에 그런 노을을 바라보는 주체인 나그네의 심리상태가 상승작용을 하여 더욱 감동스런 광경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우연만 해도 그렇다. 라사에 도착한 후 몇 달 동안 학교에서 두문불출하여 티벳어 학습삼매에 빠져 있었기에 가끔씩 내 역마살을 유혹하는 광야의 부름소리나 수미산의 환상을 의지로써 차단시키고 지내온 터였다. 그러나 며칠 전부터 공부에 열중이 안 되고 매사에 산만스러워짐을 느끼게 되어 ‘길의 부름소리’ 인가보다 생각하던 차, 오늘 오후에 우연히 길가에서 연구차 길 떠나는 동료교수팀을 만나 즉석에서 의기투합하여 라사를 벗어난 것이었다.

티벳에서는 이런 즉흥적 여행은 사실상 불가능한 실정이다. 본토인도 그렇지만 외국인은 더욱 그러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티벳의 땅은 우리 나라의 6배나 되는 광대한 땅이기에 이웃의 도시도 당일로는 갈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안국의 ‘여행허가서’라는 것도 며칠 전부터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늘 내가 이렇게 길을 떠나 이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볼 수 있음은 보통 행운이 아닌 것이다. 여기 말로 ‘타시데릭’ 즉 행복·행운인 것이다.

외계의 혹성 같은 광야에 마치 거대한 금빛 뱀처럼 굽이친 ‘얄룽장포 강’- 수미산에서 발원하여 히말라야 산맥을 끼고 티벳 고원을 돌아 나중에는 인도평야로 내려가 갠지스 강과 합류해 캘커타에서 벵갈만으로 들어가는 수면 위에는 찬란한 검붉은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는데 우리의 지프차는 한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판첸라마(Pan Chen, 班禪)의 사원, '타시룬 포'

새벽녘에야 도착한 티벳 제2의 도시 시가체(Shigatse)에서 잠시 토끼잠을 자고 일행과 떨어져 새벽시장으로 향하였다. 이곳 시가체는 고대로부터 중부지방의 정치·경제·종교·문화의 중심 지여서 주위의 각 지방에서 온갖 물건이 새벽에 시장에 집결하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갖고 시장바닥을 뒤져 보았으나 눈에 띄는 민예품은 보이지 않았다.

그럭저럭 시간을 때우고 타시룬 포 사원 앞으로 가니 막 대문을 열고 있었다.티벳 불교인 황교의 육대사원 중의 최대사원인 이 유서깊은 타시룬포는 티벳어로 길상수미(吉祥須彌)를 뜻하는데 1447년, 황교의 창시자 ‘종카바’의 제자인 ‘젠단줍파(根敦珠巴 1391-1474)’가 지방 호족의 도움으로 개산하여 황교의 본거지가 되었다. 그는 후에 제1대 달라이라마로 추앙되는 인물이다.

특히 제5대 달라이라마가 그 스승이 아미타불의 화신으로서 이 사원에 환생 하였다고 인정하면서 판첸라마(班禪) 제도로 공인되기 시작하여 달라이와 함께 쌍벽을 이루며 티벳불교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 달라이·판첸의 제도는 다른 나라에는 즉 대승·소승권에는 없는 티벳 만의 독특한 제도로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의발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환생하여 의발을 받는 제도를 말한다.

달라이·판첸이 열반하면 일정 기간 그 자리를 공석으로 두고 그 사이에 태어나는 어린이 중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환생자를 가려내어 그 자리를 계승케하는 방법이다. 비유하자면 『티벳사자의 서(書)』 에 나오는 ‘퇴르텐’ 즉-숨겨진 경전을 찾기 위해 환생한 자- 에 해당된다고나 할까. 둘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달라이가 관음보살의 화신이며 라사 지방을 다스리는 법왕이라면 판첸은 아미타불의 화신이며 시가체 지방을 다스리는 직책이라는 점이 다르고, 의미 또한 달라이가 ‘지혜의 바다’를, 판첸이 ‘대학자’라는 정도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달라이에서 파생된 판첸은 타시룬포 사원의 주지로서 시가체 지방의 주인으로서 대를 이어 내려와 현재는 제11대에 이르렀다. 1989년 10대 판첸이청해성의 타르사에서 객사하자 인도 다람살라에서 유랑생활을 하고 있던 14대달라이 측에서 후계자를 찾아내자 이에 맞서 중국측 티벳 정부에서도 여섯 살 어린이를 찾아내어 11대 판첸라마(額 爾德尼)로 옹립하여 1996, 여름 타시룬포 사원의 주지에 앉히게 되었다.

이에 국내외에서는 어용시비가 일어났지만, 어쩌랴. 이 모두가 나라 잃은 민족이 겪어야 할 시련인 것을… 그가 설사 아미타불의 화신이고 10대 판첸의 환생자일지라도 지금에야 어쩌랴. 언제쯤이나 그가 자라 성인이 되어 자신의 처지나 조국의 현실을 자각하게 될까? 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대문을 들어서 광장에 서니 산비탈에 의지하여 계단식으로 자리잡은 백악의 건물군과 붉은 대법당의 황금지붕이 한눈에 들어온다. 웅장하고 찬란하다. 광장을 지나 ‘마니차’가 도열해 있는 참배로를 따라가니 왼쪽으로는 판첸라마의 궁전과 제불보살의 영당이, 그 끝에는 이 사원의 자랑거리인 웅장한 미륵당이 나타난다.

온갖 보석으로 모자이크한 절만(卍)자가 깔린 현관을 통하여 영원에의 매듭이 새겨진 대문휘장을 걷고 법당에 들어서니 26m나 되는 거대한 청동 미륵불이 300kg의 순금옷을 입으시고 해동의 나그네를 굽어보고 계셨다. 반개한 그 눈빛은 마치 허공에 떠있는 듯하여 삼계의 무명을 꿰뚫어 볼 듯한 그런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발 밑에서 오늘도 일단의 참배객이 피를 흘리며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다.

문득 아득한 곳에서 환청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핍박받는 선량한 민족이 살고 있는 바로 이곳이 미륵불이 오실 그 도솔천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