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봉수상수제(隱峰隨想數題)

보현행자의 목소리

2007-09-22     관리자

“석가세존은 우리 민족의 시조단군할아버지의 후예이며 불교는 원래 우리 나라에서 시작되었다”는 학설이 최근에 제주대학의 안창범 교수에 의하여 제기되어 학계에 비상한 관심과 연구과제를 던지고 있으나 이를 잠시 접어 두고 과거의 통설에 따른다면 불교의 시발국인 ‘인도’에서 어찌하여 현재 불교가 쇠퇴하여 인도 국민 대부분이 ‘힌두교’를 신봉하게 되었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이유인즉 알고보면 간단하다. 즉 불교는 최고무상의 진리이지만 인도의 고질인 4성계급타파를 주장하는 불교의 철저한 자주자유사상이 계급세습을 영구화하려는 브라만 계급의 권익유지에 걸림돌이 되므로 불교를 탄압 말살하게 되었던 것인데 이러한 고질병은 여간해서 치유되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우리 불교계 지도층 일각에서 불교와 기독교가 외양은 다른 것같이 보이나 실제로는 동일하다는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양교는 엄연히 다르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데 이러한 양상은 일반인의 종교선택에 갈등을 일으키게 함은 물론 신자들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종교간의 대화나 화합문제하고는 차원이 다른 종교 자체의 존립의의와 고유사항이니만치 신중하고도 조용히 다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 지상보도에 의하면 20년간 하산하지 아니하고 정진하였다는 어느 스님은 불교와 기독교의 유사한 예화 여러 가지를 제시하면서 양교의 교리가 동일하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어느 종교든간에 대중을 선도한다는 입장이어서 우연히 유사한 사항이 벌어질 수도 있고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먼저 나타난 현상이 다음 나타난 것의 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우리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이다.
불교와 기독교가 동일하다고 볼 수 없는 몇 가지만 추려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①불교에서는 일체 만물을 모양 아님으로 보면 여래를 본다 하여 일체 만물이 실상현전으로 트이니 유무(有無)가 자취를 감춘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불교는 유무를 초월하지만 기독교는 유무를 그대로 본다.
②불교에서는 생사(生死)를 초월해서 지금 현재를 생사를 초월한 해탈의 자리로 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생사라는 말조차도 거론될 수 없지만 기독교에서는 생사를 그대로 본다. 부처님은 자기를 죽어서 없다 해도 틀리고 살아서 있다 해도 틀린다고 하였으니 유무나 생사에 걸리지 않음을 나타냄이다.
③불교에서는 원래는 누구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주인공임을 가르치지만 기독교에서는 ‘여호와’라는 신의 창조에 의한 ‘피조물’ 또는 ‘종’에 불과하다고 자칭하고 있다.
④불교에서는 해탈경지에서 무아(無我)이기에 인과도 초월하지만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연기법을 설하였으며 기독교에서는 인간과 일체 만물을 ‘여호와신’이 창조하였다고 한다.
⑤불교에서는 부처님이 가르치신 대로 수행정진하여 불교의 목적인 해탈에 이르게 되는 것인데 기독교에서는 그 교를 믿고 기도와 찬양만 하면 죽은 후 무덤에서 예수의 재림을 기다려 예수의 심판을 받고 여호와신의 구원으로 다시 새몸을 받아 천국에 가서 영생한다는 것이다.
⑥기독교에서는 ‘여호와신’이 인간과 일체 만물을 창조한 지가 6천 년이 된다고 하였는데 불교에서는 해탈한 ‘무심인’에게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입장이라 햇수로 따질 수 없고 굳이 시간적으로 따지자면 무시무종(無始無終)하여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되풀이할 뿐으로 시간적으로 한정할 수 없다.
이상 몇 가지만으로도 두 종교의 다른 면을 지적할 수 있는데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현재 경제난국을 맞이하여 개인은 물론 사회 전반이 어려움에 처하여 하루하루를 지내기가 벅찬 실정인데 이러한 때야말로 서로서로 고통을 나누고 격려하며 같이 땀흘려 노력하고 힘되는 데까지 서로 도와서 이 어려운 고비를 넘어야하겠는데 특히 우리 불자들은 동체대비라는 대승적 보살심을 발휘하여 무심(無心)의 보시행을 실천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