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

보리수 그늘

2007-09-21     관리자

  가뭇없는 은사를 그리며 고향 산길을 걷다가 도토리를 줍는 다람쥐를 보았다.

  오르락 내리락 날쌔게 움직이는 다람쥐는 뺨속 주머니에 불룩하게 담아 물고 조그마한 앞 밭에 상수리를 집어들다가 인기척을 느끼자 부리나케 집어 던지고는 바윗돌 사이로 쪼르르 도망을 간다.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다람쥐의 모습에 취해 도토리숲에 숨어 앉았다. 바윗돌 사이엔 들국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옥빛 하늘은 산을 안았다.

  향긋한 가을풀 냄새가 코 끝에 와 짙게 풍긴다.

  먼 옛날 다정하게 조잘대며 소풍가던 산길. 늘 온화하시고 낭만스럽던 선생님 생각도 나고, 말괄량이처럼 뛰놀던 친구들 낸새도 나는 듯 하다.

  억새풀 하나를 뜯어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어본다.

  풋내가 혀끝에 닿아 향긋하다.

  풀숲에 팔베개를 하고 누우니 이곳이 과연 천국이고 극락이다.

  <휘리리리>하고 우는 풀종다리의 여릿한 자장노래에 어느 사이 살포시 들었던 풋잠을 깨어보니 바윗돌 틈바구니에서는 너댓 마리의 다람쥐들이 들락거렸다.

  까맣고 큰 눈이 바쁘게 움직여서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민첩하기 그지없다.

  까만 눈위에 곱게 그려진 흰 선은 마치 여인의 아름다운 눈두덩에 밝은 아이샤도우를 칠해 놓은 것처럼 화사하고 선명한 5선의 등에서 흘러내린 고운 머리털은 금방이라도 물감을 찍어 파아란 하늘에 그림을 그릴 것만 같이 꼬리 놀림이 귀엽다.

  다람쥐들은 부산하게 들락거렸다. 아마도 겨우살이 준비에 바쁜 모양이다.

  나는 어댓 마리의 다람쥐들을 보니 친구가 익살스럽게 들려주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러면 혹 저 여러마리의 다람쥐들이 정녕 친구의 말대로 한 마리의 숫다람쥐가 거느린 암컷들일까?

  이기적이고 꾀가 많은 숫다람쥐란 놈은 먹이가 많은 여름이나 가을철에는 마누라를 많이 얻어들인다고 한다. 그래서 겨울 동안 먹을것을 많이 모아 들이고 겨울이 다가오면 그 동안 거느렸던 마누라들을 다 쫓아버리고 눈 먼 마누라 하나만을 데리고 산다고 한다.

  여러 마누라 덕에 먹이를 많이 둔 숫다람쥐는 맛있는 알밤 만을 골라 먹으면서 달콤한 맛에 취해 <달콩달콩>하면서도 눈 먼 암다람쥐에게는 못생긴 도토리 만을 조금씩 준단다.

  쌀쌀하고 떨떠름한 도토리만 받아 먹는 암다람쥐 입에서 <알콩달콩>하는 표현이 나올리가 없다. 그래서 암다람쥐는 떫은 도토리를 씹으면서 <씨쿵 씨쿵>한단다.

  그러면 <네로황제> 같은 숫다람쥐는 호령하기를,

  [여편네가 주는대로 고분고분 묵을 것이제, 씨쿵 씨쿵이 먼 말이여! 여편네 활수(滑手)허면 벌어들여도 시루에 물붓기여, 동한(冬寒)이 아즉 멀었는디 애껴 애껴 먹어야 혀]한다고 잠시 숫다람쥐가 되어 호령하던 친구의 익살이 생각나서 혼자 피식 웃었다.

  누가 귀엽고 유순한 동물에게 악담을 했어도 보통이 아니다. 그러나 다람쥐의 깊은 생태를 모르는 내가 왈가왈부할 것도 못되고 과연 어디에서 그런 우스운 이야기가 만들어졌는지 궁금할 뿐이다.

  더러의 사람들은 저 귀여운 다람쥐를 잡아다가 우리에 가둬놓고 둥그런 쳇바퀴를 넣어 돌리게 한다.

  그러고 그 하는 꼴을 보고 즐거워한다.

  쳇바퀴 속의 다람쥐는 아마도 전에 자유롭게 뛰어 놀던 고향산천을 향해 줄달음질을 치고 있으리라. 그러나 뛰어도 뛰어도 제자리인 것을 어이하랴.

  나는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를 보면 마치 어리석은 내 인생관을 보는 듯하여 싫다.

  그저 숲속의 다람쥐마냥 자유로이 산속을 넘나들고 싶다.

  불교에서 내세(來世)에 무(無)로 남는 것이 제일 좋다고 하나 업보(業報)가 많으면 무로 남기 어렵다하니 혹여 환생해야 할 것이라면 나는 정녕 저  귀여운 다람쥐가 되고 싶다. 숫다람쥐처럼 이기적인 다람쥐 말고 눈 멀고 약한 암다람쥐도 아닌 저 높은 나무를 뽀르르 오르 내리며 도토리숲에서 숨바꼭질하는 행복하고 귀여운 다람쥐가 되고 싶다.

  다람 다람 다람쥐/  알밤 줍는 다람쥐

  보름 보름 달밤에/ 알밤 줍는 다람쥐

  알밤인가 하고/ 조약돌도 줍고

  알밤인가 하고/ 솔방울도 줍고.

  나는 다람쥐가 들어간 돌새를 바라보다가 오렌지빛 석양을 안고 내려오며 동요를 흥얼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