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놀이-장기와 고스톱

희망씨앗

2007-09-20     관리자
저녁 6시경, 아내는 식사 준비가 다 되었음을 이렇게 알린다. “밥을 먹겠습니다.” 하고. 나는 그 시간에 보통 아래층 서재에서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티브이를 보거나 전화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면 아내의 호출을 듣지 못하거나 들었더라도 즉시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잠시 후 아내는, “밥을 먹겠습니다.” 하고 두 번째 호출을 한다. 들었으면 “네.” 하고 대답하지만 두 번째도 역시 듣지 못했거나 전화 중이면 대답을 하지 못할 수가 있다. 그러면 이번에는 집이 떠나갈 정도의 큰 소리로 아내가, “밥을 먹겠어요!” 하고 고함친다. 이쯤 되면 전화고 뭐고 다 팽개치고 당장 뛰어 올라가야 한다.

부엌에 있는 아내의 안색을 우선 살피고 난 다음에, 대답을 했는데 왜 듣지 못했느냐고 반박을 하거나 아니면 전화 중인데 어떻게 대답을 하느냐고 핀잔을 준다. 전화 중이었다고 하면 아내도 정상을 참작해서인지 아무 말하지 않지만, 대답했는데 왜 못 들었느냐고 내가 따지면 이제부터 싸움이 시작된다. “대답을 하려면 좀 크게 하지.”하고 아내가 대들면, “아 그만큼 크게 했으면 됐지 얼마나 더 크게 해?” 하고 내가 우선 방어를 한 다음에, “그만큼 큰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당신 보청기 필요한 거 아냐?” 하고 반격을 한다. 아내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보청기 필요한 사람은 내가 아니구 당신이유.” 한다. 그리하여 이제부터 싸움의 주제는 ‘보청기가 필요한 사람은 정말 누구이냐?’ 하는 문제로 변환한다.

둘다 조금씩 뾰루퉁해 가지고 식탁에 앉는다. 그러나 저녁 식사 시간은 도저히 소홀히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내는 저녁 식탁에서 모든 얘기를 하기를 원한다. 당장 얘기할 것이 있을 때는 물론 저녁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지만,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시시한 얘기들은 좀 모아두자는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할 얘기가 없어서 싸움한 사람들처럼 말 한마디 없이 밥만 후딱 먹어 치우는데, 그럴 게 아니라 그 날 일어난 일들을 모아두었다가 저녁 밥상에서 얘기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뾰루퉁해 갖고 처음 몇 숟갈을 떠먹은 후에는 자연스럽게 얘기가 나온다. 신문 기사, 저녁 뉴스, 연못의 금붕어, 시집간 딸, 아직 미혼인 아들, 친구, 친척, 동네 사람들 얘기를 하고 다음 주에 할 일과 내년 여행 계획도 한다. 정토회의 ‘빈 그릇 운동’에 참여하는 덕택에 우리 상에는 거의 빈 접시만 남고 나는 내 몫으로 남은 설거지를 즐겁게 한다.

설거지가 끝나면 나는 얼른 이를 닦는다. 입안이 개운해서 좋기도 하지만 후식(後食)을 먹자고 조르는 아내의 성화를 물리치기 위해서다. 아내는 달콤한 것을 좋아해서 아이스크림이나 케이크를 후식으로 권하는데 나는 일단 양치질만 하고 나면 아무 것도 먹지 않는 원칙이 있으므로, “나 이 닦았어.” 하는 점잖은(?) 말로 아내의 권고를 물리칠 수 있기 때문이다.

후식보다 더 달콤한 것은 아내와 두는 장기 한 판과 화투놀이 고스톱 세 판이다. 치매예방 조치로 우리가 선택한 놀이다. 처음 장기를 둘 때는 내가 ‘차’와 ‘포’를 떼고 두었는데 아내 실력이 어느 정도 향상되었다 싶어서 ‘차’ 하나만 떼고 두다가 이제는 대등하게 대우해준다. 집안에 단 둘이 있으니 훈수 두는 사람도 없고 서로 한 치의 양보도 봐주는 것도 없이 침묵 속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돈다. 어떤 때는 내가 방심했다가 역공을 당해서 정신이 번쩍 드는 때도 있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는데도 최후까지 최선을 다하는 아내의 버티기 정신을 나는 높이 산다.

그리고 장기 알을 주워 담으면서, 아까 그 한 수만 잘 두었으면 판도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 하고 아쉬워하는 대전(對戰) 태도를 귀엽게 본다. 학생이 일취월장(日就月將) 하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의 즐거움이다.

고스톱 화투놀이는 노름이라는 인상 때문에 썩 마음이 내키지 않은 채 시작했다. 고스톱을 잘 아는 사람에게서 규칙을 받아 적어 놓고 한 판 끝나서 점수를 셀 때는 그 교과서를 들여다보며 셈을 했는데 이제는 교과서 없이도 고도리, 싹쓸이, 폭탄, 흔들기 등등 달달 외우게 되었다. 돈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아니고 점수를 적어 두었다가 50불이 되면 나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록 50불을 번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점수를 적어둔 종이가 자꾸 어디로 도망가 버리기 때문이다. 아내는 나보고 어디다 두었냐고 하고 나는 아내보고 어디다 감췄냐고 하다가 매번 새 종이에 다시 적기 시작한다. 고스톱 화투놀이가 치매 예방이 된다는 말이 정말인지 의심이 든다.

세 판의 점수를 그 앞의 점수와 합하고 나서 아내는 경과를 보고한다. 그저께 현재로는 아내가 6불 20센트, 내가 15불이라고 한다(어제는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나갔기 때문에 장기와 고스톱은 휴일이었다). 주머니 돈이 쌈지 돈인데 그건 적어서 뭐하느냐고 하는 분이 있으면 그 분은 놀이의 재미를 모르는 분이다. 놀이에는 반드시 지고 이기는 편이 있어야 재미가 생기는 법이다. 그 증거로 아내는 화투를 걷어서 화투 갑에 넣으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아, 재밌었다. 여기가 바로 낙원이지. 그렇지?”

오명석 님은 한양 공대 자원공학과를 졸업(1964년), 6~7년간 직장생활을 했다.1972년 미국에 이주 메릴란드 주 실버 스프링에 살고 있으며, 워싱턴 한인 드라이크리닝 협회 초대 및 2대 회장 역임. 월간 「드라이크리너스 타임스」에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동했으며, 지금은 그 동안 해오던 드라이크리닝업을 쉬고 평생도반 윤시내 님과 함께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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