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의식이 그려낸 상상의 세계

특집 / 꿈

2007-09-20     관리자

옛부터 꿈을 희망에 비유해 왔다.
희망을 크게 가지라는 말 대신 "꿈을 크게 가지라." 했고, 분수에 맞지 않는 희망을 버리라는 말 대신 "허황된 꿈을 버리라."고 했다.
희망은 바람이며, 훗날 다가올 일을 상상하는 것이듯이, 꿈도 사실이 아닌 상상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옛부터 꿈은 자기의 마음가짐에서 비롯 된다고 봐왔음을 알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환경과 인연을 익히면서 언어를 배우고, 삶의 방법과 학문을 배워 지식으로 삼는 등, 살아오면서 느끼고 행했던 모든 업식(業識)들이 기억으로 잠재의식화하므로 개성을 간직한 하나의 인격은 형성되는 것이다.
그 잠재의식이 주체가 되어 찰나도 멈추지 않는 생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라는 실체는 잠재의식이 된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훈습(薰習)이라하여, 비단 현생뿐만 아니라 과거생의 모든 업식들이 잠재된 상태를 의미하며, 이 잠재의식이 주체가 되어 육신을 적재적소에 운전하고 다니며 생활하는 것이라 하였다.
만인의 과거가 다르므로 잠재의식이 다르고, 생활환경이 다르며 생각도 다르게 되어 있다. 애국심이 투철한 정치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 상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많을 것이요. 그 반대로 권모술수에 능한 기회주의자는 그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될 것이며, 운동선수, 바둑기사, 시인, 소설가, 성직자 등등 모든 인류는 환경과 인연에 따른 많은 생각들을 하며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꿈이라는 것은 이러한 잠재의식이 바탕이 되어 꾸어지는 것이다. 육신이 잠들면 모든 감각기관이 쉬게 되고, 감각기관이 쉬게 되면 의식기관이 쉬게 되는 것이며, 의식의 쉼은 무의식(無意識)상태가 된다. 이러한 무의식 속에서 생시와 같은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숙면(熟眠)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깊은 잠에 빠질 경우에는 꿈은 꿔지질 않는 법이며, 반드시 수잠 상태에서만이 꿈은 꾸어진다. 잠을 많이 잤거나 큰 근심이 있어서 잠이 잘 오지 않는 등, 약간의 수잠상태, 즉 약간의 의식이 깨어 있을 때 꾸게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다음의 경우들을 세심히 관찰해 보면 확인 할 수 있다.
첫째 꿈을 꾸고 나면 대개 꿈의 내용을 기억하게 되는데, 기억이라는 것은 의식이 깨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생시에 무엇을 생각하고 나면, 의식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기억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꿈을 꾸고 나서도 꿈의 내용을 기억하게 된다. 기억한다 함은 의식이 깨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생시와 같이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가 아닌 마치 최면술에 의하여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허구많은 망상들을 모두 잊고 꿈의 내용만을 느끼는 일념의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최면에 걸린다 함은 최면술자의 목적 하나에만 일념이 됨을 의미한다. 때문에 최면에 걸린 사람은 최면의 목적 외에 잡다한 생각들을 잃어버린 일념상태가 되는 것이며, 그 일념의 내용만을 생각하거나 상상하게 되어 있다.
일념으로 꿈에 현혹된 상태라 표현할 수도 있다. 때문에 꿈꾸는 당사자는 꿈을 꿈인 줄 모른 채 현실인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평소 무엇을 생각하고 상상하듯이 꿈이라는 일념에서 잠재의식이 그리는 상상의 세계가 꿈이며, 일념이 깨어 있었기에 그려 보았고 그 상상의 내용을 기억할 수 있었다는 결론이 된다. 의도적으로 원하는 꿈을 꾸는 경우도 있다. 어떤 꿈을 꾸고 싶을 때 사무치게 그 생각만 하면 목적하는 바의 꿈을 꿀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운 사람을 의도적으로 자꾸만 생각할 때 굼에 보는 경우가 있고, 사무치게 미워서 도저히 미운맘을 지울 수도 없이 자꾸만 미운 얼굴이 떠오를 때도 꿈에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기도 중에 어떤 환상을 보는 경우가 있다. 믿고 의지하는 믿음의 대상만을 일념으로 생각하며 기도에 열중할 때 그 상념에 따른 환상을 보는 것이다.
관세음보살 정근기도에 열중했던 불자는 관세음보살님의 자비의 미소를 띠우며 나타난 모습을 보았고, 어느 카톨릭 신자는 일념의 기도 속에서 성모마리아가 온화한 미소로 나타나서 기도하는 주위를 빙빙 도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몇 년 전 개신교회의 유명한 J목사는 MTV설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였다고 했으며, 그 체험하는 방법을 설교한 바 있다.
"여러분 한 시간 두 시간 기도하여서도 안 보입니다. 다섯 시간 이상 열심히 기도해 보세요. 여러분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헤엄을 칠 수 있습니다"라고 또한 몇 년 전에는 휴거설로 신도들을 현혹하여 집단자살을 꾀했던 사건이 있었다. 그 교주는 기도중에 이 지구의 마지막 날을 계시 받았던 것이다. 물론 그 휴거설은 금세기가 말세라는 말을 믿는 자기의 잠재의식이 그려낸 상의 계시요, 허상이었기에 계시했던 그 날짜에 지구 멸망은 오지 않았다. 위 네 가지의 경우 모두가 당사자들의 체험담이다.
나름대로 보았고 계시 받았으니, 자기 스스로 그런 환상인 줄을 모르고 사실임을 강하게 믿었던 것이다. 휴거설이 허상이었듯이 관세음, 마리아, 천국 등도 모두가 스스로 상상한 바 허상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의도적인 꿈과 같은 이치라는 사실이며, 신앙의 대상이 다른 각자가 기도의 일념에서 잠재의식이 그린 환상을 보았다는 사실이다.
만인의 잠재의식이 다르므로 상념이 다르고 꿈도 다른 것이다. 한방에서 잠자며 꿈을 꾸어도 각기 다른 꿈을 꾸게 되고, 이 사람은 저 사람의 꿈의 내용을 모르고, 저 사람은 이 사람의 꿈의 내용을 모른다. 꿈은 각자 잠재의식이 그려보는 허상(虛像)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이란 대책이 없는 상상의 세계다. 의식기관을 잃은 잠재의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꿈에는 꿈의 내용이나 진행에 끌려 가거나, 응하기만 하는 신세가 된다. 맹수에게 쫓기는 꿈을 꿀 때나 무서운 악당에게 쫓기는 꿈을 꾸게 될 때, 빨리 도망가고 싶어도 걸음은 도망가주질 않게 되며, 이런 경우 대개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 나기도 한다. 보고 느끼고 대처하는 육신의 감각기관이 쉬고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되지를 않는 것이다.
기분좋은 꿈을 꿀 때도 마찬가지다. 꿈 속에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뵙거나 대통령을 만나 귀한 선물을 받았거나, 큰스님을 뵙고 법문을 듣는 경우 등도 관찰하여 보면 의도대로 꾸어진 꿈은 아닌 것이다. 대개 근심걱정이 많을 때나 마음이 불안할 때 나쁜 꿈이 꾸어지고, 마음이 편안할 때 기분 좋은 꿈이 꾸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귀한 분을 만나면 길몽이라 하고, 탁한 홍수를 보면 근심이 생길 꿈이라고 해석하는 등 꿈을 다가올 일과 연관지어 해몽하기도 한다.
이러한 해몽의 방법이 적중할 때도 있다. 이러한 경우 예감이 맞았다는 결론이 된다. 생시에도 다가올 일을 희망하고 예상하면서 생활하게 되는데, 그 예상하는 바가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다. 그러므로 악몽이든 길몽이든 모든 꿈은 자기의 잠재의식이 그려낸 상상의 세계일 뿐이다.
대통령을 만나 선물을 받았거나 그리운 사람을 만났어도 꿈의 상대는 실지 응해준 바도 없으니, 혼자만의 상상으로 주고 받았을 뿐이다. 다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편안하고 좋은 생각에는 기분 좋은 꿈이 꾸어지고 성내고 근심걱정이 많을 때는 꿈자리가 어지럽다는 사실이다.
정신세계 역시 유유상종(類類相從)의 이치가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들끼리의 만남도 같은 사상을 지닌 사람끼리 만나지고 친해지듯이, 정신세계도 좋은 생각에는 좋은 일을 만나게 되고, 나쁜 생각은 나쁜 일을 만나게 된다는 철학이 있다.
때문에 기도하는 마음은 혜복(惠福)의 길잡이가 되어 주는 것이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이석우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