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불교, 나의 인생

나의 믿음 나의 다짐

2007-09-20     관리자

절에는 어머니 따라 1년에 한두 번 정도 갔으며, 소픙 때나 수학여행 때 관광차 갔을 뿐이다. 어렸을 때 절에 가면 스님도 무서웠고 절의 색깔도 무섭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절에 가도 구경만 했지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아 뜻도 모르고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몰랐다. 그냥 왔으니까 보는 것뿐이었다.
이러한 내게 이상한 일이 있었으니,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그 흔한 교회를 한 번도 안 들어 가봤다는 것이다. 침으로 신기한 일이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공주에서 10년 동안 교직생활을 아무 생각 없이 하다가 은석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불교와 인연이 있었으나 그때도 바쁘다는 핑계로 학교에 행사가 있을 때만 참여하고 불심이 없었다.
`79년도 여름 방학 때 서울에 있는 초중고 교사 열 명이 국가 대표로 걸스카우트 국제 캠프에 참가하게 되었다. 45일 동안 유럽에서 훈련도 받고 여행도 하느라고 매우 피곤한 상태에서 귀국하여 쉬지도 못한 채 근무하다가 병이 나고 말았다.
급성간염으로 병원에 입원을 해서 치료를 받는데 발병한 지 두달이 되어도 효과가 보이지 않아 퇴원하여 한약도 먹고 애를 써봐도 효험이 없었다. 다시 서울대학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아도 차도가 없는 터라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매달려 보기로 하고 어머니와 같이 매일 새벽마다 도선사에 나갔다.
그러나 기도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모르는 형편이라 답답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조계사에 있는 포교원에서 재가불자교육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아픈 중에도 법회에 나가서 법문도 듣게 되었는데 그때 법문은 모두가 나를 위한 법문이었고 비로소 그 동안의 내 삶을 뒤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새 인생의 문이 열린 것이다. 그때 포교원에서는 우리 나라에서 제일 처음으로 중앙법회를 만들었으며, 무진장 스님, 암도 스님, 성열 스님 등 여러 스님들께서 정말로 열성적으로 지도해 주셨다. 나는 그때 무진장 스님에게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그대로 도선사에 가서 기도하고 집에서도 끊임없이 `관세음보살' 주력을 하였으며, 그 결과로 병이 호전되어 2학기부터는 학교에 나가게 되었다.
무진장 스님은 나에게 새 삶을 주신 은인이다. 그때 기도하면서 부처님의 가피를 말하면 기가 막힌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간증한다고 하는데 우리 불교는 더 높은 은혜를 받는데도 말하지 않을 뿐이다. 하루가 다르게 병이 좋아지니까 의사들도 깜짝 놀라면서 통원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학교 휴직을 1년 하기로 했는데 2학기부터 출근을 하니까 정말로 부처님이 아니시면 또 기도의 힘이 없었으면 이런 기적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너무나 부처님께 감사하여 내가 보답하는 길이 무엇인가 생각을 했다. 그때 중앙법회는 직장인을 위해 저녁법회를 해서 나는 퇴근하고 조계사로 가는 게 일과가 되었다.
중앙법회에서 시작된 불심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쉬는 시간마다 신도들에게 찬불가를 가르치겠다고 스님께 말씀드리니까 정말 좋은 일이라고 찬성하셔서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지도를 했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기도의 가피를 받은 것은 나의 결혼이었다.
몸이 좋아지면서 부처님께 발원을 했다. 올도 미스가 결혼을 하고 싶어 부처님께 발원을 하고 100일기도를 도선사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100일기도 회향 3일 전에 혼담이 들어와 맞선을 보았는데 그 분과 절에서 결혼을 해서 미스가 미세스가 된 것이다.
부처님의 가피는 지면상 생략하며, 부처님께 기도하면 꼭 성취된다는 것은 알게 되었고 무슨 일이건 잘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다. 부처님은 나의 든든한 빽이고, 부처님은 나의 보호자다. 내가 기도하면 아니 되는 것이 없고 사는데 걱정과 근심이 없어 항상 신바람이 난다.
나는 또 부처님께 감사드린다. 왜냐하면 내가 30년 동안 근속한 은석초등학교는 불교종립학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학교는 불교학교이면서도 불교적인 분위기가 안 났다. 그래서 그때 교장선생님께 건의를 했다. 교실 하나만 주시면 법당을 만들고 어린이법회와 어머님법회를 해 보겠다고 하니까 쾌히 승낙하셔서 `81년에 광덕 스님을 모시고 연화회를 창립해서 지금까지 왕성하게 발전하고 있다.
나는 법회를 주관하면서 연화합창단을 만들어 세종문화회관 대강단과 장충체육관에서 `부처님 오신날'을 축하하는 합창제에 동참도 했다. 어린이를 지도하다 보니까 어린이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고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 찬불가가 필요해서 노래를 만들었는데 정운문 스님이 가사를 주시면 내가 작곡을 했다.
지금도 전국의 각 절에서 내 노래가 불려지고 있음에 나는 항상 기쁘고 가사한 마음 금할 수 없다. 지금 우리 학교는 비구니 스님이 연화어린이법회를 지도하시고 교사들은 관리만 한다. 나이를 먹은 나는 조용히 학급에서 어린이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또 실천하는 어린이가 되도록 신행생활을 지도하고 있다.
교사생활 40년을 마감하면서 나의 불교를 되돌아보면 잘한 것도 있지만 부족한 부분은 반성도 해본다. 절 불사보다 인간교육을 불사에 힘을 쏟으며 분주하게 살아왔던 삶이었다. 한편 항상 어리게만 느껴졌던 막냇동생의 출가는 나의 불심을 더욱 돈독케 했다.
막냇동생 스님이 지금도 열심히 동안거 참선공부를 하신다. 그 절에서 비구니 스님 60명이 공부를 하신다고 해서 해제하기 며칠 전에 대중공양을 하고 왔다. 경상북도 깊은 산 속의 절이다. 가기 전에 눈이 엄청 많이 왔는데 가는 날은 날씨가 너무 좋았다. 눈이 쌓인 산이며 절의 경치는 한 폭의 동양화이었다.
동생 스님을 보기 위해서 여럿이 갔는데 불심이 약한 남동생들은 그곳에서 느낌이 많았고 불교공부에 관심이 많아진 것을 보고 보람을 느꼈다. 우리 형제들은 따뜻한 요사채에서 긴 밤을 꼴딱 세우면서 인생살이를 이야기했다.
서울에 오니까 또 눈이 펑펑 쏟아진다. 부처님 가피로 무사히 다녀온 것에 감사를 드리며…. 몸이 아팠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부처님.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몸이 아픈 것도 부처님께서 나를 깨우치기 위한 방편이리라.
병 때문에 얻은 불교와의 인연으로 나는 늙어가면서 더욱 편안하고 행복해진다. 어쩌면 그 동안 너무나 많이 받아 왔던 나의 삶, 이제는 회향하는 마음으로 살기로 했다. 불교는 멋있고 위대한 종교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류기송(柳基松)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