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에 사는 친구에게 보낸 새해 편지

이남덕 칼럼

2007-09-19     관리자

새해가 되면 멀리 있는 친구들이 생각이 난다. 거리가 멀고, 또 그때마다 마음을 전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보통 때는 소식을 못 전했다가 한 해가 바뀐다는 세모가 되면 마치 아득한 그리움처럼 옛 친구들 생각이 밀려 온다.
박화자 씨는 나의 친구라기보다 나보다 10년 연하의 후배라고 해야 맞겠다. 그는 불란서 문학을 전공했고 불문과 전임 강사로 나와 같은 학교(梨大)에 잠깐 재직한 일이 있었으나 금방 그녀는 파리 유학을 떠났고, 공부를 마친 후에는 스웨덴에 가서 스톡홀름 대학 동양어학과의 교수로 재직하다가 `96년 가을부터 정년 퇴직을 한 분이다.
그와 나의 관계는 우리 당대에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 선대부터 세교(世交)가 있는 사이다. 6·25전쟁이 터졌을 때는 꼼짝없이 서울 근교에서 난리를 당하고, 1·4후퇴 때는 우리 가족이 부산에 피난을 갔다. 남편이 의지하고 찾아간 곳이 화자 씨 선친이신 박선생님 댁이었다. 그분은 금융조합 경남지부장으로 계셨는데 바로 이웃 관사에 사시는 양곡 과장님댁 방 한 칸을 얻어주셔서 피난살이 몸을 의탁할 수 있었다.
박선생님댁 사모님은 아주 자상하셔서 우리 아이들을 친할머니 사랑으로 보살펴 주셨고, 나는 부족한 것 투성이의 피난살림을 꾸려나갈 때 친정 어머니처럼 의지했었다.
내가 말한 `아득한 그리움'이란 표현은 화자 씨가 살고 있는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자리잡은 스웨덴이란 나라가 아득히 멀리 있다는 것과 함께, 두 집안 어른들이 맺어온 세교의 오랜 정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산 피난 때 화자 씨는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으로 봄에 서울대학교에 진학했고, 나는 그해 가을에 부산 초량동에서 동대신동으로 이사를 나와 얼마 안 되어서 남편을 잃었다. 우리가 의지했던 박선생님 내외분도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었으니 우리는 오랜 세월을 두고 아픔을 나눈 사이인 것이다.
내가 또 한 번 그녀를 의지한 것은 1973년 스톡홀름 대학 초빙교수로 스웨덴에 갔을 때 우프살라에 있는 그의 집에 한 학기 동안 머물렀으니, 초빙교수 그 자체가 그녀가 재직하던 동양어학과였다.
강의가 있는 날은, 아침에 우프살라역에서 기차를 타고 스톡홀름 대학까지 통근을 한다. 강의가 없는 날은 우프살라 대학 도서관이나 동양학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서양에 있으면서도 동양 고서에 둘러쌓여 있고, 거기서 만나는 친구라야 겉모양만 서양인이지 속은 똑같은 동양학 전공자들이니 낯설 수가 없다. 이것이 모두 화자 씨와의 인연에서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
내가 스웨덴에 머물렀던 기간은 반년 동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같은 지구에 살면서도 이제까지 몰랐던 일, 첫째는 이렇게도 경이로운 대자연을 만날 수 있었던 행운에 대해서 감사했고, 둘째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사회보장제도'라는 것이 어떻게 실지로 이루어지는가를 그 일단이나마 직접 볼 수 있었던 기회를 얻었던 일이다.
스웨덴은 세계 제일의 사회보장제도를 실시하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내가 스톡홀름 대학에 강의 나갔던 어느 날, 캠퍼스에서 미국에서 왔다는 여학생과 만난 일이 있다. 그즈음 스웨덴 정부는 미국의 월남전 개입을 맹렬히 반대하여 국교단절을 했던가 했고, 반전(反戰)계열의 미국청년들의 일부는 이런 중립국가에서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그녀의 말이 "미국은 사람들(국민들)을 경마장의 말처럼 경쟁시키는 데만 열중하고 있는 데 반해서, 스웨덴은 부모가 자식사랑하는 마음으로 국민을 보살피고 있는 것을 느낀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그 울적한 마음을 토로하는 것을 보고 나는 내심 매우 놀랐었다.
그때로부터 2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나는 `86년에 그리고 화자 씨는 '96년에 둘이 다 정년퇴직을 했으니 나는 같은 민주주의 국가라도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그리고 화자 씨는 사회보장제도하에서 노경을 맞이한 것이다. 지난 해 그녀가 내게 보내온 편지를 보면 그녀가 나머지 여생을 한국에서 보낼 수 있을까 하는 한가닥 마음이 있어서 고국방문도 하고 내게도 그 뜻을 전한 것인데, 그가 아직까지 해답을 내리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장담을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어떤 생물이든지 종당에 찾아갈 곳은 자기 고향이라 한다. 어려서 놀던 정든 고향. 아직도 육친이나 일가친척, 친지들이 살아 있는 고향이 노경에 그리워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특히 정체제도, 사회제도의 차이는 그 제도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심신이 약해지는 노후생활에서 지금까지 익숙하게 지내온 환경을 간단히 바꾼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번 새해 연하장 속에 나는 그의 노후생활에 대한 나의 의견을 써보냈다. 마침 IMF한파가 몰아닥친 때라, 두 사회의 대조적인 면을 실감했기 때문에 우리들 개인적인 차원에서뿐 아니라,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면 물질지상주의의 노예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염원이 간절했지만 표현은 되지 못했다.
"요즘 여기는 `나라가 부도(不渡)가 났다'고 할 지경으로 경제계가 흔들리고 있어요. 이런 가운데 사람들의 삶 자체가 우비고뇌(憂悲苦惱)에 허덕이는데 노인들이 자손들에게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어요.
젊은이들을 보면 부러운 게 아니라 안쓰럽고 불쌍해요. 어려서는 일류학교에 들어가려고 과외공부에 시달리고, 명문대학에 들어가려고 젊은 날도 발버둥치고, 또 좋은 회사에 취직하려고 혈안이 되고….그리고는 지금 세상 돌아가는 데 따라서 조기퇴직, 감원선풍, 실직의 위기에 섰고.
무한경쟁시대라고 하더니 이게 돈놀음으로 시종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인가 싶어 한숨이 나와요. 요즘은 라디오도 신문도 증권값이 바닥으로 하락했다, 외환 환율이 천장으로 올랐다고 하는 그 소리뿐이에요. 수입은 줄어들고 물가는 뛰어오른다니 도시로만 모여든 이 인종들이 어떻게 살지요? 나는 자본주의 경제가 어떻게 짜여 있는지 잘 모르고 살아왔지만 뭔가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건물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 같은 환상을 느껴요. 거기다 대면 당신이 속해 있는 사회보장제도의 나라는 사치와 낭비, 흥청거리는 기분 같은 것은 없어도 안심하고 건실한 생활을 해나가는 것 같았어요. 내가 거기 있을 때 보면 TV방송도 국영방송 하나뿐이고 그것도 심야방송 같은 것은 없었어요. 어디를 봐도 건강하고 건실한 삶의 모습이었어요. 그래도 범죄자도 있고 특히 음울한 계절에는 자살율이 높다는 말을 들었을 땐 인간존재의 복잡성을 생각했지만 그것이 사회보장제도의 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어요.
감옥소에 흰 깃대가 올려져 있는 것은 그 날 재소자가 한 명도 없다는 신호라고 들었을 땐 참 놀랐어요. 어둡고 긴 계절 속에 사는 그 고장 사람들이 알콜중독으로 범죄도 저지르고, 그러면 그들은 감옥이 아니라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하더군요.
참 병원 얘기 말인데 여기서는 의사들이 수입이 좋은 직업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곳 의사들은 사회봉사자로 일하더군요. 그래서 거기서도 수입이 가장 높을 수 있는 치과의사들이 거시 제도에 불만을 품고 스위스 같은 나라도 빠져 나간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당신이 정년퇴직 후 연금이 월급으로 지급되고 그 전과 별다른 생활이 아닌 안정된 은퇴생활을 하고 있다니 얼마나 안심인지요. 60년대에 스톡홀름 대학에 가셨으니 30년 이상 근속했지 않아요? 그러면 거기가 고국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대학에 나가서 가끔 강의도 계속하신다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그리고 당신의 연구분야에서 아직도 놀라움과 재미를 느낀다니 더 바랄 것이 뭐예요? 흔히 정상적으로는 노후를 외국에서 보내는 데 대해 너무 외롭지나 않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노후의 외로움이란 흔히 인간관계에서의 소외가 큰 원인인 줄 압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나 자신의 마음의 문제가 더 큽니다.
당신이 지금 즐기시고 있는 그룹활동 같은 것도 적극적으로 잘 이용하시면 마음이 늘 활달해지고 기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당신의 노후생활이 참 멋지다고 생각해요. 누구의 구애도 받지 않고 누구의 신세도 안 지고 그 가운데서 당신의 마음만 평안하면 그게 극락이고 천당이예요."

☞ 본 기사는 월간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불자님의 보시행으로 입력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