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문화설계Ⅰ

21세기 생활과학

2007-09-19     관리자


흔히 21세기는 '동양의 시대' 혹은 '태평양의 시대' 가 될 것이라고들 하는데, 이러한 전망은 먼저 서구 지성인들로부터 나왔다. 1947년 토인비는 21세기는 태평양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진단을 했고, 1970년에 러셀은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죽기 전에 예언 같은 유언을 남겼다. 또한 1972년 발간된 로마클럽 보고서「성장의 한계」에서는 서구문명의 병폐를 진단하면서 그 처방을 내놓은 바가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 내용들이 동양철학의 주요개념들과 일치하여 서구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동양사상에 있음을 확인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서구 지성들의 전망에 힘입어 동양에서도 반향이 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70년대 초) 주로 동양의 철학사상과 전통문화 속에서 교훈을 발굴하여 물질에 대한 과도한 추구를 자제하고 동양적 생존방식으로 회귀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이것은 경제성장을 지상목표로 삼던 당시의 현실정책과 사회분위기에 눌려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근래에(80년대 이후) 들어오면서 서구에서 문명의 위기를 의식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경제성장을 자제하고 있는 사이에 아무런 반성없이 맹목적인 경제성장만을 추구하여 양적인 팽창만을 이룩한 이른바 동양의 네 마리 용들이 자만에 빠져 21세기의 주무대는 '동양' 혹은 '태평양'이 될 것이라고 다시 선전구호처럼 외쳐대고 있다.

21세기는 동양의 시대가 될 수 있을까
서구 지성인들의 자기 문화에 대한 성찰은 진지하고 끈질긴 것이었다. 니체는 20세기에 접어들기도 전에 서구문명의 위기를 예언했고,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스펭글러나 토인비, 소로킨 등의 문명비판가들이 나와 서구문명의 몰락을 계속 경고해왔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러한 예언과 경고는 적중되었다.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사람들은 문명의 위기를 직접 체험하게 되었으니 자원의 고갈이나 생존환경의 파괴, 인성의 타락 등등이 그런 예이다.
20세기는 분명 서구문명이 동양을 정복하고 세계를 지배한 시대이다. 그런데 그 문명이 세계인류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면 다가오는 21세기의 문명을 그것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우선 급한 대로 다음의 두 가지 방안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첫번째는 인류가 20세기에 타고온 문명의 열차를 그대로 타고 21세기의 경계를 들어가되 그 진로를 바꾸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예 열차 자체를 바꾸어 타고 21세기의 경계를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하나의 어려운 문제가 남아있다. 우선 첫 번째의 경우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상당히 가능성이 있는 방안이긴 하지만 21세기로 들어서면서 수정해야 할 문명노선이 어떤 내용의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검토가 미리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의 경우는 첫 번째보다 상당히 이상적인 방안인 듯 보인다. 하지만 이것도 실제로는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가지고 있는 결정적인 문제점은 그 새로운 열차란 것이 21세기 문턱인 현시점까지도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얼른 생각해 보기에 그 다른 열차란 곧 동양문화를 가리키는 것 같은데 이것은 현재로서는 준비조차 되어있지 못한 상태가 아닌가?

21세기는 동양의 시대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
그러므로 '21세기는 동양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동양이 서구문명의 노선을 바꾸는 데 응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불과할 따름이다. 따라서 그것은 말 그대로 동양이 21세기를 지배한다는 뜻은 결코 아닐 것이다.
21세기는 동양의 시대, 태평양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말을 문화적 혹은 지역적인 대립관념으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더욱이 동양사상은 동양사람의 것, 그래서 동양사람만이 동양사상을 가지고 21세기를 주도해야 한다는 고집과 편견을 가져서는 더더욱 안 될 것이다. 그런 태도는 오히려 서구의 이분법적인 논리로 동양의 일원성(一圓性)을 깨뜨리는 형태일 뿐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경제발전에 성공했다는 동양의 네 마리 용의 성공원인을 동양사상에서 찾고들 있는데 이것은 사실 근본적으로 틀린 생각이다. 한마디로 잘라말해서 정말로 동양사사에 바탕을 두고 경제를 추구했다면 그렇게 성장할 수도 없거니와 또 자연의 파괴와 인성의 타락을 외면한 채 일방적인 양적 팽창에만 매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동양은 먼저 서구문명의 위기를 의식하고 그 위기에 말려들어가지 말았어야 하며, 좀 가난하더라도 자연의 한계 내에서 삶에 자족했어야 한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선 무엇이 동양적이고 비동양적인지를 분명히 가리는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동양의 철학사상도 서양의 그것과 함께 물질문명이 초래한 위기에 대해 공동책임을 져야 하고, 따라서 21세기를 대비한 문화설계 및 그 추진에도 능동적으로 참여할 자격을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는 동양의 시대' 라는 전망은 환상이거나 정치적 경제적 현장에서 활동하는 현실경영자들의 선전구호에 지나지 않은 일종의 허구일 수밖에 없다. 현 시점에서 볼 때 21세기도 별수없이 서구인들에 의해 상당부분이 주도될 것이라는 전망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21세기는 20세기와는 달리 동양적 문화유형에 의해 주도될 것이라는 기대는 희망적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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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렬 님은 고려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로 이 글은 지난 '94년 고려대에서 열린 한국철학회에서 발표되었던 글을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 2회분으로 발췌하여 게재하게 되었습니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이석우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