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년 구상

빛의 샘 / 새해의 소망

2007-09-19     관리자

‘옷깃만 스쳐도 인연’ 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만남이 사실은 이처럼 ‘옷깃 스치는’ 사소한일에서 비롯된다. 다만 그 사소함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진다. 아니 그 결과마저도 이미 예정돼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복사꽃 하나가 지는 데도 그 필연적인 이유가 있고, 애기똥풀 꽃잎 위에 내리는 빗방울 하나에도 실로 머나먼 여정과 내력이 스며 있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할진대 사람 사이의 인연, 적어도 56억분의 1의 확률을 가진 만남이란 얼마나 끔찍할 정도로 값진 것인가.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는 또 얼마나 만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살아왔던가. 벌써 오래 전에 어느 골목에선가 몇 번이나 스쳐 지난 적이 있었겠지만, 마치 전생의 악연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비껴지나고 지나면서 .
신년의 구상 또한 내게는 인연과 마찬가지다. 돌아보면 꼭 무엇을 성취해야겠다는 구체적인 신년계획을 한 번도 세워본 적이 없으니 . 게으름 탓인가. 아니면 수동적인 삶의 태도 탓인가.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는 않다. 어찌 마음 속의 각오야 없었겠는가. 여러가지 마음 속으로 다짐하며, 반성하며 나의 삶을 미리 빚어보는 날들이 수없이 이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다만 신년을 맞으며, 또는 21세기를 기다리며 하는 등등의 양적 시간의 흐름을 단절해 놓고 구상을 하거나 그 시간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다.
물론 인생이란 게 양적 시간에 의해 늙고 병들고 죽어가면서 깨닫는 부분도 많겠지만, 실로 중요한 것은 질적인 시간이 아닌가. 하루를 잘 산 사람이 한 평생을 잘못 산 사람보다 훨씬 나은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나날이 최선을 다하고자 마음 먹을 뿐이다. 마치 내일은 없다는 듯 종말론자처럼 살아간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한다.
그날 그날 만나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시를 쓰고, 하물며 좋은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더라도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내게도 신년구상이 하나 있기는 하다. 내년 4월 말쯤. 여러 가지 충족되어야 할 조건이 있기는 하지만 서울을 떠나고 싶다. 화이트칼라를 벗어나 블루칼라로 돌아가는 것이다. 병든 내 마음을 치유하고 약골이 될 내 몸을 위해서다.
내가 아는 한 분의 큰 목수를 따라 나서 절간을 지으러 가고 싶은 것이다. 물론 가서 배울 것도 많고 무척 고단하기도 할 것이다. 최소한 3년 정도라도 나무를 만지며 혹독한 육체 단련을 해볼 생각이다. 무슨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단지 좀더 확실하게 피곤해지고, 이따금 인부들과 어울려 맛깔 나는 술을 마셔보고 싶은 것이다. 낭만적인 현실도피가 아니라 다시 한번 코피를 쏟아보고 싶은 것이다.
내 몸과 마음의 이물질을 제거하며 지난 삶을 이어가다가, 그러다가 가능하다면 좋은 시 한 편이라도 써보고 싶은 것이다. 더 무슨 큰 욕심이 있겠는가. 예전에 채탄막장 생활을 하던 때를 떠올리며 그때가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서울에 온 지 8년 만에 깨닫게 됐다. 다만 문득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떠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일견 무책임한 것도 같지만 그보다 더 정당한 이유가 그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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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 님은 ’62년 경북 문경 생으로 계명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하였으며 현재 시사월간 「WIN」기자로 일하고 있다. 시집 「빨치산 편지」「지푸라기로 다가와 어느덧 섬이된 그대에게」등이 있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이석우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