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멋대로의 신앙표현

번뇌에서 건지는 깨달음 12

2007-09-19     관리자

주가가 급격히 하락하고, 환율은 급등한다. 이제는 1천원이 1달러로 쓰여 진다. 정치도 어지럽다. 어떻게 갈라질것인지 알 수 없다. 이런 판국에 '비자금', '경선자금',딴살림지원자금'등의 용어들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경제가 더욱 나빠질까 걱정하고, 정치에 대해서 회의감을 갖느다. 이런 때에 국민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이는 스포츠 스타들이다. 박찬호, 선동열, 차범근이 대통령, 국무총리 경제관련 장관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특히 차범근 감독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다.우리 나라로 하여금 월드컵 본선에 출전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내년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하고 2002년에 월드컵 공동 주최국으로서 자동 출전하면 연속 5회 월드컵 출전국이 된다고 한다. 차감독이 이런 공로를 세웠으니 어느 국민인들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불교인들 가운데는 경기 중 차감독의 몸짓이나 승리후의 인터뷰를 보면서 당황하거나 속상해 하는 이들이 많다. 차감독은 경기 중에 기독교식의 포즈를 취하는가 하면, 경기가 끝나고 인터뷰할 때는 '주님께 감사한다'거나 '하나님의 은총으로'라는 말부터 입을 연다. 경기 승리의 공로는 자기 종교 교조의 보살핌에 있고,그 다음으로 선수나 국민들의 성원에 있다는 말로 들린다.
축구 선진국인 남미나 유럽이 천주교나 개신교 국가들이지만, 그 나라의 감독들은 차감독처럼 행동하지 않고도 월드컵 본선에서 우승한다. 또 골을 많이 넣은 선수들 가운데는 불교인들도 많다. 선수들의 역할이나 국민들의 성원은 수시하고 승리의 공덕을 자기 종교의 교조에게 가장 먼저 돌리는 차감독을 어떻게 대하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들은 지금 차감독에게 완전히 빠져 있다. 차감독의 행동을 문제삼는다면 국민들로부터 집단 돌팔매를 맞을지도 모른다. 불교인들은 속이 안좋더라도 참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런 판에 김용옥 교수의 글이 한 일간지에 실렸다. 김교수는 차감독이 어느 교회의 사설 축구단 감독이 아니라, 이 나라 대표팀의 감독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기도하고 자기 종교 교조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런 일은 자기 방에서 해도 되지 않느냐고 충고했다. 그 글이 실린 날이 마침 불국사 월산 조실스님의 49재여서 많은 스님들고 신도들이 모였다. 사람들이 그글을 보고 '정말 속시원하게 말 잘했다'고 좋아하면서, 그것을 카피해 가져가는 이들이 많았다.
나는 그전까지 축구, 승리, 또는 차감독의 이례적인 신앙 행태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불국사에 모인 불자들의 김교수 글에 대한 반응을 보고 나서는 나에게도 고민이 생겼다. 어떻게 차감독의 행태를 소화해 내야 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그 다음 날 같은 일간지의 같은 난에 차감독의 답론이 실렸다. 자기는 어느 종교를 특별히 드러내기 위해서 대중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거나 '하나님'이나 '주님'을 들먹이느 것이 아니라, 90분이라는 시합기간을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알콜중독자가 되기보다는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덧붙여 기독교인들의 반응도 소개 했다. 텔레비전 기자와 인터뷰할 때, '주님께 감사 한다'는 말이 방영되지 않으면, 기독교인들은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서, 방송국이 의도적으로 말머리를 잘랐다고 항의하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는 다른 기독교인들처럼 종교간의 편가르기에 앞장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런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신앙을 표현할 뿐이라고 했다.
컴퓨터의 PC통신에서는 차감독의 신앙행태에 대한 찬반론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교수와 차감독의 글을 실은 신문의 '옴부즈맨 칼럼'은 신문사를 나무라고, 개인적인 신앙을 공론화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조를 펴면서, 공인이라도 개인적인 신앙을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기는 개인적으로 무종교인이지만 차감독의 신앙행태가 좋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또 이 문제는 대통령에게까지 이어졌다. 김대통령은 개신교 지도자들과의 오찬에서 "차범근 감독의 신앙 표현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이며, 그의 깊은 신앙에 감동받았다."고 말했다.

다른 인연도 살펴야
나는 '신앙 표현이 개인의 자유'라는 주장을 탓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우리 나라의 대표팀이 승리했을 때, 그 팀의 감독이 어떤 지연, 학연, 인맥, 종교를 들먹이면서 그 연고 때문에 승리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그 감독과 같은 인연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이 좋겠는가. 특정 종교의 특별한 신앙표현 때문에 마음이 걸리는 사람이 있다면, 구태여 그러한 신앙 표현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차감독의 말대로, 인터뷰 앞머리에 '주님'이나 '하나님'이 나오지 않으면 방송국에 항의하는 기독교인이 있다는 것은, 그가 공인의 직위에서 특정종교에 편향된 몸짓을 하고 있다는 증명이 되지 않는가. 이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 가운데, 사지에서 살아난 이후에, 항상 '하나님'을 들먹이던 정치인이 있었다. 당시에는 너무도 그의 처지가 어려웠기 때문에, 불교인들은 그의 신앙표현을 탓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한 정당의 대표로 자리 잡게 되었을 때 불교인들은 그에게 충고 했고 그는 받아들였다. 대중 앞에서의 그의 신앙표현이 없어졌다고 해서, 그의 신앙심이 약해졌거나, 그가 하는 일이 잘못되지 않았다.
차감독은 국가대표 축구 선수신절부터 한 골이라도 넣으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곤 했다. 다른 분야의 스포츠 선수들도 승리했을 때 자기 신앙을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보고 잘못되었도고 생각하는 불교인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차감독은 이제 나이 어린 선수가 아니다. 한 나라의 대표팀 감독이다. 국민 가운데 자기 종교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 많다는 점과 자기의 신앙표현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는 것을 살펴야 하지 않을까.

안으로 소화해야
우리는 이제까지 남의 다리를 긁었다. 수행자는 모든 문제를 내적으로 소화해야 한다. 나는 한 개그맨을 좋아했었다. 그는 못 생겼지만 개성있는 얼굴로 두드러졌고, 드의 아내는 무척이나 예쁘다. 어느 날 그는 아내를 무대에 세웠다. 헌데 그 미녀가 사람을 웃긴다고 하는 소리가운데 교회 내에서의 일을 자세히 들먹이지 않는가. 마치 시청자가 모두 기독교인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속이 상했다. 바로 방송국에 항의하는 전화를 걸고는 다시는 그 못생긴 개그맨의 프로를 보지 않는다. 이제는 그의 말이 전혀 우습지 않기 때문이다.
자, 나는 한 사람을 잃었다. 그 개그맨은 계속 텔레비전에 등장할 것이다. 나는 보지 않겠지만 비뚤어진 나 자신을 보고 비참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보면 나는 피해망상증에 걸릴 지도 모른다.
이사람은 이것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저 사람은 저것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싫어 한다면 어찌 되나. 나는 혼자가 될 것이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마음 내되 마음 없어야
내편, 내 종교편, 내 마음편을 가르고 승리를 노래하는 것이 활력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집착하면 안 된다. 진리의 세계에는 이긴 자도 진 자도 없다. 참으로 이긴 자는 생사를 벗어난 이요, 그렇지 못하면 모두 패배자이다. 세상 경우의 옳고 그름을 따져 보기는 할지언정 미워하는 마음을 가져서는안 된다. 경쟁심을 내되 거기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생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