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버려라

특집/ 욕심

2007-09-19     관리자

경전 말씀에 보면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얻고자 하는 이익이 많기 때문에 그에 수반되는 고통과 괴로움이 많은 것이나, 욕심이 적은 사람들은 얻고자 하는 욕망이 적기 때문에 그만큼 근심과 우환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욕심을 적게 가지고 있어도 큰 공덕이 깃드는데 거기다가 수행까지 한다면 어찌 다른 공덕에 비할 것인가 하셨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세상을 살아가는데 욕심없이 살 수는 없을 없을것입니다. 그러나 그 욕심을 어떻게 덜고 다스릴 것인가. 우리 부처님께서는이것에서 더나아가 무주상보시를 가르치셨습니다. 원래 나, 내 것이란 없는 것이니 바라는 바 없이 보시하라는 것입니다.

끝없는 윤회 속에서 나고 죽는 고통을 반복하고 있는 중생들의 참된 존재가치는 무엇인가? 수많은 인연으로 태어나 수많은 인연 속에 주어진 생애의 삶을 영위해 가면서 갖가지 애환을 연출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을 놓고 볼 때 때로는 이것이 아닌데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 하는생각들이 불쑥 일어날 때가 있다.
세상이 온통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너도 나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작금의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사정들이 웬지 불안해 보인다. 대선 정국에 접어든 정치계가 그렇고 무너지는 주가 속에 아우성 치고 있는 경제 현실이 정말 마음을 답답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무언가 돌파구를 찾아내 내마음을 안정시키고 모든 사람이 함께 한숨을 돌릴 수 있는 휴식의 공간을 갖고 싶다.
특히 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부처님 교법으로 사회 현실을 올바르게 관찰, 당면의 문제들에 대한 분석과 해결책에 대한 방편의 모색을 제시해 주는 것이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요, 교화행이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분석해 보면 혼란을 야기하고 어떤 충격을 주고 불안을 증폭 시키고 있는 요인들이 대개가 불교의 근본 교리에서 누누이 언급하는 욕망의 문제 때문이다. 중생이 사는 세상에 어떻게 욕망이 없을 수 있겠는가마는 이 욕망의 정체에 대해선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어쩌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한 계기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과도한 욕망이 난무하는 세상. 욕망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는 말도 있지만 욕심 많은 세상이어서 그런지 욕심 때문에 오히려 살아야 할 사람이 죽고 욕심 때문에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자행되고 있는 것 같다. 역설적으로 말해 조금만 욕심을 줄이면 행복할 사람이 욕심이 과다하여 불행해지고, 한 생각 욕심이 일어나기 전에 편안했던 사람이 한 생각 욕심을 일으킨 후에 너무나 괴로워져 버린다. 일찍이 달마 스님은 '구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가 괴롭다'는 말을 하였다. 그런데도 왜 욕심만 키우려 하고 있는가?
불교의 교리 전개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가지고 있는 내용이 이른바 '나'가 없다는 무아설이다. 현상계에 나타나는 모든 모양을 거짓된 가상(假相)으로 보고 모든 존재의 실체를 부정하는 이설은 뒤에 대승불교의 공사상(空思想)으로 발전된 바탕이 된 이론인데 근본교리의 중요한 핵심내용의 하나다.
이 무아설을 통하여 불교의 목적인 해탈 혹은 열반의 경계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열반을 증득한 분상에서는 상.낙.아.정(常.樂.我.淨)의 4덕이있다 하여 무아가 다시 아로 전환되어 설해진다.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간 진여(眞如)의 입장에서 보면 실상인 진여 자체에 갖추어져 있는 공덕이 현상계의 가상을 벗어나 나타나기 때문이다.
중생을 번뇌의 존재로 파악하는 불교는 우선 탐.진.치(貪.瞋.癡)라는 세가지 근본번뇌가 있어 모든 업행을 전개하는 중심이 된다 한다. 모든 행위가 이 탐.진.치가 들어 있는 번뇌의 아음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특히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욕망이 일어나는 기술성이 고도로 발달하여 욕심의 한계가 한이 없으며 자꾸만 욕망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욕구불만에 빠지는 모순된 이율배반의 심리가 있다. 간단히 말하면 욕망을 많이 가지는 자일수록 불만에 더 깊이 빠지게 된다는 말이다. 이렇기 때문에 인간이란 결국욕망의 노예가 되어 삶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질곡과 고통 속에서 헤매게 된다.
그런데 이 욕망을 주관과 객관의 대응관계에서 보면 모두 집착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집착하는 마음이 욕망이라는 것이다. 나라는 자아의식이 일어나 이기적 에고이즘(Egoism)을 형성한 것을 아집(我執)이라 하며 이 아집에 종속적으로 따라 일어나는 내 것이라는 소유욕을 아소(我所)라하여 이아와 아소가 욕망을 일으키는 세력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아의 이치를 모르는 무지에서 나오는 어리석은 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번뇌를 일으키어 깨달음을 장애하는 두꺼운 벽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무너뜨려야 해탈과 열반을 얻을 수 있다 한다.
또 객관에 대한 인식이 실체가 없는 거짓된 것임을 모르고 참으로 있다고 착각하여 대상에 집착하니 이것을 법집(法執)이라 한다. 사물의 진상을 미혹하여 참이 아닌거짓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마치 꿈 속에서 몽정을 참이라고 여겨 집착하지만 꿈을 짼 뒤에 보면 참이 아닌 헛된 것이라는 말이다. 아와 아소 아집과 법집이 모두 공한 것임을 모르는 소치가 집착을 일으켜 욕망에 욕망을 포개어 쌓아가는 것이 중생의 실태다.
따라서 욕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집착을 끊어야 하며 집착을 끊기 위해서는 무아의 이치를 통달해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교리적인 공식이다. <금강경>에서 아집과 법집의 두 집착을 끊고 아공과 법공 그리고 공한 것마저 공하다는 구공의 이치를 설해 대이를 삼았다. 공하다는 것은 또한 실체를 부정하는 말이면서도 참모습을 찾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도리를 내포하고 있는 말로 더 나아가 반야대지를 드러내는 의미가 있다.
지혜의 운용이 참 삶을 얻어가는 활로요, 집착이 가져오는 욕망은 나쁜 과보를 초래하는 상실의 길인 것이다.
중국의 방(龐)거사는 이 세상을 공하게 보고 살라는 말을 하였다 보이고 들리는 성색(聲色)의 경계에 집착해 버리면 실상을 사무쳐 보는 지혜의 눈은 멀고 마는 것이다. 나라는 자아에 대한 고집 때문에 나와 남을 대립적으로 생각하고 내 이익을 위해서는 남의 손해는 아랑곳하지 않는 욕심주의는 결코 성숙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의 참된 의미는 욕심으로 인한 소유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하였느냐의 행위의 가치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무소유를 실천하는 수행자 집단도 있다. 옷을 입는 것마저 거부하는 나체 수행자가 버젓이 현존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물욕에 눈이 어두워 양심을 팽개치고 온갖 비리를 자행하며 우리 사회를 부패시키는 그릇된 인간상들이 많이 있다 순수한 자기의 참 마음으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헛된 욕심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리불이 열반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탐.진.치 삼독이 사라진 것이 열반이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욕심이 떠났을 때 사람의 마음은 가장 깨끗해 진다. 또보살도 실천에 있어서 보시는 가장 으뜸가는 실천덕목이다. 베풀어 주는 마음 없이 인간미는 사아날 수가 없는 것이다.
남에게 무엇을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훨씬 더 위대하다. 사람의 생활에 인격의 위대성이 발휘되어야 좋은 사회가 만들어진다. 남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정신은 나를 버리는 정신이다. 내가 나를 가지고 집착한 때 실제로 나는 아무 일도 보람되게 할 수 없는 무능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큰일을 하기 위해서 아니 내 생애의 삶을 참되게 잘살기 위해서 나를 버리고 살아야 한다. 나를 버리는것이 나를 이기는 것이다. 내가 없다는 무아를 알 때 나는 나를 버리게 되는 것이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생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