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상담실] 적개심과 의존심

열린 상담실

2007-09-19     관리자

이번에 오랫동안 미루어오던 일을 하나 마무리지었다. 다름 아니라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방법'에 관한 책을 펴내게 된 것이다. 책을 쓰게 된 이유는 그 동안 자신의 결혼 생활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훌륭한 배우자가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기에 건강한 사랑과 인정을 받고 자라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적개심'과 '의존심'이라는 두 감정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적개심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미워하는 마음'이 된다. 더 강하게 표현을 하면 '복수심'이 될 것이다. 의존심은 '지나치게 사랑받으려는 마음'과 뜻이 통한다. 겉으로 볼 때에는 이 두 감정은 전혀 별개의 것처럼 보이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것을 서로 관련을 맺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꼭 사랑이 필요한 어린 시절에 그것이 결핍되거나 상실되면, 마음 속에는 갈애(渴愛)가 커지게 된다. 사랑의 욕구가 크면 클수록 그것은 충족되기가 어렵다. 원하는 사랑이 좌절되면 마음 속에 적개심이 싹트게 되고 그것은 나중에 복수심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부부가 원만하게 살기 위해서는 이 두가지 감정을 꼭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완전히 극복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적개심은 사람을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할 수 있다. 마음 속에 마음이 차곡차곡 쌓이다가 그것이 분노로 폭발하게 되면 매우 잔인한 모습을 띄게 된다. 나는 그런 대표적인 예로써 연산군을 들고 싶다.

연산군의 아버지가 조선의 성종이고 그의 어머니가 폐비 윤씨라는 사실은 '금삼의 피'라는 소설을 통하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원래 폐비 윤씨는 성종의 총애를 독차지하여 숙의의 신분에서 왕비가 되었지만, 그 후 성종이 다른 여인들과 밤을 보내는 일이 잦자 그들을 독살할 요량으로 비상을 숨겨두었다가 발각이 되고 만다. 거기에다가 질투심을 참지 못하고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냄으로써 그녀의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미움을 사서 폐위되었다가 끝내는 사약을 받고 만다.

그의 어머니가 폐출될 당시 연산군의 나이는 만 3세정도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였다. 폐비 윤씨의 죽음에 대해서 성종은 일체 함구령을 내렸기 때문에 연산군은 계모인 정현 왕후를 친모인 줄 알고 자랐다고 한다.

그러나 피는 속일 수가 없었던지 연산군은 그녀를 그다지 따르지 않았다. 추측해보건대 정현 왕후의 입장에서 전처의 자식인 그에게 어머니로서의 진정한 사랑을 베풀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다. 특히 그녀가 직접 낳은 아들인 진성 대군(연산군에게는 배다른 동생)이 태어나자 그를 편애했다. 거기에다가 할머니인 인수 대비도 연산군을 지나치리만큼 미워하고 진성 대군을 유달리 사랑했다고 한다.

어린아이들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차별대우를 받게 되면 마음 속으로 깊은 적의를 느낀다. 그러면 나중에 성격이 비뚤어지고 난폭한 아이로 자랄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연산군은 세자 시절부터 포악한 행동을 보여서 주위사람들의 우려를 자아내기도 하였다. 그러한 우려는 그가 왕이 된 뒤에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연산군은 19세에 왕위에 올라서 약 4년 뒤에 어머니의 정확한 사인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은 어린시절부터 사랑에 굶주리고, 마음의 불씨를 속으로 감추어왔던 그의 가슴에 복수심이라는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폐위에 관련된 모든 대신들을 죽이는 대살생극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할머니인 인수 대비를 머리로 받아서 절명케 하였고 성종의 후궁들과 그 자손들, 그리고 궁녀와 내시들까지 모조리 죽였다.

그의 복수심의 한쪽 방향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다면 다른 한쪽은 여색(女色)을 밝히는 쪽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매일같이 궁안에 기생들을 불러 들여서 흥청거렸으며, 여염집 아낙네들을 겁탈하였다. 심지어는 그의 큰어머니 격이었던 월성 대군의 후실인 박씨 부인을 겁탈하였는데, 그녀는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자결을 하고 말았다.
나는 연산군의 이야기를 듣거나 볼 때마다 이 세상을 좌우하는 힘은 결국은 '사랑과 미움의 감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랑의 세계가 우세할 때는 평화가 온다. 미움의 세계가 강해지면 불행의 그림자가 닥쳐온다. 그러나 두 가지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사랑과 미움은 끝없이 윤회하는 것이다.

나의 진료실은 강남의 선정릉 바로 맞은 편에 있다. 선정릉은 도심 한복판의 공원답지 않게 아름드리 나무와 드넓은 정원을 가지고 있어서 소풍 철이 되면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선정릉이 바로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과 계비인 정현 왕후가 묻힌 곳이다. 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왕릉 주위를 자주 산책하는데, 어머니를 잃은 아이의 억울함과 분노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곤 한다. 그러한 분노를 녹여줄 수 있는 것은 주위사람들의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인데 불행히도 그의 할머니와 계모는 그런 것을 채워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