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산 순례기] 1.서역의 우담바라 돈황석굴

須彌山 巡禮記

2007-09-19     김규현

프 롤로그-구름위의 수미산(須彌山)

북경발 우루무치 행 터콰이(特快) 열차에 몸을 싣고 한없이 달리는 동안 이명 현상(耳鳴)을 동반한 마치 환상 같은 영상이 온통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는데, 그것은 바로 구름 속에 솟아 있는 이상한 모양을 한 거대한 산이었다.
저녁 햇살에 찬연하게 빛나는 아름답고도 외로운 그런 산이었다. 그리고 뒤따르는 하나의 화두(話頭) '수미산은 과연 이 사바세계에 실존하는가?' 였고 또 만약 실존한다면 나는 그곳을 정말 찾아 갈 수 있는가였다. 내 젊음의 여울목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나로 하여금 세상의 일상사에 등 돌리게 닥달했던 '히말라야의 환상'의 실체가 바로 '수미산의 부름'이었을까?하는 물음 또한 나로 하여금 수미산 삼매(三昧)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하여간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던가. 열차는 밤과 낮을 안 가리고 중국대륙을 동서로 횡단하고 있었다. 비록 신화 속으로 들어갈 기차에 어울리는 칙칙폭폭 소리도, 때때로 울리는 경적음도 없는 그런 기차이지만, 긴 몸을 끌고는 서역(西域)으로, 천축(天竺)으로-아니 시공을 뛰어 넘어 신화의 전설이 숨 쉬는 불보살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었다.

수미산!

몇몇 불교사전 등을 정리 해석하면 고대인도인의 수미산설(設)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이 세상 즉 사바세계(娑婆, 娑河)에는 그 중앙에 '수메루산(蘇迷盧, 須彌婁)이 사주(四洲)세계 중앙의 금륜(金輪) 위에 우뚝 솟아 있는데, 그 곳에서는 불보살이 생멸(生滅)을 나타내어 세계를 교화하며 중생을 인도하고 있다. '수미산은 한역으로는 묘고(妙高) 묘광(妙光) 선적(善積)으로 번역되며 범어(梵語)로는 Sumeru-Parvatta라 한다.' 좀 난해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이지만 다시 한번 요약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 중앙에 신불(神佛)이 사는 수미산이 있고 사주(四洲) 중의 하나인 남섬부주에는 큰 호수(아뇩다지)가 있어 그곳에서 갠지스 강을 비롯한 사대강이 발원하고 있다는 것이 신화 속의 수미산 설의 요체인 것이다. 자! 가는 것이다. 수미산으로 나그네 되어….

돈황의 감흥을 찾아서

'수미산 삼매'에 빠져 있다가 차내의 술렁거림에 깨어보니 차는 이미 서역의 관문인 '하서주랑(河西走廊)'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 긴 복도 같은 하서주랑은 약 2천3백년 전 한무제(漢武帝)-한반도에도 한사군을 설치했다.-가 서역길, 즉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이 곳에 '하서사군(河西四郡)인 무위, 장악, 주천, 안서'를 설치한 후 실크로드의 요충지가 되었는데 중앙아시아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때로는 흉노족이 때로는 토번, 위구르, 서하, 투르크가 지배했던 역사를 가진 마치 사막의 바람 같은 운명을 지닌 오아시스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서주랑' 이란 이름은 남으로는 여름에도 만년설을 이고 있는 기련산맥(祁련連)을, 북으로는 고비탄을 끼고 길게 뻗어 있는 복도 같다고 해서 후대에 생긴 이름이기도 한데 그 중간쯤에 만리장성의 끝인 '가유관(嘉裕關)'이 있어 일단 기차에서 내리기로 하였다.

오래 전에 본 이곳을 무대로 한 중·일 합작 영화 '돈황'의 감흥을 새롭게 되새기고자 찾아간 가유관 성곽과 성루는 명나라 때 새로 신축한 것이어서 역사의 이끼 냄새는 맡을 수 없었지만 석양 속에서 고비탄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을 맞으며 만리장성의 무너져 내린 초라한 성곽을 보고 있으려니 이곳이 비록 옛날의 그 고(故)관문 - 이미 오래 전에 모래 속에 묻혀버린 옥문관(玉門關)이나 양관(陽關)이 아니더라도 그런 대로 만리장성의 끝이며 서역의 시발점이라는 실감이 들기도 하였다.

그렇게 망연히 모래바람 속에 서 있다가 문득 한 가닥 의문이 일었다. 구도라는 열정을 갖고 이 관문을 드나들었던 순례자가 도대체 얼마나 되었으며 또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 막막한 사막으로 발걸음을 내딛게 하였을까?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해보면 3세기에서 11세기까지 약 180명이 이름 석자 남겼으며 그 중에서 우리의 혜초를 비롯하여 법현, 현장은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이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많은 무명의 순례자가 사막의 고혼이 되었을 터이니 구도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곳에 관련된 시 구절 중에서 이백의 '옥문관', 왕유의 '양관곡(陽關曲)'도 절창이지만 법현의 '불국기(佛國記)' 속에서의 탄식 또한 음미해 봄직하다.

하늘에 나는 새 없고 땅에 뛰는 짐승 없다.
멀리 보아도 눈 닿는 데 없고 갈 곳 또한 알지 못하겠다.
다만 죽은 자의 해골만이 표적이 될 뿐이다.

이튿날 첫 버스를 타고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뜻을 가진 '타클라마칸 사막'을 남으로 우회하여 하루 종일 달려서야 돈황 시내에 도착하여 바로 동남쪽 25km 떨어진 천불동(千佛洞), 즉 막고굴(莫高窟)로 직행하였는데 관광객이 모두 떠난 이곳의 풍광은 온통 모래바람 속에 허허로움만 가득할 뿐이었다. 천여년 동안 염불, 목탁소리 또 징소리 가득했을 곳이었겠지만 지금 들리는 것은 온통 귀신의 울부짖음 같은 바람소리 뿐.

돈황 천불동! 부연설명이 별 필요없을 정도로 유명하니, 특히 우리에게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곳이어서 더욱 그렇겠지만, 세계적으로도 '돈황학'이란 학문의 한 분야가 생기게 한 곳이기도 한다. 한마디로 세계 최대규모의 불교 예술의 보고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사막에 핀 '우담바라'라 할까?

천불동이 처음 조성되기 시작한 때는 4세기로, 전진(前秦 366년)의 낙존이라는 수행승이 이곳을 지나다 홀연 금빛의 천불을 보고 굴을 파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시대별로는 11개 왕조 천 년을 거치면서 굴이 조성되었는데 그 중 당(唐)대가 235굴이나 되어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 발굴, 정리된 굴 수는 492개이나 아직까지 모래에 파묻힌 것도 부지기수라 한다. 총 길이만도 2km에 달하는 천불동의 내용별 구분은 대개 3개로 나누는데 - 수행을 위한 선굴(禪窟), 탑을 돌기 위한 탑묘굴(塔廟窟), 불공을 위한 전당굴(殿堂窟)이 주종을 이루는데 수(隋)대 이전 동굴 42개가 주로 선굴, 탑묘굴인 반면 수·당 이후의 것은 주로 전당굴인 것을 보면 당시 불교의 대중·세속화되는 과정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거대한 열반상이 2개, 34km나 되는 거대불상굴도 2개가 된다.

벽화의 내용별로는 불상화를 비롯, 고사, 변상, 불교사적, 신괴(神怪), 공양인상, 장식도안 등의 7분야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럼 왜 이런 세계 최대의 불교유적지가 원(元)대 이후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가 20세기초 홀연히 나타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당연히 생기게 되는데, 첫째 이유는 명대(1516년) 돈황은 회교민족인 투루판(吐魯番)의 침략을 받아 주둔군인 자위관마저 폐쇄하기에 이르러 돈황은 자연 수백년 간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청대 가경(嘉慶) 년간에 다시 돈황현이 부활되었지만 행정력은 미미한 형편이었다. 그러다가 1900년 6월 22일 드디어 막고굴 태청궁(太淸宮) 도사 왕원록에 의해 16굴 갱도 북면에서 장경동(藏經洞)이 발견되어 돈황은 다시 세계적 이목을 받게 된다.

이 장경동, 즉 지금의 17굴에서 우리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도 발굴 된 것이다. 1,200년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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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茶丁) 김규현 님은 1947년 서울생으로 성균관대학교와 해인불교전문강원, 북경중앙미술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95년 1년간 본지에 '月印千江之曲'이라는 이름하에 수인목판화(手印木版畵)를 소개한 바 있다. 현재는 티벳대학에서 범어 및 탕카 연구 중 히말라야를 넘나드는 여행을 하면서 글쓰기와 그림그리기에 몰두하고 계시다. 이 글 '수미산 순례기'는 히말라야산 넘어 티벳고원에 있는 수미산이라 일컬어지는 카이라스산(6,714미터)에서 발원하는 갠지스강을 따라 티벳고원을 동서로 횡단하여 종착지 인도의 캘커타까지의 여행기로, 주로 신비의 카이라스, 티벳불교의 현황, 티벳의 진기한 민속, 밀교의 실체, 히말라야의 전설 등등이 소개될 예정이다.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