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진 스님의 아주 특별한 동거

오늘을 밝히는 등불/나눔의 집 원장 혜진 스님

2007-09-19     관리자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해도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과의 나눔의 집 생활 이야기를 책 {나, 내 일 데모간데이}으로 펴낸 덕분에 이곳 저곳에서의 인터뷰에 한동안 시달렸던 혜진 스님은 오늘도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 어제까지 할머니들의 그림 전시관계로 열흘 남짓 일본의 각 도시를 다니다 귀국해서인지 아직까지 피로를 느낀다. 하지만 오늘(9월 10일 낮 12시)은 그런 내색을 할 수 없는 할머니들의 수요시위날이다. 오늘로 281번째를 맞는 수요시위는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6 년째 매주 수요일 빠짐없이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무표정하게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요즘 들어 15∼20명 남짓이 참가하는 수요시 위이지만 오늘은 어찌된 영문인지 100여 명 가까운 이들이 모여들었다. 할머니들의 회의가 있는 날인데다 추석을 앞두고 오랜 만에 서로의 얼굴도 볼 겸 할머니들이 30여 분 나오셨고, 최근 할머 니들의 일상을 다큐멘터리 영화화한 '낮은 목소리 2'를 보고 찾아온 동일여고, 풍문여고 학생들, 그리고 방송국과 몇몇 재야단체가 함께 참여한 것이다.
"벌써 6년째 계속되어온 시위이지만 아직 뚜렷하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몇 차 례의 '반짝'했던 국민적 관심뿐 어느새 그때의 관심조차 기억에서 잊혀지는 듯하고 할머니들의 마 지막 소원이라 할 일본의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 명예회복, 정부의 대책마련 역시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일제 식민지라는 악몽과 속내를 숨기고 살아온 52년의 또다른 악몽에 시달리는 동안, 그리고 모 든 것을 드러내고 살아온 지난 6년이란 세월 동안 할머니들은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 버렸다. 관 심이 부쩍 준 것같은 요즘 수요시위는 그래서 더 힘들고 더욱 외롭다. 곁에서 줄곧 지켜보아야 하 는 혜진 스님의 마음 역시 안타깝기만 하다.
" ... 일본이 사죄하는 걸 보시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할머니들은 울먹이며 말을 못 잇는 여고생(동일여고 '겨레지킴이' 회원)의 말에 조금이나마 힘을 얻는다. 손을 꼭 잡고 손녀딸같은 여고생들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할머니들의 그렁그렁한 눈시울이 또다시 붉게 물든다.
'일본 군대의 성적노예(military sexual slavery)'로 강제 동원됐던 조선여성은 10∼20만 명으로 추정된다.
위안부(아직 정확한 개념의 단어가 정립되어 있지 않은 가운데 쓰이고 있는 '위안부'나 '정신대'라 는 단어는 가해자쪽의 관점을 갖고 있다.) 문제가 비로소 우리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로서는 최초로 공개 증언을 하면서부터였다. 이어 박옥 련, 박두리, 김순덕 할머니들의 증언이 잇따라 이루어지면서 위안부 문제는 우리 언론과 국민들의 감정을 격앙시키기에 이르렀고, 국제적인 문제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위안부 강제동원을 비인도적인 국제범죄로 규정한 유엔과 국제기구들은 현재 피해자에 대한 공 식사과와 배상, 책임자 처벌을 일본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1965년 한일기본조약 부속협정인 청구권협 정을 들먹이며 식민통치에 대한 한국 정부와 개인의 국가배상청구권은 완전히 소멸됐음을 주장하 고 있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이 아닌 민간차원의 '아시아여성평화국민기금'이 라는 '돈'을 한평생 어렵게 살아온 할머니들에게 갖가지 편법을 동원해 전달함으로써 위안부 문제 를 무마하려고 하고 있다.
지금까지 신고된 위안부 출신 할머니는 158명. 그 가운데 현재 8명의 할머니들이 나눔의 집(경기 도 광주군 퇴촌면 원당리 65, 전화 0347-768-0064)에서 혜진 스님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90년 불교인권위원회 총무직을 맡아보던 혜진 스님이 위안부 할머니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 은 '91년 경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에서 그 동안 돌아가신 위안부 출신 할머 니들의 천도재를 봉행해줄 스님을 찾던 중에 불교인권위원회로 연락이 닿았고 그래서 조금씩 알 게된 사연들이 스님으로서는 기막힐 노릇이었다.
"당시에 살아계시는 할머니들은 과거의 상처로 말미암아 변변한 가정을 이루지 못한 채 가난과 병에 시달리며 단칸 사글세방을 전전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과거를 숨기면서도 혹시나 하는 두려움 속에서 울화병을 이기지 못한 채 이미 많은 분들이 돌아가신 후였고요. 그리고 기독교에 비해 미 흡한 불교의 소외계층에 대한 무관심을 생각해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정대협에 전 화를 걸어 할머니들이 기거할 집을 마련하겠다고 했지요."
스님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따뜻한 보금자리를 생각했다. 마음 편히 서로들 위로하며 남은 여생을 지낼 수 있는 곳, 그런 곳을 만들겠다고 다짜고짜 정대협에 통보를 했던 것이다.
스님은 곧바로 불교인권위원회 여성분과위원회를 통해 보금자리 마련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여나 갔고 비로소 '92년 8월 나눔의 집 건립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월하 스님의 보시 등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6개월도 안 되어 마포구 서교동에 전셋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눔의 집 생활 1년을 넘기자 스님은 할머니들과의 생활에 무리한 탓인지 건강이 부쩍 나빠졌다. 그래서 '94년 초겨울 공부에 대한 미련도 남아 있던 터에 건강도 돌볼 겸 할머니 들과의 생활을 정리하고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 1년 여를 보냈고, 영국에서는 국제사면위원회에 서 일을 하며 지낸 5개월 동안 그곳 대학의 입학허가까지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입학금 문제로 잠시 귀국한 스님은 나눔의 집 상황을 전해듣고 다시 출국할 수가 없었다.
전세 계약 만기로 새로 이사한 혜화동의 전셋집은 보일러도 제대로 가동되지 않을 만큼 나눔의 집 운영은 엉망이었다. 성금이나 물품에 대한 집착이 점점 커져가는 할머니들의 모습도 스님을 괴 롭혔다. 스님이 애초에 생각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스님이 시작한 것이기에 좀더 좋은 모습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래 지난 '92년 불자인 조영자 씨로부터 기증받은 경기도 광주 퇴촌의 시골땅에 집을 짓고 영원 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기로 결심했다. 할머니들이 여생을 정리하며 당신들의 한과 아픔을 승화시킬 수 있는 곳은 바로 건강한 흙과 신선한 공기가 있는 시골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나눔의 집 생활도 우리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할머니들의 생활과 그리 다르지 않아요. 아직도 아이들처럼 물건 분배는 틀림이 없어야 하고 또 보통 양로원처럼 보이지 않는 질투와 세다툼도 볼 수 있으니까요. 물론 웃음도 떠나지 않아요."
1년 2개월 남짓 할머니들과 함께 살아온 오정자(38세) 간사가 전하는 요즘 나눔의 집 모습이다.
생활관 두동, 법당이 있는 수련관 한동의 나눔의 집은 현재 두 명의 간사와 한 분의 보살님이 할 머니들을 돌보며 생활하고 있다. 매달 천여 명의 후원회원들에게 소식지를 보내는 일 등 나눔의 집 생활비는 한 달 4, 5백만원 정도가 든다. 회원들의 한 달 후원금이 2백만원 정도이고 보면 그 살림살이가 궁금한데 그 부족한 부분은 다행히 조계종에서 지원해주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지 원도 올해까지이니 곧 자립을 해야 할 처지다. 그래서 이래저래 스님의 발걸음이 더욱 바빠지고 있다.
이제 할머니들의 퇴촌 나눔의 집 생활에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하루 일과를 새벽 예불로 시작한 다는 것이다. 물론 자율적으로 원하는 할머니에 한해서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할머니들은 도시 사 람들이 사놓고 가꾸지 않는 땅에 작지만 손수 농사를 짓고 있다. 그리고 그 수확을 기다리며 그것 들을 여기에 오시는 손님들한테 마음 놓고 나누어줄 것이라고 자랑이 여간 아니다.
"요즘 할머니들은 나도 좋은 일을 해보고 죽고 싶다고 말씀들을 하세요. 물론 어둡고 고통스러 운 삶이셨지만 지금, 그리고 앞으로 이생을 돌아볼 때 할머니들의 삶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 을 느낄 수 있는 자리가 더 많이 마련되었으면 해요.
아픈 과거를 딛고 당당히 역사의 증인으로 서는 일이 이제부터 할머니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지 요."
그래서 요즘 할머니들은 북한동포돕기에 자발적으로 나서는가 하면 미군 기지촌 여성공동체인 두레방 방문이나 원주 소쩍새 마을 등 복지시설 방문이 부쩍 잦아졌다. 사회의 이곳 저곳 어둡고 그늘진 곳을 찾아 사랑과 용기를 심어주는 우리 시대의 어른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혜진 스님은 지난 8월 4일 나눔의 집과 언론사 공동으로 캄보디아의 훈 할머니를 초청했다. 50여 년이 넘게 타향에서 버려진 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을 독실한 불심으로 이겨내며 살아온 위 안부 출신 할머니를 같은 처지의 할머니들을 모신 나눔의 집에서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였다. 그리고 훈 할머니는 최근 기적적으로 가족을 찾고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번 훈 할머니를 지켜보며 아직도 동남아지역 어딘가에 살아 있을 제2, 제3의 훈 할머니의 생존 여부와 일본군 위안부들의 실상에 주목해야 했다.
혜진 스님은 지금 '일본군 위안부 기념관'(가칭) 건립에 온 힘을 모으고 있다. 치욕과 고통으로 얼룩진 세월의 흔적이지만 일제의 정신대 만행과 같은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보고 배울 수 있는 역사교육의 장을 만들기 위해 각종 자료를 모아 전시할 기념관이 내년 3월 개 관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무관심해지면 묻혀버리는 거지요. 일본이 노리는 것도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는 것, 우리들의 관 심이 무뎌지는 것이지요."
스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이제 연로하신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일본의 공식 사과를 받아 내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다. 할머니들의 한을 풀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국민들의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관심과 격려가 더욱 필요한 것이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권창선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