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의 죽음

특집 / 죽음

2007-09-19     관리자

죽어보지 않고서 죽음을 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외면할 수만 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이데거의 말이 아니더라도 죽음에 이르는 하나의 존재이기 때 문이다.
모든 철학과 종교의 귀일점은 죽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죽음을 넘어서기 위해서 그들은 각자 다른 목소리로 자기의 학설을 주장해 왔다.
희랍의 에피쿠로스는 "죽음은 우리에게 있어 무의미하다. 우리가 생존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 께하지 않고 죽음이 우리에게 오는 순간,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산 사람 에게도 무관하고 더욱이 죽은 사람에게는 관련될 수 없다."고 한마디로 잘라 죽음을 부인하려고 했다. 그러나 릴케는 그것과 상반되는 말을 [말테의 수기]에서 하고 있다. "임신한 여인의 태(胎) 속에 죽음이 싹트고 있다"고.
그는 이렇게 죽음을 감지하며, 성숙한 인간은 마치 무르익은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지듯 죽음도 그와 같이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라고 하였다.
스토아 학파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항상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잔치에 온 손 님이 시간이 되면 우아하게 물러나듯 그렇게 떠나오는 게 손님의 도리가 아닌가"하고 반문하였다.
장자(莊子)도 그와 맥을 같이하여 "대지가 내게 형체를 주고 생명을 주어 일하게 하고, 나이 먹 게 하고 죽음으로 쉬게 한다. 그리하여 생애를 잘 지냈으니 죽음 또한 즐거이 맞이해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죽기 싫어서 발버둥을 치며 선약(仙藥)과 불로초를 찾아 헤맨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시체 옆에 앉아 백골관(白骨觀)이나 부정관법(不淨觀法)의 명상을 통해 애욕의 덧없음과 죽음의 실체를 규명해보려고 하였다.
해골을 식기(食器)로 사용하면서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 속으로 받아들이려고 한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가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한 노력이었다. 그만큼 죽음은 우리에게 절대절명의 과제이 다.
기독교에서는 죽음을 이렇게 해석했다. 인류의 시원(始原)인 아담과 이브에게는 애당초 죽음이란 게 없었다. 그들의 생명조건은 유한도 무한도 아니었다. 그런데 만지지도 먹지도 못하게 한 선악 과를 따먹었다. 사탄인 뱀에 의해 선악과를 선택함으로써 하나님을 거역하고 죽음을 선고받게 된 것이라고. 즉 신체적 죽음은 인간이 신(神)을 거역한 죄악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걸머지고 대신 속죄의 희생양이 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 를 화해시켜려 했으니, 그를 믿으면 죄의 사함을 받고 천국에 가서 영생을 얻게 될 것인 바, 창조 주를 믿고 죽음에서 벗어나라고 한 것이 그들의 처방전이다.
그러면 부처님은 죽음을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어느 날 외아들을 잃은 한 과부가 부처님을 찾아와 살려달라고 간청을 드렸다. 부처님은 "자식을 살리고 싶으면 지금부터 거리로 들어가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서 불을 얻어오라"고 하셨다. 처음 엔 뛸 듯이 기뻐하며 성 안으로 들어갔으나 여인은 끝내 불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 부처님의 가르 침은 이와 같았다. 이 여인의 경우처럼 우리가 무상의 도리를 숙지한다면 아마 바쁜 일상은 덜 분 주해지고 욕망으로부터도 놓여날 수 있을 것 같다.
불교에서는 원래 죽음이 없다고 한다. 그것을 보조지눌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생사(生死)란 본래 없는 것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그것은 마치 눈병이 있는 사람이 허공에 어른거리는 것을 볼 때, '있다'고 하나 눈병이 다 나으면 허공의 꽃도 저절로 없어져 비로 소 아무것도 없었던 것을 알게 되는 경우와 같다"고.
진각(眞覺)은 계송으로 말했다.
"육신 텅 빈 곳에 나 또한 없으니 말아라. 이 몸의 정체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생사란 본래 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닌 것을 깨달은 경지에서는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 다. 죽은 것은 다만 육신일 뿐, 본질적인 자아(自我)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선사들은 죽음 앞에 서 자유로울 수가 있었다. 심지어는 임종에 드는 순간까지도 제자들을 위해 몸으로써 활구(活句) 를 보여준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촛불을 켜들고 스스로 장작더미 위로 올라간 경통(景通) 선사. 여섯 걸음을 걷고 일곱 번 째, 발 을 내딛는 순간에 입적해버린 지한(志閑) 선사.
'내가 갈 곳이 있다'고 하면서 지팡이를 짚고 신발을 신는 순간에 입적에 든 단하천연(丹霞天然) 선사.
"일체 변하는 법은 그 실체가 없는 것. 모양이란 원래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고 한 혜월 스님은 부산 범일동 안양암 뒷산에 올라 한손에 솔가지를 잡은 채, 호흡을 멈추셨다.
필자가 여러 분야를 나누어 죽음의 모습을 살펴보았는데 안심입명(安心入命)한 도학자(道學者)의 죽음이 비교적 고요하였다. 그러나 선사들만큼 걸림없고 자유자재한 모습은 아니었다. 선사들은 또 오래 살았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든 것은 80세, 그의 제자 가섭은 100살을 살았다. 그의 뒤를 이은 아난은 120 세, 중국의 혜가는 107세, 조주 선사는 120세, 단하천연은 86세, 약산유엄은 84세, 마조도일은 80 세, 남전보원은 87세, 삼국유사를 쓴 일연 선사는 94세, 혜초 80세, 신라왕자 김교각은 99세에 입 적했다. 원측 84세, 태고보우 82세, 서산 대사 85세, 소요 태능 88세, 초의 선사 81세, 경봉 선사 90세, 부산 문성 스님 100세, 일본의 백은 선사 84세, 관산(關山) 역시 84세, 선학자 영목(鈴木) 씨 는 96세를 사셨다.
그들의 소식(小食)과 무욕(無欲)이 어차피 무병장수와 무관하지 않을 테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착한 사람이 악한 사람보다 오래 산다"는 믿을만한 미국의 그 연구발표에 마음이 끌린다. 여기에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또 한 가지가 있다. 출가사문들은 생사문제를 화두로 삼아, 평생을 백척간 두에 선 듯 용맹정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선(禪)이란 어차피 인간을 물음으로써 인간의 생사를 구명하려 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적 인 것과 관련되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죽음에 관하여서이다.
"죽을 때에 죽지 않도록, 죽기 전에 죽어두어라. 그렇지 않으면 정말 죽어버린다." 누군가의 말 처럼 과연 어떻게 죽어야, 죽지 않을까 하는 커다란 물음이 우리에게 남는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권창선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