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불교] 현대 중국 불교

현대 중국 불교의 교학체계

2007-09-19     관리자
가산불교문화연구원 개원 6주년 기념, 조계종 교육원 개원 3주년 기념으로 공동주최한 [열린 세계에 있어서 세계 승가공동체의 현황과 전망]이란 제하의 학술회의 자료집에서 양해를 얻어 '현대 중국 불교 현황(정엄 스님)'을 발췌 초록, 2회로 나누어 싣는다. 현대 중국의 교학과 수행체계를 조망함으로써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찾고, 미래세계를 열어나가는데 초석으로 삼고자 한다.
-편집자 주-


교육기관 : 불학원

1) 불학원의 역사
현대 중국 불교의 교육제도는 해방 이전부터 여러 방면에 걸쳐서 싹트기 시작했는데 현재는 중국불교협회에서 북경 법원사(法源寺)에 설치한 불학원(佛學院)이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그러나 현재의 불학원이 설치되기까지 다방면에 걸쳐서 교육에 대한 관심과 운동이 일어났다.
청나라 말기의 무술정변 이후 장지동(張之洞)의 묘산흥학운동(廟産興學運動)의 영향으로 위기감을 통감한 불교계는 각지에서 승학당(僧學堂)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곳은 1903년에 축운(竺雲) 스님이 장사 개복사(開福寺)에 설치한 호남승학당이다. 또 비슷한 시기에 문희(文希) 스님은 상주 천녕사에 보통승학당을 세우고 화엄종의 월하(月霞) 스님과 천태종의 체한(諦閑) 스님은 남경에 있는 삼장전에 강소승범학당을 설립했다. 또 중요한 교육기관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불교학자 양문회(楊文會)에 의하여 설립된 남경 금릉각경처의 석씨학당을 들 수 있다. 석씨학당은 당시 서양식 교육기관이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의 교육과정을 본떠서 학제를 설치하였으며, 불교학뿐만 아니라 일반과목도 함께 교육했다.
당시 석씨학당의 생도는 20여 명이었으며 이곳 출신으로 당대의 고승이었던 태허(太虛) 스님이 유명하다. 이 학당의 창립정신은 제자 구양점(歐陽漸)의 지나내학원(支那內學院)으로 계승되고, 다시 현재 중국불교협회 조박초(趙朴初) 회장에 의해 중국불교 불학원으로 계승되어 근대 중국불교 승가 교육의 원형이 되었다.
이 시기(1910년대)는 불교계 내부에서 교육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되었던 시기이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태허와 구양점 등에 의해 불교교육기관이 속속 개설되어 불학원 설립의 붐을 조성하였다.

2) 태허의 무창불학원(武昌佛學院)
중국의 종교개혁가로, 중국 불교사상 독보적인 위치를 접한 태허의 행적을 살펴보는 것이 이해하는데 참고가 될 것이다.
태허는 영파 천동사에서 의선경안(倚禪敬安)을 은사로 득도하였다. 그는 당시의 화엄종의 고승이었던 도계(道階)에게서 화엄학을 배우고, 천태종의 고승 체한에게는 천태사상을 전수받았다. 서양식 교육은 남경의 양문회가 기원정사(祇洹精舍)에 설치한 석씨학당에서 체득하였다. 이후 혁명가들과 함께 불교개혁운동에 참가하고, 1912년에는 양문회 등과 함께 중국불교협진회를 결성하였으나 수구세력의 저항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중국불교총회의 기관지인 [불교월보]의 편집을 담당하였다.
1914년 10월 재발심하기 위해 보타산에서 3년기한으로 폐관(閉關, 참선결사)에 들어간 후 일체 문밖 출입을 절제하는 선수행에 돌입했다. 1917년 결사를 마치고 1918년에는 장병린(張炳麟) 등과 각사(覺社)를 창설하고, [각사총서(覺社叢書)]를 간행했다. 1920년에는 월간 [해조음(海潮音)]을 발행했으며, 이 잡지는 지금도 대만에서 계속 발행되고 있다.
1922년에는 무창불학원을 개원하게 되었는데, 학제는 3년제로 80여 명의 재가자와 출가자가 입학하였으나 나중에는 2년제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1926년에는 국민혁명군의 공격으로 활동이 정체되었다가 뜻있는 이들에 의해 활동이 재개되었다. 한편 태허는 1932년에 세계불학원도서관을 개원하였으나 일본군의 침략과 전면항전으로 크게 타격을 입고 활동이 전면 중지되고 말았다. 무창불학원을 창설한 태허는 이외에도 만남불학원, 백림불학원, 한장교리원(漢藏敎理院)을 개설하는 데 힘썼다. 또 항일운동과 세계불교운동에도 힘썼으며, 그의 인간불교운동은 불교개혁운동에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3) 불학원의 교육현황
-법원사를 중심으로
일제의 침략과 좌우익 대립으로 대부분 폐쇄되었던 불학원은 해방 후 중국불교협의회 결의에 의하여 북경의 법원사에 다시 개설, 이어서 각 지방에도 불학원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66년 문화혁명으로 인하여 전국의 사원이 폐쇄되어 문을 닫게 되어 전통이 단절되었으며, 문화혁명이 끝나면서 다시 회복되어 현재 총 19개의 불학원이 개설 운영되고 있다. 이 가운데 불교협회에서 직접 운영하고 있으며 중국불교 교육의 중심지인 북경 소재의 법원사를 중심으로 그곳의 교육현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56년 창설, 66년에 문화혁명에 의해 폐쇄되었다가 80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개설된 법원사 불학원은 주 38시간의 수업(아침 . 저녁예불시간 합해서 80분 포함)을 하고 있다. 학제는 4년제로서 앞의 2년간은 교양과정으로서 불교학과 문화사 및 일반 교양과목을 4 대 6의 비율로, 나중의 2년은 전문과정으로 각 종파의 교리를 전문적으로 교육한다. 중국과 인도를 중심으로 일본, 티베트, 동남아시아 불교사를 공부하며, 철학사와 문학사, 세계사도 강의한다. 종파의 교리는 법상종의 유식론, 섭대승론, 인명론을 배우며, 삼론종의 삼론현의, 중론, 십이문론을, 정토종의 아미타종, 정토십요를 배운다. 선종에 대해서는 선종사와 육조단경을 중심으로 선과 관련된 능엄경, 천태소지관을 학습한다.
천태종에 관해서는 천태사교의와, 법화경을, 화엄종에 관해서는 화엄교학의 입문서인 오교장(五敎章)을 학습한다. 또 율에 관한 수업도 있으며, 사미계나 비구계, 보살계 등에 대해서도 배운다. 그 외에 기신론, 유마경, 구사론을 학습하고 권위있는 대가들의 주석서를 참조하고 있다. 최근에는 외국어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 영어와 일본어, 범어를 학습하고 있었다. 시사에 대한 관심도 많은 편으로 현대의 정치나 법률, 그리고 역사에 관한 수업을 받고 있으며, 특히 중국혁명사는 필수과목이다.
학인스님들의 종교생활은 매일 조석예불과 식사 전의 송경이 있으며, 보살계는 매월 음력 1일과 15일 저녁 7시에 송계(誦戒)한다. 학인들은 항상 승복을 입어야 하며, 독신일 것과 채식할 것을 교육하고 있다. 학인들의 생활비는 모든 비용이 중국불교협회에서 지원되나 부족한 부분은 홍콩, 대만, 일본, 동남아로부터 오는 시주금으로 충당되기 때문에 무료이며, 일년에 학인 1인당 2,000원(한화 약30만원) 정도 든다고 한다. 불학원을 졸업한 학인 가운데 연구원생을 선발, 2년간 더 연구할 수 있는데 현재 지도자, 강사, 예산부족으로 연구원의 인원은 소수에 불과하다.

"사회주의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고 공산당을 옹호하며, 헌법과 정부의 정책을 모범적으로 이해하며, 예불과 좌선, 송경, 송계를 시행하여야 한다. 선생을 존경하고 급우간에 단결하고 노동자를 존경하며, 사회공중도덕을 준수하고 공공의 재산을 애호하며 집단노동과 공익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예불과 좌선, 의복, 일상생활에 대한 규칙은 생략함). 신문 잡지 TV는 토요일과 일요일 이외에는 보지 못한다."

위와 같은 학인이 지켜야 할 생활수칙을 거의 철저하게 지키면서 살고 있는 불학원의 졸업생들은 추천해준 본사(本寺)나 은사(恩師)에게 돌아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불학원과 불교협회에서 종사하기도 하고, 불교협회에서 새로 인수받은 절을 관리하는 경우가 많다. 연구반에 진학하여 불교지도자를 희망하거나 외국에 유학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한다.

근현대 불교 학술 연구 현황
1) 근현대 불교 출판의 역사
청말 민국 초에는 양문회의 금릉강경처를 비롯하여 양주에 강북각경처, 상주에 천녕각경처, 천진각경처, 북경각경처, 삼시학회, 불학서국 등 불교 전문출판사가 설립하고 불전을 간행 유통, 불교 서적 출판이 매우 활발하였다.
당시 양문회는 과학기술 등을 배울 필요성을 통감하고 개혁, 변법운동에 가담한 후 26세 때 대승기신론을 보다가 깨달은 바가 있어 불교에 귀의하였다. 양문회는 1866년 남경에 금릉각경처를 창립, 최초로 정토사부경을 출판한 이래 많은 경전을 출판, 유통시켰다. 이곳은 양문회가 세상을 떠난 뒤 전란에 의해 폐허가 되었으나 해방 후, 조박초 등의 노력에 의해 활동을 재개하였으나 또다시 문화혁명으로 폐쇄되었던 것을 1973년 당시 총리였던 주은래가 금릉각경처의 사정을 알게되면서 복원사업을 지원하였다. 이로 인해 1981년부터 활동을 재개하였으며 현재 많은 경전을 출판, 보급하고 있다.
이곳 외에도 중화서국, 상무인서관 두 곳에서 불교서적 중 단행본과 연구서를 전문으로 출판하고 있다. 한편 불교잡지로는 [불학총보] [해조음] [불화보] [불교일보] 등이 발행되기도 하였으며, 50년대에는 북경에 [현대불교사]가 창립되어 월간 [현대불학]이 간행되고 상해에서는 [각신] [홍화월간] [각유정] 등이 발간되었다.
또 삼시학회에서는 [한장불교사휘(漢藏佛敎詞彙)]를 간행하였으며, 금릉각경처에서도 [현장역선전집] 400권을 간행하는 등 불교사업이 활발해지면서 출판사업도 자연히 성하였으나 56년 이후에는 좌파 사회주의자들의 간섭으로 불교서적의 출판이 곤란하게 되었으며, 그해 유일하게 남아 있던 [현대불학] 마저 폐간되고 돈황석굴과 운강석굴, 용문석굴, 그리고 방산석경등 정부에서 행하는 문화재 연구나 조사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불교연구서나 출판물은 공식적으로 발행할 수 없게 되었다. 종교계는 출판 언론의 자유를 빼앗기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불교교리의 해석에 있어서도 유물론, 무신론의 입장인 막시즘에 근거를 두고 해석하도록 강요당하여 불교교리를 왜곡하는 경우가 많았다.

2) 전망과 평가
중국에서는 각 대학을 중심으로 불교학을 연구하고 있는데 대부분 중국철학을 연구하는 가운데 불교를 병행해서 연구하며, 불교만 연구하는 전문연구원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젊은 불교학 연구자가 늘고 있으며, 해외에 파견하여 석사나 박사학위를 받도록 지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화혁명 당시 심한 탄압과 감시를 받아야만 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이즈음에도 매우 조심스럽게 종교학 연구에 접근하고 있다.
문화혁명 때 북경대에 재직 중이던 이연림 교수는 운전사 생활과 청소부 생활을 했으며, 황심천 교수는 농촌에 유배되어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불교학 연구를 계속해온 연구자들의 인내와 노력으로 북경대 내에 종교연구소를 개설하는 결실을 맺기도 하였다.
현재 젊은 불교학자들의 연구 자세는 진지하고 진취적이다. 현재 중국불교협회와 정부는 일본이나 스리랑카, 영국 등에 유학을 보내는 등 젊은 불교학자를 양성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권창선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