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수(刻手)가 밝히는 팔만대장경

부처님 그늘에 살며 생각하며 / 서각가(書刻家) 안준영

2007-09-19     관리자

경남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해인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곳에서 서각(書刻)을 하며 팔만대장경을 연구하고 있는 안준영(호 以山, 41세) 씨. 그가 이곳 해인사 밑으로 이사를 온 지는 6년째가 된다. 그전에는 경남 함양 연각사가 있는 덕유산에서 역시 삶의 방편으로 나무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서각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팔만대장경을 연구하게 된 것은 대장경연구소 종림 스님을 만나고부터이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이곳 해인사 산 밑에 와 전통찻집과 공방을 열고, 가족과 함께 살면서 이 일을 하게 되었다.
흔히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몽고군의 침입을 격퇴하려는 민족적인 염원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알려져 왔다. 국가 차원에서 대장도감을 설치해 16년만에 완성된 것으로 강화도성 밖 대장경 판당에 수장되었다가 1318년 선원사(禪源寺)로 옮겨졌고, 1938년 합천 해인사로 이운된 것이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이라 불리우는 이 대장경은 개태사(開泰寺)의 승통(僧統)인 수기(守其) 스님이 내용교정을 맡아 북송관판과 거란본 및 1232년 몽고침입 때 불탄 초조대장경을 널리 대교하여 오류를 정정하여 만든 대장경으로서 중국과 일본에서도 표준으로 삼고 있다. 현대의 대표적인 대장경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의 신수대장경도 이 해인사대장경을 정본(定本)으로 삼았을 정도다.
정확히 팔만천삼백사십 장의 판에 책으로 묶어도 육천팔백열다섯 권이 되는 이 경전들은 양각으로 새겨진 수천만 개의 글자가 구양순체로 하나같이 고르고 정밀할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글자가 그대로 살아있는 뛰어난 서각예술품이다.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진 배경에 대한 설명은 이규보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잘 나타나 있지만 누가 언제 무슨 나무로 어떻게 조성했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연구결과에 의하면 나무는 주로 지리산에 많은 산벚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나무들은 대부분 섬진강 뗏목에 실려 남해의 관음포에서 침목되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약 3년간 바닷물 속 뻘에 묻음으로써 나무의 진을 빼고 삭여 나무의 뒤틀림과 부패를 막았습니다. 대개 팔만대장경은 강화도에서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만 경판에 보면 남해분사도감이라고 각판된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해에도 분사도감이 설치되었던 것 같습니다. 강화에서뿐만 아니라 분산되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지요. 판면에는 옻칠이 되어 있고, 양끝에는 마구리를 대어 판목의 뒤틀림을 방지하고, 보관할 때 판면이 손상되지 않고 공기소통이 잘 되도록 한 선조들의 지혜가 놀랐습니다.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글자의 선이 완벽하게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 불가사의해요. 팔만대장경은 그 조성과정을 알려고 하면 할수록 불가사의하다는 말 이외에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어요."
서각을 한 지도 20년이 넘는 그이지만 반야심경을 경판에 새긴다고 할 때 초벌새김, 재벌새김, 마무리새김까지는 한 달 정도가 걸린다. 그리고 1시간 이상 서각한다는 것은 쉽지 않으리만큼 힘든 작업이라고 한다. 그런데 팔만대장경은 16년 동안 연간 투입된 인원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고 각수만 하더라도 수천명에 이를 것이다. 그 옛날 평시도 아니고 전란시에 생명을 걸고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판각작업을 했다는 것은 도저히 머리로는 헤아려지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산벚나무로 경판을 만든다고 했을 때 50년 내지 60년생 나무로 만들 수 있는 경판은 대 여섯 장 정도다. 그런데 팔만 장이 넘는 대장경의 나무들을 어떻게 어디에서 구해 3년씩이나 침목해서 썼을까.
불심(佛心)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더욱 신비로운 것은 수차례의 해인사 화재에도 장경각이 불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해인사로 이운된 이래의 기록만 보더라도 일곱 차례의 화재가 있었다.
선원사에서 해인사로 이운되어 온 것도 불가사의 중의 하나다. 경판 한 개의 크기는 가로 66cm 세로 24cm, 무게는 약 3.2kg으로 4톤 트럭 80대로 날라야 하는 분량이다. 당시의 도로사정과 운송수단을 생각할 때 이 또한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안준영 씨는 그 불가사의들을 하나하나 실증해보고 싶었다. 그는 올해 초 산벚나무와 후박나무, 자작나무를 비롯해 대장경 조성에 쓰였던 여섯 종의 나무 5톤 트럭 한 대분을 남해갯벌에 묻었다. 3년 뒤에는 경판으로 다듬어 판각해봄으로써 팔만대장경의 조성과정을 정확히 재현, 그 동안의 추측을 실증해보이고자 한다.
대장경연구소의 서각전문위원으로 팔만대장경의 조성과정을 학자가 아닌 각수로서 연구해가고 있는 안준영 씨는 한편으로는 이러한 판각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서각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PC통신 천리안의 문화유산답사동호회인 `우리얼'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그 가운데 특히 이러한 서각에 특별히 뜻있는 회원 47명을 중심으로 서각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각(刻)문화활동을 펼치고 있다.
`우리문화를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이름하에 모이는 회원들은 전국 각지인들로 주로 20대에서 40대가 중심이며 교사에서 사업가에 이르기까지 직업도 다양하다. 잊혀져 가는 우리의 각문화를 재정립하고 발전시키자는 데 그 뜻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단절되다시피한 우리의 전통서각을 지키고, 알리고 재창출해가고자 한다.
또한 안준영 씨 집근처에 있는 이산각연구소(以山刻硏究所)에는 현재 50여 명의 회원들이 매일 혹은 주말을 통해 서각을 공부하고 있다. 이들은 우선 해인사 근처의 이정표들을 서각으로 해서 세울 예정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폐사지와 사찰 주위에, 우리의 문화유적지에 현판을 우리의 서각으로 해서 거는 운동을 함께 전개하고자 한다.
"물론 잘 하려면 한이 없지만 10일에서 20일 정도의 교육을 받으면 웬만한 각을 할 수 있습니다. 초보자의 경우 이정표라도 자신이 직접 새겨 걸어놓고 보면 보람을 느끼지 마련이지요. 앞으로 이 모임을 더욱 발전시켜 교육과 더불어 각문화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합니다. 여건이 된다면 판각대회도 마련해보고 싶고요. 참가자들에게 남해 갯벌에 묻었던 침목을 나누어주고 대장경판각대회라도 한 번 열고 보면 그 동안의 인식들도 달라지고 구심점도 형성되리라 봅니다. 앞으로 팔만대장경을 보수할 일이 생길 때도 그렇고, 새로운 대장경을 조성한다고 할 때에도 이를 제대로 판각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히 필요할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이러한 방면의 인재가 몇 명 안되지만 교육과 각운동을 계속해나가다보면 저희들이 담당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은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도 했지만 우리문화유산 중 우리가 세계 속의 문화대국임을 입증해보일 수 있는 걸작품 중의 걸작품이라고 그는 믿는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본받아 이를 연구 보존하고 재현, 새로운 예술성과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후손으로서의 역할이요,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안준영 씨. 그는 우리의 각문화정립을 위해 팔만대장경의 조성과정을 밝혀 완벽하게 재현해내고, 이를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오늘도 불가사의한 팔만대장경의 신비를 밝히고 이를 알리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안준영 운문사가 있는 청도에서 1957년 출생, 경남 함양 연각사 근처에 살며 목공예와 서각을 했으며, 지금은 해인사 산 밑에서 부인과 함께 전통찻집과 공방을 운영하는 한편 각수(刻手)로서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연구하며,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각(刻) 문화활동을 전개해가고 있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권창선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