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마음을 일깨워 주신 가까이 계신 부처님

나의 믿음 나의 다짐

2007-09-19     관리자

십여 년 전, 직장 상사께서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으시길래 '불교'라고 무심히 대답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절에 가서 무엇을 하고 돌아오느냐"고 다시 물으셨다.
"절도 하고 스님 설법도 듣고 돌아오죠."라는 나에게,
"절에 가서 한 가지만 열심히 기도하고 오라."고 말씀해 주셨다.
"…?"
"나에게 욕심을 갖지 말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말과 함께.
무슨 말씀인가 하여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내게 그분은 그 한마디를 무슨 물건처 럼 던져 놓으시곤 자리를 뜨셨다.
얼마가 지난 다음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신혼 단꿈에 흠뻑 젖은 채 행복한 나날을 지냈고, 바늘구멍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오고 빗물받이 통이 식기의 숫자보다 많은 가난한 단칸살이에 서 벗어나기 위해 오로지 돈 버는 일에만 온 정신이 팔려 몇 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 분의 말씀은 내 생활의 아무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아이들은 친정에 맡기고, 남편은 남편 대로 나는 나대로 오직 돈만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도 잠시, 문득 그 옛날의 이야기가 나의 뒷덜미를 놓지 않는 무슨 보이지 않는 손 처럼 내 생각의 끝을 집요하게 잡고 늘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른바 '화두(話頭)'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화두를 깨우치지 않으면 평생을 고민 속에서 괴로워해야만 할 것 같았다.
영업 관계로 알게 된 어느 식당주인에게 빌려 준 돈을 떼이게 된 일이 발생했다. 당시 우리 형편으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오랜 법정 투쟁 끝에 거의 되찾을 수 있었지만 그 일은 우리 가정의 평화를 근본적으로 깨뜨린 결과를 가져 왔다. 그 후에도 그런 유사한 일은 또 있었다.
결국 나는 타인에 대한 불신(不信)이라는 무서운 마음의 병을 얻게 되었다. 선의(善意)가 악 의(惡意)로 되갚음 될 때의 배신감은 나를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려 오랜 시간을 고통스럽게 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그때 문득 떠오른 생각 이 바로 '욕심을 버리라'는 말씀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드나들기 시작한 절에서도 얻지 못 한 깨우침을 결국 가까이 있었던 한 '범인(凡人)'으로부터 얻게 된 것이었다.
그 분이 바로 부처님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가까이 계시는 나의 부처님. 결국 난 모든 것이 나의 욕심으로부터 생겨났음을 질책하기 시작했고 남을 용서하 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가정의 평화는 다시 우리 곁에 돌아왔다. 마음의 평화는 바로 거 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난 무엇을 하러 절엘 다녔고, 어찌 불교신자라고 감히 떠벌리며 다닐 수 있었단 말인가. 이토록 소중한 생활 법문을 그동안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단 말인가? 아니 다. 마음이 거기에 있지 않으면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하고,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또한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는 진리를 그저 남의 이야기처럼 지나쳤을 뿐이었음을 나중에야 깨닫 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드나들기 시작한 절은 기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재미 때문이 었음을 새삼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젊은 불자들의 모임인 '신우회 활동' 역시 건성이었지 않았을까?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반성하기 시작했고,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 기로 마음먹었다.
매월 첫주 일요일은 신우회 주관하에 법회를 진행하고 있다. 이제 새삼 깨닫는 마음으로 활 동을 하다 보니 무언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처님의 가르침을 조금씩 알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부처님 법이란 나 혼자만 절에 가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게 됐다. 나 혼자만 부처님 법을 배우면 뭐하고 나 혼자만 행복해지면 뭐하겠는가? 위로는 부처님을 모실 줄 알고 아래로는 많은 사람들을 포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상구보 리 하화중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 끝에 주위 사람들과 함께 참여하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주지스님과 신도 회장님을 뵙고 상의 끝에 우리 절에 합창단을 만들기 로 했다.
각자 역할을 분담해서 지휘자 선생님은 내가 책임지고 찾아 모셔 오기로 했는데 그리 쉽지 만은 않았다. 어려움은 다른 법우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이기고 마침내 불교합창단을 창단했다. 처음 십여 명에서 출발해 지금은 팔십 명에 이르는 불자들이 노래 로 공양을 올리고 보시를 하고 있다.
지난 사월에는 창단 공연을 열어 관객이 천여 명을 넘는 아주 성공적인 공연을 치르기도 했 다. 또한 오는 팔월에는 중국합주단과 함께 탑동 해변 공연장에서 열리는 국제 관악제에 함 께 공연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이든 소유하려고만 했던 욕심을 버리면서 부터 일구어 낸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절에 가서 관세음보살을 한없이 외고, 끊임없이 금강 경을 읽고 하면 세속의 모든 욕심에서 태연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다. 그러고 나면 신기하리 만치 마음이 편해지며 모든 일도 자연스레 잘 풀리는 것이었다. 문득 떠오르는 일 한 가지가 있다. 가까이 지내는 불자 한 분이 법회 참석을 안 하길래 이 유를 물어보니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법회 참석을 여 러 차례 권유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분이 차사고를 냈다는 소식을 듣게 되 었다. 나는 그분에게 나의 경우를 얘기했다.
"차량 여섯 대를 운행하는 지난 십년 동안 아직 한 번도 사고가 없었습니다. 열심히 법회에 도 참석하고 불법을 지키려고 늘 애를 쓰다보니 마음이 참으로 편해지더군요. 이런 마음을 갖고 일을 하니까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어 하는 일마다 잘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과연 부 처님의 공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꼭 나의 이야기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분은 이후 성실하게 법회에 참석하며 불공 을 드렸는데 마음도 한결 편하고 모든 일이 잘 풀린다며 아주 행복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생활해 나가는 그 자체가 불법(佛法)이고 우리 일상생활 속에 불법이 없는 곳이 없 다고 생각한다. 성 안내고 웃는 얼굴, 부드러운 말 한 마디, 자비심을 베풀어 남을 돕는 일, 욕심을 버리는 일, 모든 행동 한 가지 한 가지가 공덕(功德)짓는 길이 아닌가 한다.
어느 일요일 법회 땐가 주지 스님의 설법 중 "절에 오실 때는 마음만 가지고 오십시오. 빈 손으로 오십시오."라고 말씀한 것이 생각난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는 말씀으 로 들었다. 가진 자는 늘 남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은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얼핏 생각하면 모순된 말이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참으로 깊은 뜻이 있 는 말이다. 내 양 손에 무언가가 쥐어져 있다면 남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손에 쥐어 진 것이 없는 사람은 그 대신 남을 도울 수 있는 손이 있다는 말이다. 마음도 그러하지 않 을까? 고민스러운 일, 자랑할 일이 많으면 누군가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마음속에 무언가 가득 들어 있는 사람은 자신의 것조차 감당하지 못해 남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없 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법구경』에서는 이를 심위법본(心爲法本)이라는 말로 쓰고 있다. 마음의 근본은 마음이라 는 뜻일 것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어도 없는 듯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것 이 곧 마음의 욕심을 버리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주지스님의 그 '마음'이란 가난한 마음이 아닐까? 마음이 가난하면 남을 도울 수 있고 남을 돕는 것은 곧 거룩한 부처님의 뜻 이기도 할 터이니 말이다.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항상 남을 돕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자아를 실현하는 길이 기도 할 뿐만 아니라 진정한 불국토(佛國土)를 이루는 길이라 생각한다. '탐진치(貪瞋癡)'를 모두 버리고 마음 속에 일고 꺼지고 하는 마음 다스리기를 잘 해야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리 라는 생각이다.
'자유로움'을 찾아 평생을 보낸 어느 스님의, '자유스럽고자 하는 마음마저 버리고 나니 비 로소 자유스러워지더라'는 말씀이 새삼 생각난다. 버린다는 것은 욕심을 없앤다는 것이니 욕심을 갖지 않는 것이야말로 지난 직장의 상사분을 통해 나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려 해 주 신 부처님의 뜻이 아닌가 다시금 생각해 본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나현정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