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寺의 향기] 호국의 얼이 담긴 경주 분황사

古寺의 향기

2007-09-18     관리자


  위치와 창건배경

 우리 정신의 고도(古都) 서라벌을 찾아 신라인의 혼을 만나고자 우리는 길을 떠난다. 우선 첫걸음을 분황사로 옮긴다.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넓은 평지에 자리한 분황사는 1300여 년 전 신라 27대 선덕여왕 3년(634년) 1월에 국가의 시주로 창건하고, 자장율사(慈藏律師) 를 주석(住錫) 케 하였다. 신라 최대의 호국사찰이었던 황룡사(皇龍寺) 근처에 선덕여왕은 왜 사찰을 창건하고 자장율사를 머물게 하였을까 ? 분황사의 창건동기를 그때의 시대상황을 생각하며 더듬어 본다.

 당시 신라의 정세는 안팎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였다. 26대 진평왕은 선덕여왕의 부왕(父王) 이었다. 진평왕 자신은 원광법사(圓光法師) 가 있어 황룡사에서 인왕호국 반야심경을 설하고 백고좌회(百高座會) 를 여는 등 국민에게 호국이념을 심어주고 민심을 부처님 법으로 한마음이 되게 하며, 또한 가르침을 받으면서 무난히 국난을 극복하여 왔지만 자신이 죽은 후의 나라 장래를 생각하니 그렇게 밝지만은 않은 상황이었다.

  왕실에는 성골(聖骨) 출신의 남자가 없어 자연히 딸에게 왕위를 물려줘야 하는데, 왕권유지의 불안정한 상태와 밖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빈번한 출입을 극복하는데 있어 이제는 연로한 원광법사에게 의지할수가 없었다. 그나마 믿고있던 진골(眞骨) 인 소판(蘇判) 벼슬의 김무림(金茂林) 이 죽고 그의 아들 선종(善宗) 에게 기대를 가졌으나 그 마저 출가하여 자장(慈藏) 이라는 법호를 받으니 진평왕의 낙담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왕은 자장율사에게 대보(臺輔) 라는 벼슬을 내리고 나라의 미래를 대비하고자 하였으나 왕의 왕권에도 한사코 출가자로서 계(戒) 를 지키겠다는 자장율사의 의지를 꺾지 못하였다.

 그후 진평왕은 죽고 그의 딸이 왕위에 오르니 선덕여왕이다. 여왕은 옛날 부왕(父王) 의 뜻을 받들고 자신의 호국의지를 나타내는 원찰인 분황사를 원광법사가 있는 황룡사 근처에 창건하고 자장율사를 가까이 모시고, 가르침을 받으려는 뜻이 사찰 창건의 동기가 아니었을까 한다.

  분황사와 원효대사 약전

 분황사가 창건된지 3년 후 자장율사는 당나라로 구법(求法0의 길을 떠났지만, 이 무렵(7 세기) 신라는 한창 불교가 융성하여 원광, 자광, 원효, 의상대사등 많은 고승 대덕이 출현하여 신라인에게 호국 이념을 심어 주고 정신적 구심이 되어 신라가 삼국통일의 기초를 이루고 마침내 통일을 완성한 때이다. 원효대사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와 황룡사에 호국 9층탑을 세운 이듬해, 646년 29세의 화랑으로 황룡사에 출가하였다.

 그후 당나라로 의상대사와 구법(求法) 의 길을 떠났지만 도중에 당항성(當項城 ; 南陽) 근처의 어느 고분(古墳) 에서 대오(大悟) 하여 당나라 로의 구법이 필요치 않아 되돌아왔다. 원효대사는 한때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 를 썼고, 계, 정, 혜(戒定慧) 삼학(三學) 의 수행을 쌓았으며 때로는 전국을 누비며 대중포교에 전력했고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중 요석공주와 만나 설총(薛聰) 을 낳은 이야기는 지금도 세간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원효대사가 입적한 후, 그의 아들인 설총은 그의 유해를 화장한 후 잘게 부수어 진용 (眞容) 을 소상(塑像) 으로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슬퍼하였는데, 어느날 설총이 예배할 때 소상이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다. 이 때부터 돌아보았다 하여 고상(顧像) 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 원효대사의 고상은 고려때 까지 분황사에 있었다고 하는데 어느 때 없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전해오는 전설

 분황사의 경내에 신라 때의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38대 원성왕 11년 (795) 이 우물에는 3마리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당나라 사신이 이 호국 용을 물고기로 변신시켜 몰래 훔쳐 갔다. 그날밤 왕의 꿈에 세여인이 나타나 " 우리의 남편을 속히 구해 주소서 " 하는지라, 왕은 이 사실을 알고 대노하여 급히 사신을 추적하여 빼앗아 우물에 다시 넣었다 한다. 이 때부터 이 우물 이름은 삼용변어정 (三龍變魚井) 이라 하였다 한다.

  이 우물은 와곽 바탕은 4각으로 사홍서원을, 우물 모양은 외부는 8각으로 팔정도를, 내부는 원(圓) 으로 일원상 (一圓相 ) 을 나타내고 있다. 또 경덕왕 대(代 ) 에 지은 도천수관음가 (禱千手觀音歌 ) 인 향가 (鄕歌 ) 가 분황사에서 비롯되어 전해오고 있다. 한기리 (漢岐里) 에 사는 희명 (希明 ) 이라는 여인의 아이는 태어난지 5년 후에 눈이 멀었다고 한다. 다급한 어머니는 분황사 법당의 벽에 그려진 천수관음보살상 앞에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지성으로 기도를 올리니 아이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무릎을 곧추며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비옴을 두나이다.

천손 천눈을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더옵길

둘 없는 내라, 하나만으로 그윽히 고칠 것이다.

아아 나에게 끼쳐 주시면 놓되, 쓸 자비여 얼마나 클고

  무심한 역사의 변천

 오늘날 분황사의 경내는 저 때의 웅장한 대가람의 초석들이 즐비한채, 저 때의 가람에 비하면 초라하기만 하다. 금당 (金堂 ) 터인 대숲에는 개구리들만 제 철을 만난듯 한가롭게 먹이를 찾고 있다. 신라 경덕왕 14년 (775년 ) 에 구리 30만6천7백근의 약사여래동상은 역사의 뒤안길에 자취를 감추고, 국보 30호인 석탑마저 본래의 7층에서 3층으로 변모하고, 산문 밖 당간 지주와 함께 지나간 신라의 호국도량이었던 점을 말없이 대변해 주는 듯하다.

 " 역사적인 사적지라 하여 중건, 중수는 감히 생각지도 못합니다. 무심히 지나치는 관광객의 관광으로만 끝나고 마는 것이 오늘의 사찰의 현실입니다. " 주지 법마스님의 의미있는 말이 탐방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마침 한 대의 관광버스가 사람들을 풀어 놓자, 탑 한바퀴를 휘 둘러보고 떠나는 모습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며 가고 있을까 생각해 본다. 분명히 우리의 모두는 저 때의 선조 (先祖 ) 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것이 아닌가, 정신의 선조, 문화의 선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