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열고…

보현행자의 목소리

2007-09-18     관리자

성덕 바우만 군의 애기를 모르는 국민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어릴 때 한국에서 미국 가정으 로 입양된 그는 양부모 밑에서도 건강하게 자라 미 공군에 입대했으며, 파일럿을 꿈꾸던 유 망한 청년이었다.
그가 불치의 병인 백혈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미국 시민과 한국에 알려졌고 그를 돕고자 하 는 운동이 다각도로 전개되었다.
언론 등을 통해 그의 사연을 접한 사람 모두는 그가 무사히 골수를 기증 받고 전처럼 건강 한 청년으로 되돌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야무져 보이는 그 동양청년 은 또 그처럼 예쁘게도 생겼던지.
그와 관련된 보도를 보면서 우리가 감명을 받았던 또 다른 부분은 그의 양부모를 포함한 가 족들에 대해서다.
성덕 군의 양부모는 성덕 군이 아니어도 자녀들이 있었고 그 형제들 역시 성덕 군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가족들의 성덕 군에 대한 애정은 친 혈육 이상이었다.
생계마저 철폐하다시피 하며 오로지 성덕 군을 살리고자 모든 노력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양아들에게 닥친 불행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리곤 하던 그 어머니와 그리고 누나, 그들 의 절실함이 예사로 봐넘겨지지가 않았다.
물론 남의 아이를 입양한 미국의 모든 양부모들이 성덕 군의 부모나 그 장교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양부모의 학대를 참다 못해 일찌감치 가출해버려 국제 고아가 되는 불행한 경우도 우리는 많이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서구의 여러 가정에서는 자기의 자녀들이 여럿임에도 불구하고 동양의 다른 아 이들을 입양해서 친 자녀 이상으로 돌보는 예 또한 자주 본다.
솔직히 우리의 가치관과 상식으로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아닌가? 내가 어릴 때 자라 던 동네에 아들을 두지 못한 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구 부부는 아직 돌이 안 된 남자이기를 데려왔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아 이를 데려다 키운다는 것이 남부끄러웠던지 그 아이를 남편이 다른 곳에서 낳아 왔다고 했 지만 동네사람들은 그 말을 밎지 않았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아이를 데려온 지 겨우 일 년이 조금 넘어 사십이 넘은 그 부 인이 임신을 했고 곧이어 아들을 출산했다. 그 때부터 데려 온 아이는 당연한 듯 관심 밖으 로 밀려났다.
그 집의 기운이 좋지 않았던지 그 두부부가 오십을 전후해서 모두 세상을 떠버렸고, 그 집 의 형제들은 어려서 얼마 동안이나마 함께 자랐던 그 데려온 남동생과는 지금도 연락도 되 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의 부모가 살았더라면 연락정도야 하고 살지 모르지만 이미 자기의 친 아들을 둔 그 부 부에게 데려온 아들은 별 의미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된다. 왜 그럴까? 왜 우리의 사회적 가 치관은 반드시 핏줄이어야만 한다는 관념으로 고정되어 있을까? 나는 인류학자가 아니니 그 본질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 오랜 유교적 문화에 그 바탕을 두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양반과 상인의 엄격한 구별, 혈통과 가문의 중시, 양반의 혈통을 이어받은 신성한 가문에서 어떻게 근본도 모르는 다른 핏줄을 데려와 한 가족으로 끌어 안을 것인가.
그래서 우리의 선조대에는 물론 현재에도 씨앗을 보았으면 보았지 남이 아이를 입양시킬 마 음을 갖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혹여 피치 못해 자녀를 입양시킨 경우라도 저 애는 내 가 낳은 자식이 아니지 하는 의식을 버리지 못하니, 그런 양부모의 심리가 또 그 아이에게 전달되지 않을 리가 없다.
부모 된 자신들이 마음을 활짝 열지 못하면서, 내가 낳지 않은 자식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 다고 푸념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모든 인간의 피는 붉다.
어느 사람은 운이 좋아 좋은 집안에 태어나고 어느 사람은 그렇지 못해 날 때부터 천하게 취급받는다.
단지 태어남의 차이일 뿐인데… 핏줄을 중시하는 결과로 파생되는 문제가 내 가족 내 가문 우선주의, 그것이 곧 지역이기주의로까지 발전하는 것 아니겠는가. 마음을 열고 깨인 시각으 로 세상을 본다면, 또는 세상을 이끌어 안으려는 포용력을 키운다면 고아수출 일위라는 수 치가 조금은 낮아지지 않을까? 이건 다른 애기로, 얼마 전, 고향에서 이웃으로 가깝게 지내던 댁 따님의 결혼식에 참석했었 다. 그 댁도 유교의 가풍을 이어가던 집안이라 신랑감이 신학대학생이어서 반대가 극심했던 모양이었다.
종교문제라고까지 할 수도 없는 것이, 그저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딸을 줄 수가 없다는 어찌보면 단순하기 그지없는 논리일 뿐이었다.
며느리를 데려오는 것도 아니고 딸을 시집보내는 것인데 그렇듯 사생결단 반대할 일이 무엇 인가. 예수 믿는 사람은 강도라도 된단 말인가? 더구나 자기 딸도 예수를 믿고 있는데 말이 다.
신부의 고모 되는 사람이 말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고 해서 처음엔 싫어했는데 겪어보 니 사람이 너무 착해 마음이 풀리더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결혼에서 유교집안과 기독교 집안이 서로 문을 연 것처럼 자 기와 다른 것, 다른 가치관, 다른 논리에 대한 자기의 폐쇄성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자각하 고, 그와 함께 타문화에 대한 배타적인 고정관념에서 깨어나는 계기가 사람들에게 많이 주 어졌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인류는 평등하며, 따라서 모두 감싸 안아야 할 우리의 이웃임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고.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문미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