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상담실] 용의 눈물

열린 상담실

2007-09-18     관리자

얼마 전에 KBS 방송국에 녹화를 하기 위해 갔던 적이 있다. 스튜디오 앞을 지나는데 낯익 은 얼굴의 탤런트들이 궁중복을 입은 채 서성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사극을 촬영하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까 바로 '용의 눈물'이라는 태조 이성계의 생애에 대한 드라마를 촬영하고 있는 중이었다.

젊은 시절의 이성계는 정말 뛰어난 장수였다. 그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하였지만 단 한 번도 패배 하지 않았던 맹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용감하고 무서울 것이 없었던 그였지만 그의 말년 은 눈물이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상심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난 여섯 아들과 두 번째 부인 사이에서 난 두 아들 사이의 처참한 골육상쟁의 현장을 목격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 던 두 아들이 배다른 형인 이방원(태종)의 손에 끔찍하게 죽였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첫 부인 소생의 여섯 아들 사이에서도 왕권을 둘러싼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던 것이다.

여기에서 권력의 무상함에 염증을 느낀 태조는 스스로 왕위를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리고 함 흥의 깊은 산골로 들어가 버렸다. 이 때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의 화를 풀기 위하여 문안사절을 여러 차례 함흥으로 보냈지만, 화가 난 태조가 그들을 모두 죽여버리는 바람에 '함흥차사'라는 유명한 고사성어까지 생겼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훑어보면 왕권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사화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세자로 책봉이 된다는 것은 까딱하면 자신의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인 경우도 많 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두들 그토록 황이 되기를 염원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마디로 말해서 부처님께서 지적하신 인간의 다섯 가지 욕망(財·食·色·名譽·睡眠慾)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옷, 좋은 집에 살면서 권력과 예 쁜 여자를 마음대로 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쳐가면서 왕이 되려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조선시대의 왕들을 살펴보면 단명한 왕들이 많은데, 그 이유로 여색(女色)을 너무 밝 혔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왕권을 둘러싼 비극의 원인이 너무 많은 배다른 자식을 두었기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정실의 왕비가 아닌 후궁에서 난 자식이 왕세자로 책봉이 된 경우는 그를 둘러싼 세력 들 간의 암투가 눈에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었다. 태조의 아들들뿐만 아니라 연산군이나 광해군, 그리고 사도세자도 같은 경우로 그 밑바탕에는 이러한 갈등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이제 세월이 바뀌어서 일부일처제의 사회가 되었지만 지금도 비슷한 문제가 여전히 존재하 는 것 같다.

얼마 전에 어느 재벌회사의 후계자가 자녀문제 때문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무 일푼에서 시작하여 오늘날의 엄청난 부(富)를 이루었는데,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친에게 엄 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었다. 그의 부친은 후계자인 아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했던지 아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너무 가혹하게 벌을 주기도 하였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깜깜한 광 안에 하루종일 아무 것도 주지 않고 가두 어 두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이런 부모에 대한 화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의 젊은 시 절은 매우 방탕하였고 여자관계가 복잡했다. 그래서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였는데, 이번에도 자신의 딸과 몇 살 차이 나지 않은 빼어난 미모의 아가씨와의 재혼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 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전처소생의 아이들이 하나같이 가출을 일삼을 뿐만 아니라, 술과 마 약에 탐닉을 하고 무분별한 이성관계를 가져서 그의 속을 상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필자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가 회고하는 지난날은 모든 물질적인 풍요가 갖추어졌었지만, 외롭고 불 행하기 짝이 없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그 외로움을 주로 아름다운 여인들과의 관계로 위로 받으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사랑한 여인들은 한결 같이 그 자신보다는 그가 가진 재산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눈물을 훔치면서 지난날을 후회하는 이 후계자에게서 문득 '용의 눈물'을 흘리는 말년 의 이성계를 떠올렸다. 그토록 숭유억불정책을 써서 불교를 탄압했던 이성계가 말년에 귀의 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부처님의 품안이었던 것이다.

무학대사의 간청으로 한양으로 돌아온 태조는 덕안전이라는 정사를 새로 지어 염불삼매로 참회의 나날을 지내다가 74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다가오는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옛날부터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했다. 가정이 화목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욕망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색욕 (色慾)이야말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욕망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원각경』에서 음탕심이야말로 윤회의 근본원인이라고 설하시지 않았 던가. 남편이나 아내의 부정은 바로 독화살처럼 자신의 자식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문미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