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불교] 스리랑카 불교(1)

세계의 불교

2007-09-18     관리자

가산불교문화연구원 개원 6주년 기념, 조계종 교육원 개원 3주년 기념으로 공동주최한 '열 린 세계에 있어서 세계 승가공동체의 현황과 전망'이란 제하의 학술회의 자료집에서 양해를 얻어 '스리랑카 승가의 교학체계와 수행체계 조사 연구(일중 스님)'를 발췌 초록, 2회로 나 누어 싣는다. 특히 스리랑카 불교 약사(略史)와 현대 스리랑카 승가의 교학 체계와 수행체계 를 간략하게나마 게재하여 스리랑카 불교의 교학전통과 수행전통을 조망함으로써 한국불교 의 정체성을 찾고, 불교의 보편적 진리로써 미래세계를 열어나가고자 한다. -편집자 주-

인도의 최남단 인도양 한가운데 자리한 섬나라 스리랑카는 상좌부 혹은 남방불교권 내에서 교학 전통으로 널리 알려진 나라이다. 예로부터 법(法)의 섬이라 불려진 스리랑카에서 불교 역사는 곧 이 나라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는 이 나라의 교육 문화 정치 전반에 관여해 왔기 때문에 민족, 나라, 불교 셋을 동일시하려는 국민들의 특수한 세계관이 형성되 어 2,300여 년 동안 지속되어왔다. 스리랑카 불교는 미얀마의 수행전통이나 태국의 계율전통 과 확연히 구분되는 교학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기원전 3세기 데와남삐야띳사 왕 때 불교를 처음 받아들인 스리랑카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급속하게 발전시켰다. 대사(大寺)를 중심으로 비구 교단이 설립되었고, 6개월 후 마힌다 장 로의 누이동생인 상가밋따 장로니에 의해 비구니 교단도 형성되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출가하였고, 각 마을마다 사원들이 건립되는 등 빠르게 불교가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인도의 아쇼카 왕과 데와님삐야띳사 왕과의 유대관계, 마힌다 장로의 헌신적인 노력과 뛰어난 능력, 상가미타 비구니의 봉사, 왕의 절대적 후원과 귀족과 국민들이 일체가 되어 불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불교 전래 이후 바로 불교는 국교가 되었고, 왕은 승가의 최고 후원자가 되었다. 승가는 왕 이 정치를 잘 할 수 있도록 조언했으며 백성들을 가르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한 전통은 면면이 계승되어 10세기에 와서는 오직 덕행 있는 보디사트바만이 스리랑카에서 왕이 될 수 있었으며, 왕이 되기 위해서는 승가로부터 인가를 받아야만 하는 관례가 생겼다.
스리랑카 고대사 중에서 가장 훌륭한 영웅으로 추앙받는 듯타가마니 왕 시대(10∼77 B.C.) 에 불교가 가장 번성했다. 당시 타밀 왕에게 오랫동안 왕권을 빼앗겼던 둣타가마니 왕은 " 나는 왕국을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교를 뒤찾기 위해서 전쟁을 한다."라는 이념을 내세 웠고, 짧은 기간 안에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만큼 스리랑카에서 불교는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구심체 역할을 했고, 정신적인 지주였다.
기원전 1세기 왓따가마니 아바야왕 시대는 타밀인의 침략과 전쟁, 가뭄, 기근, 힌두교도의 반란 등 재난이 연이어 발생하여 수만의 승려들이 기아로 죽어갔고, 왕국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대사(大寺)와 대탑(大塔)은 황폐해졌다.
이때 경장(經藏) 소부(小部)의 대의석(大義釋)은 거의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었는데 역사서에 의하면 "앉아 있을 힘조차 없을 때 머리를 모래 위에 얹은 채 누워서도 계속 암송을 했다." 고 한다.
이렇게 빨리삼장과 주석서들을 가까스로 보전한 스리랑카는 왓따가마니왕이 왕권을 되찾았 을 때 대사(大寺)와 무외산사(無畏山寺)로 나뉘는 승가의 첫 분열이 있었다.
또한 이때 시로운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교단의 근본이 교학인가, 아니면 수행인가"라는 주 제로 열린 회의에서 삼장을 배우고 연구하는 것이 교단의 존속을 위해 더 중요하다는 것으 로 결론이 났고, 이후 교학을 중시하는 풍토가 정착되었다.
기원전 1세기에는 구전으로만 전해 내려오던 빨리 경·율·론 삼장과 싱할리어로 구성되어 있던 주석서들이 최초로 문자화되는 중대한 불사가 있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존속되어 오고 있는 빨리 삼장의 모태로서 어떤 재난이 닥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잃지 않고 후대에 전승시키겠다는 상좌부 승려들의 호법의지의 일환이었다.
정통상좌부를 주장하던 대사(大寺)에 비해 무외산사(無畏山寺)는 대승불교사상을 받아들이 는 등 늘 새로운 불교사상을 과감하게 수용하는 자세를 취했으며, 매우 대중적이고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대승불교의 유입과 함께 산스크리트어가 소개되고, 다양한 학문이 들어와 승려들은 명상 수 행보다 경전 연구를 더 선호하게 되었으며, 예전과 달리 승려들은 학문을 통해 점성술과 의 술을 베풀기도 하였다.
어쨌든 기원전 1세기부터 5세기 무렵까지 스리랑카의 불교는 교학연구 활동이 융성하던 시 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6세기 이후부터는 교단을 지원할 만큼 강력한 왕들이 없었고 교 단도 침체해가다가 10세기 촐라 국의 침입으로 무너지면서 비구니 교단은 완전히 사라지고 비구 교단도 아주 쇠퇴해졌다.
아누라다뿌라 왕국이 촐라 국의 침략으로 무너진 뒤 뽈론나루와에 새 왕국을 건설한 위자야 바후 1세(1070-1110)는 불교를 부흥시키기 위해 교단을 새로이 정비하고 많은 사원을 지었 으며 학문을 장려했다. 그 뒤를 이은 빠라끄라마바후 왕은 3개 종파의 승려들을 대사(大寺) 정통파로 단일 통합시켰으며, 적극 지원하여 승가를 활성화시켰다. 11세기부터 15세기까지는 불교의 문예부흥으로 불려질 정도로 뛰어난 사원교육체계와 활발한 교육활동으로 학승들이 많이 배출되어 불교 저술활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불교부흥으로 스리랑카 승가의 명성고 주변의 상좌부 불교국가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미얀마에서는 사절단을 보내 스리랑카 불교의 구족계전통을 수입하였고, 이후 이 계맥은 다시 태국에 전해졌다.
이때 많은 스리랑카의 불교서적들이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로 전해졌으며, 스리랑카의 대사 파(大寺派)가 이 나라들에 설립되었다. 이때 전해준 문헌과 구족계맥 덕분에 훗날 스리랑카 에서 계맥이 끊어지고 문헌이 소실되었을 때 다시 태국과 미얀마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었 다.
한편 저술활동과 교육이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교단은 또다시 쇠퇴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으로는 혼란한 시기가 반복되고 승가 내부에서는 수행실천과 거리가 있는 학문 속으로 점점 침잠해갔고, 당시 계율의 준수나 명상 수행은 중요시 여겨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승 가의 세속화 경향은 힌두교의 영향에 의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특히 인도 칼링가 지방의 마가라고 불리는 세력으로부터 침략을 받으면서 불교의 교세는 더 욱 악화되었다. 「쭐라왕사」에 의하면 마가의 군대는 불탑과 사원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했고, 재가불자와 승가를 박해했으며, 수많은 불교서적을 모조리 불태웠다. 이와 같이 마가가 불교를 박해한 것은 국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불교세를 약화시키는 것이 자기들의 침략과 통치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가 세력에 의해 뽈론나루와 왕조는 막을 내리고, 담바데니아 시대의 파라크라마 바후 6세 사후에는 나라가 꼿떼, 시따와까, 캔디의 세 왕조로 나뉘어져 서로간에 끊임없는 전쟁으로 나라가 매우 혼란해졌고, 꼿떼 왕조가 포르투갈인에게 원조를 요청함으로써 포르투갈은 스 리랑카에서 자유무역의 권한과 정치적인 힘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침체되어가던 불교교단의 교세는 16세기 서양세력이 밀려들면서 더욱 약해졌다. 포르투갈인 의 주요과제는 카톨릭을 전파하는 것이었고, 꼿떼 왕국의 왕은 카톨릭교로 개종, 왕궁을 카 톨릭에 헌납하기도 했다.
1594년부터 1658년까지 해안지역 일대가 포르투갈의 통치하에 들어감으로써 각 사원의 수입 은 카톨릭 전도사업을 위해 쓰여졌고, 사원 도서관은 불태워졌으며 승려들은 살해되기도 했 다. 이처럼 포르투갈이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 결과 불교는 급격하게 쇠퇴해갔다.
그 당시 존속하고 있었던 캔디 왕국에서는 역대 왕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불교 전통의 명맥 이 유지되고 있었는데 힌두교도로 전향한 라자싱하 왕이 많은 승려들을 처형하고 사원을 파 괴, 불교서적을 불태움으로써 불교가 매우 쇠퇴해졌다.
1721년에는 정식 구족계를 받은 비구승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으며, 이 당시 사원에는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가닌난세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처와 자식 을 부양하면서 세속의 쾌락을 누리고 있다. 점성술, 약사 등의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촐라 왕사」의 저술처럼 일반인에게 좋은 평을 받고 있지는 않았어도 비구승단이 없었기 때문에 왕과 재가자들로부터 땅과 공양물을 받았으며, 사원의 재산을 상속하기 위해서 자식 이나 친척들을 승려로 만들었다.
이 때 사라난카라라고 하는 스님이 비구 승가의 복원과 진흥을 위해 스스로 불법과 계율, 수행에 필요한 여러 직식을 익히고 불교 본연의 순수함으로 돌아가자는 이념을 표방한 승려 결사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스님은 미얀마와 태국 등 다른 상좌부 국가의 승가로부터 비구 계의 계맥을 이어 와서 1753년 우빨리 장로를 위시한 태국 승려들로부터 사라난카라 스님을 비롯한 스리랑카 사미승들이 구족계를 받음으로써 스리랑카의 비구 승가가 복원됨과 아울러 현대 스리랑카 불교의 가장 큰 종파인 시암종이 창종되었다.
스리랑카의 근대사는 외세의 침입으로 얼룩졌고, 불교 역시 침체 일로에 있었다. 1852년에는 영국의 통치가 시작되었는데 영국의 식민통치당국은 기독교 전도사들의 교육과 전도사업에 최대한 후원하였다. 미션스쿨을 통해 불교를 비판하고, 불교를 공략하기 위해 전도사들은 불 교를 연구, 심지어 사원의 행사에 전도사들이 들어와서 법회를 방해했다.
19세기 말엽은 불교도와 기독교도 사이에 종교적 논쟁이 가열되었는데, 미션스쿨에서 교육 받은 뒤 출가한 모홋띠왓떼 구나난다 스님은 불교교세가 땅에 떨어진 시기에 천주교 사제들 과의 공개논쟁에서 천주교측의 궤변에 명쾌하게 답변하였고, 오히려 불교의 교의와 원리를 깨닫게 해주었다.
세 번에 걸틴 공개논쟁에서의 불교의 승리는 불교도로 하여금 불교에 대한 자긍심을 일깨워 준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고, 불교의 명예를 되찾은 이 운동은 바로 스리랑카 독입운동에 큰 불을 붙여준 계기가 되었다.
이 논쟁의 보도를 접한 러시아의 블라봐츠키(神智學會) 여사와 미국인 올코트 대령의 방문 은 스리랑카 불교에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올코트 대령과 다르마빨라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불교학교들이 속속 설립되기 시작했고, 어 린 불자들을 불교학교에서 교육시키기 시작했다. 이 때 현대 스리랑카 불교 사원 교육의 효 시가 된 두 개의 삐리웨나가 설립되었는데 승려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교육을 받은 이 두 삐 리웨나의 명성은 외국의 여러 나라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1948년 130년이라는 영국 식민지 통치로부터 독립을 한 스리랑카는 불교의 중요성을 인식하 고 국교로 제정, 문화성에서 불교 업무를 담당하여 일요불교학교 개설 등 불교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 계속 -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문미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