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무게

스님의 그늘 / 금오(金烏)스님

2007-09-18     관리자

옛말에 "비 맞은 중"이라는 말이 있다. 비를 맞아서 행색(行色)이 추레한 것을 두고 하는 말 이다. 한편, 스님은 산에 살고 산에 살기 때문에 산길을 다니는 것은 예삿일이고 산길을 가 다가 비를 만나면 오는 비를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으니 스님이 비를 맞는 것 또한 예삿일 이므로 사람이 예사로 당하는 일을 두고서도 이 말을 쓴다.
그런데 이 말과 비숫하기는 해도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이는 말로 '비맞은 용대기(龍大旗)'라 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성깔이 드세고 풋풋하던 사람이 비를 맞고서 축 늘어진 깃발과 같이 풀이 죽어 있는 모양을 두고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두 말은 전혀 다른데 사람들은 흔히 이 두 말을 같은 뜻으로 쓴다. 이것은 잘 못이다. 축 늘어진 용대기는 측은한 생각을 하게 하는 데 비해서 스님의 행색이 추레한 것 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출가하여 세속을 떠난 스님은 겉치레에 관심을 두기 않는다 는 말도 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해 여름의 내 옷차림새는 늘 비 맞은 꼴이어서 눈쌀을 맞기도 했다. 그 해 여름은 무척 무더웠고 소나기가 잦았다. 그 때, 내가 입고 있는 두루마기서건 옷은 무명 옷이었다. 시골 아낙네가 베틀에 올라앉아서 짠 올이 성긴 무명옷이었다. 지금은 그런 무명 을 찾아볼 수가 없지만 그 때만 해도 흔했다. 많은 스님들은 광목(廣木)이라고 해서 기계로 짠 바탕이 촘촘하고 탄탄한 무명옷을 입거나 여름이면 삼베옷을 입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옷을 입을 복이 없어서 무명옷을 입고 있었는데 비를 맞으면 그 추레한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것도 단벌이어서 벗고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입은 채 말려야 했다. 때로는 조계사 회계를 맡아보는 운영(云榮)스님 방에 가서 숯불 다리미로 다려서 말리기도 했지만 번번이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틀 추레한 모양이 스님의 낯을 깎는다고 눈총도 받았고 심지어는 무슨 개멋이냐는 질타도 들어야 했다.
어느 날 조계사에서 선학원으로 가는 도중에 소나기를 낮아 흠뻑 젖었다. 그때 함께 간 스 님은 효봉 스님을 시봉하는 월타(月陀)스님이었다. 이 스님이 입고 있는 옷은 바탕이 고운 모시옷이었다. 횐 모시에 숯불로 회색 물을 들여 잘 손질을 해서 입고 햇볕에 나가면 그 연 한 회색바탕에서 아지랑이가 일 듯 빛이 났다. 신선이 입는 옷이 있다면 참으로 이런 옷이 아니겠는가 싶으리만큼, 날아갈 듯한 멋을 풍겼다. 이 멋진 옷도 흠뻑 젖었다.
월타 스님은 내 은사이신 금오(金烏)스님의 상좌이다. 흔히 큰스님의 시봉은 상좌나 손주상 좌가 하는 것이 통례인데 이 때는 어떤 까닭인지 월타 스님이 효봉스님 시봉을 했다. 이유 야 어찌되었건 파격이라면 파격이었다. 이 시봉게게 효봉 스님을 깊이 믿고 따르는 신도 가 운데 한 사람인 법련화 보살이 큰스님 시봉을 하느라 고생이 많다며 모시고 두루마기서건 일습을 해주었다고 한다. 지금은 스님들이 기성복을 사 입거나 맞추어 입는다고 하는데 그 때만 해도 절마다 재봉틀을 들여 놓고 보살들이 옷을 지었다. 혹은 특별히 자기 집에서 옷 을 지어서 스님에게 드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각설하고, 나와 월타 스님은 비에 흠뻑 젖어 선학원에 이르러 효봉 스님과 나의 은사스님을 뵈었다. 네 사람이 앉으면 가득 찰 좁은 방에 6, 7인의 스님들이 앉아서 담소를 하고 계셨는 데 나의 추레한 옷차림을 보신 효봉 스님께서 월타 스님을 시켜 광목으로 지은 저고리와 바 지를 내주라 하셨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 그 때는 큰스님에게서 옷을 받으면 그 옷이 비록 법의(法衣), 즉 가사 장삼이 아니더라도 큰 절을 세 번하고서 받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한 관습은 부처님 때로부터 법을 상징하는 의발(衣鉢)을 전하고 받음으로써 법을 이은 사자상승(師資相承)에 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도 그러한 관습은 수행하는 수좌(首座)에게 늘 부처님으로부터 스승과 제자에게 로 이어져 내려온 불법(佛法)을 생각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매우 좋은 관습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한 벌의 옷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법을 전하고 전해 받는 것이라 생각하면 그 속 에 어길 수 없는 교훈이 담겨 있는 것이다. 큰 절을 세 번 하고 받은 옷을 무릎에 올려 놓 고 앉아 있는데 나의 은사스님께서 불쑥, "마삼근(麻三斤, 삼세근)을 아느냐."고 물으셨다.
그때는 불교정화 직후여서 선풍(禪風)이 크게 일어났을 때라 '마삼근'과 같은 화두는 수좌 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으므로 나도 익히 듣고 있었고 선서(禪書)를 통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물으시므로 입이 열리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신 은사스님께서 다시 "마삼근도 모르는 주제에 옷은 어찌 받느냐"하시며 준엄 하게 물으셨다. 그제서야 스님께서 제자인 나를 시험하시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내 머리 속은 내가 가진 온갖 지식을 동원해서 대답할 말을 찾는데 엉뚱하게도 입에서 튀어나온 말 은 "들어서 알고는 있습니다."였다.
아뿔싸! 입에서 말이 떨어지기 전에 나는 이미 후회를 하고 있었다. 스님께서 톤음의 사이 를 두지 않고 "들어서 아는 것은 소용이 없다. 네 스스로 안 것을 말하라."고 다그치셨다.
화두 '마삼근'은 당나라가 멸망한 뒤, 오대(五代)로부터 송(宋)나라 초기를 산 동산 수초(洞山守初, 910∼990)선사가 한 말이다. 이 화두는『벽암록(碧岩錄)』과 『무문관(無門關)』에 실려 있는 대표적 화주 중 하나이다. 그 기록에 의하면 한 운수(雲水)가 동산 수초 선사에게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고 물으니 동산 수초 선사가 '마삼근'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뒤로 이 화두는 수많은 선승(禪僧)들이 참구하는 대표적인 화두가 되었다. 우리 나라 선 가(禪家)에서도 이 '마삼근' 화두는 한때 대단히 유행을 했는데 마삼근이 무어냐고 물으면 ' 세근의 담씨'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선사들이 직관(直觀)에 따라서 하는 말은 그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부질 없는 일이다. 그 러나 문헌에 있는 대로 말하자면 '마삼근'은 마사(麻絲)를 계량(計量)하는 단위(單位)의 기 준이다. 이것은 당(唐)나라의 법전집(法典集)인 대당육전(大唐六典)에 실려 있다. 이것을 운 문 문언(雲門文偃)선사는 그의 어록인 『운문록(雲門錄)』의 유방유록(遊方遺錄)에서 "세 근 의 삼은 한 필의 베이다(三斤麻一疋布)"라고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마삼근은 한 벌의 옷을 만들 수 있는 삼베의 분량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안다 해도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는 물음에 대해 '마삼근'이라고 답한 동 산 수초 선사의 참뜻을 짐작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래서 모르면 모른다 하면 될 것을, 내딴 에는 머리를 굴려 "부처님의 옷 한 벌입니다.."하였다.
나의 이 대답을 들으신 은사스님께서는 혀를 두어 번 차시고 "마삼근은 부처의 무게이니 라."하셨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이 문답을 지켜보신 효봉스님께서 나에게 "금오(金烏)가 바 쁘긴 바쁜가 보다."하셨다.
이 말은 동산 수초 선사의 마삼근에 대하여 그의 법형제(法兄第)인 설두 중현(雪竇重顯)선 사가 "금오(金烏, 해)는 급하고 옥토(玉 , 달)는 빠르다(金烏急玉 速)"고 한 송(頌)을 그대 로 인용한 것이다.
송이란 일종의 코멘트라고 할 수 있다. 효봉 스님은 설두 중현 선사의 마삼근에 대한 코멘 트를 인용하여 내 은사스님과 빠른 세월을 동시에 거론함으로써 나로 하여금 나에 대한 은 사스님의 노파심을 깨닫게 하고자 하셨다. 그러나 그것을 깨달은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참 으로 세월은 빠르다는 엄연한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문미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