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불교] 21세기의 불교 미국불교

세계의 불교

2007-09-18     관리자

뉴욕 퀸즈에 자리잡고 있는 조계사는 명칭이 거창한 조계사일뿐 주택가의 작은 집을 세내어 사찰로 사용하고 사용하고 있는 전형적인 미국 교포절이다.

지난 2월18일, 이곳에서 이색적인 행사가 열렸다.
뉴욕의 명문 신학교인 유니온 신학교 대학원 과정 학생 70여명이 교수 세명과 함께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때문에 가뜩이나 작은 조계사 앞 골목길은 몰려든 자동차로 주차난을 겪어야 했고 동네 꼬마들은 무슨 큰 구경거리라도 생겨난 듯 조계사 주면을 맴돌았다.

이날 조계사를 찾은 유니온 신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기독교 학자 혹은 목회자의 길로 나설 생각을 지니고 있는 학생들이었다. 이들 벽안의 학생들은 이날 자녁 조계사에서 주지 묘지 스님의 집전으로 법회를 가졌고 법회가 끝난 뒤에는 바루 공양으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이들은 어색헸지만 진지한 자세로 불교식의 합장을 했고 부처님의 성전에 절을 올렸다. 또 이들은 약 20분에 걸쳐 관음정전을 했고 또 30분간의 참선을 했다. 이날 참선의 화두는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법회가 끝난 뒤 학생들은 두 줄로 서로 마주 보고 앉은 자세로 네줄로 법당에 앉아 바루공양을 했다.
학생들은 생소한 한국식 쌀밥과 김치를 받아서 어색한 동작으로 젓가락질을 했지만 모두의 표정은 진지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슬금슬금 바루공양의 경험이 있는 유니온 신학교의 정현경 교수며 켄 케셀 목사, 그리고 뒤쪽에 있었던 조계사 동포 신도들의 공양 모습을 지켜보면서 따라하기도 했지만 어떤 학생은 무표정한 얼굴로 맨밥만 입에 넣었고 어떤 학생은 반찬만 계속 먹다가 밥은 나중에 꾸역꾸역 입으로 집어 넣는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된장국을 단숨에 벌컥 마셨다.
이날 바루공양을 위해 조계사측은 서울의 본사인 화계사에 연락, 바릿대 1백벌을 급히 공수 받아야 했다. 공양이 끝난 뒤 학생과 교수들은 조계사 스님 신도 등 관계자들과 함께 자유로운 토론 시간을 가졌다.
학생들은 스님이나 법사가 입고 있는 옷과 단주와 목탁을 비롯한 불교 용품에 특히 관심을 표시하면서 스님들에게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주관할 수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이날 신학교 학생들의 조계사 방문은 밤이 으슥해져서야 끝이 났다.
며칠 뒤 조계사의 묘지스님 등 관계자들은 탐방형식으로 콜럼비아 대학교 (유니온 신학교는 이 대학 신학부이기도 하다)로 이들을 찾아 수업을 참관했고, 또 한차례의 담소와 토론을 가졌다.
말하자면 뉴욕 한복판에서의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이었던 셈이다.
조계사에서의 모임에서도 또 유니온 신학교에서의 담소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부각된 주제는 세계인류의 평화와 안녕에 종교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어떤 것이냐는 점이었다.
신학자, 신학생 그리고 스님, 불교신도들이 모여서 내린 잠정적인 결론은 '앞으로 21세기정보시대를 맞아 세계는 종교 때문에 분쟁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종교인들이 하나가 되어 서로 교류하면서 이를 위해 발벗고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늘날 지구촌에서 현실로 나타나는 거의 모든 분쟁이 종교에서 기인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시대가 종언을 고한 뒤 다시 종교의 분쟁이 모든 다툼과 혼란 그리고 전쟁이라는 참화의 주범으로 등장한 것이다.
계속 시끌시끌한 중동이 그렇고, 분쟁의 불씨가 아직도 온존하고 있는 유고가 그렇고, 끔찍한 살상과 기아가 연속되고 있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상황이 그렇다.
이들 나라의 분쟁은 한결같이 기독교와 그 사촌이라고 할 수 있는 회교와의 분쟁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현대를 정보화시대라 일컫는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가 없이는 단 한순간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각종 정보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요구받고 있다.
실제로 정치 사회 경제 등 우리가 살아가는 제 분야에 있어 정보를 가진측과 그렇지 못한 측과의 사이는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급격한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룬 뒤 세계화를 꾀하려는 격동의 세기말을 보내고 우리가 맞이하려는 21세기는 여러 각도에서 정보의 가치와 필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강조될 사회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의 석학이라 일컬어지는 앨빈 토플러는 이미 10여 년 전에 농경문화, 산업화에 이은 제 3의 물결로 정보화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다고 갈파한바 있다.
필자는 지난 2년 여 동안 '불광'에 세계의 불교를 연재하면서 독자들에게 정보를 전달한다는 1차적 사명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다.
그 결과가 과연 흡족했는가 하는 점은 별개의 문제다. 취재의 부족, 지식의 부족 그리고 노력의 부족이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불자 여러분들의 질책을 기다릴 뿐이다.
종교, 윤리 철학을 포함하는 정보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또 인간 발달을 위해 쓰여질 때 그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는 맥락에서 보면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위없는 평등과 행복을 강조한 불교의 윤리와 철학이야말로 21세기 정보시대의 바람직한 모습과 제반 문제의 해답을 광범위하게 그리고 있다. 이 불교적인 해답은 앞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될 정보사회에서 더욱 심도있게 논의되고 실천되어야 할 지침으로 우리 불자들의 적극적인 홍포(弘布)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세계, 지구촌 속의 불교의 모습에 대한 고찰이 일차적으로 필요했다고 할 수 있다.
불교, 그리고 불교의 믿음과 논리로서 새로운 사회, 정보화 사회의 가치와 윤리규범이 제시될 수 있다는 모색이 지구촌 곳곳에서 보여지고 있음을 우리는 살펴 보았다.
앞으로 기회가 닿으면 더욱 심도있는 취재와 보고를 약속하면서 불교와 정보의 관계에 대한 필자 나름대로의 고찰로써 세계 불교의 오늘의 모습에 대한 일차적인 보고를 마치면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상(諸行無常), 모든 법에 본래의 모습이 없으며(諸法無我), 이 이치를 바로 깨달으면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고요하고 평온하다(涅槃寂靜)고 설하고 있다.
정보사회의 정보에 관한 한 이 삼법인(三法印)의 가르침은 너무도 정확히 적용되고 설명된다. 이 세상 모든 정보는 변하지 않는 게 없다. 정보는 항상 새로워지고 다듬어지기 때문이다.
또 모든 정보는 그 실체가 없다. 정보는 언어 혹은 문자, 그림, 기호 등으로 이루어진 개념들의 집합일 뿐이다.
정보는 인간을 위해, 인간이 행복해지고 발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때 그 빛을 발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한 개인의 전유물이나 사유물이 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만을 내세우지 않고 우리를, 소수보다는 다수를 위해 사용되어져야 하는 당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수학 공식 자연의 법칙 등 변하지 않는 불변의 정보를 몇 가지 떠올릴 수 있겠으나 이 또한 본래의 모습, 실체가 있을 턱이 없다. 설혹 변하지 않고 잠시 머문다 하더라도 이는 인간을 위해 중생을 위해 널리 쓰여질 때 그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제법무아의 가르침은 정보와 정보화 사회에 관한 최고의 이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이념은 바로 보고, 바로 생각하고, 바로 말하며, 바로 행동하며, 바르게 생활하며 바르게 집중하는 팔정도(八正道)의 실천으로 구현될 수 있다. 불교의 기본 실천 덕목인 팔정도의 가르침 속에 정보를 다루는 사람, 정보를 사용하는 사람, 다시 말해 정보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의 정보를 대하는 바른 태도가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삼법인, 팔정도의 이해와 실천으로 모두가 평온하고 평등하며 행복한 열반적정의 최고경지에 도달할 수 잇다는 점에서 불교는 정보시대의 바른 철학과 윤리를 제공하는 희망의 보루이며 목표일는지도 모른다.
21세기 정보시대의 바른 민주화의 모습이 바로 본래 부처인 중생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또 세상과 하나가 되는 그런 모습일 것이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최나영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