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신정려(凝神靜慮)

나의 인연이야기

2007-09-17     관리자

정신을 한 곳에 엉기게 하고 사려를 조용하게 가라앉힌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중요한 일이다.
모든 동요가 먼저 하였을 때에만 있을 수 있는 현상이다. 동(動)이 정(靜)을 전제하듯이 정(靜) 또한 동(動)을 전제하지 아니하면 존재할 수 없다. 이런 논리에서 무(無)와 유(有)도, 음(陰)과 양(陽)도 어느 한쪽만 있을 수 없으며 또 인식도 되지 아니한다. 결국 선(善)과 악 (惡)도 같은 개념의 의식이다.
그뿐 아니라 모순의 현상을 중용(中庸)과 화해로 통일케 한다거나, 자연의 묘(妙)를 구현 하려는 무(無)의 경지를 전개하는 오도(悟道)에서 집착에 얽매이는 기반에서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여 획득할 수 있는 필봉조극(筆峰造極)이 바로 서법(書法)이다. 이 모든 도정(途程)은 불교에서의 선(禪)과 일치한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중화(中和)를 주로 하는 유가(儒家)의 이념과 자연과 무(無)를 추구하는 도교(道敎)의 원리나 공(空)과 색(色)의 일치와 의식과 무의식을 초월하여 오(悟)와 각(覺)의 세계를 주장하는 불교가 한 곳에 만난다는 특징을 뚜렷이 한 서법예술(書法藝術)은 동방의 특수문 화일 수밖에 없다.
서법예술의 추구하는 심적(心的) 경지는 무엇보다도 응신정려(凝神靜慮)를 바탕으로 하여 열리는 정신세계이다.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무(無)와 유(有)는 극히 반대되는 모순현상이라 할 수밖에 없으나 무(無)에서는 유(有)가 있을 뿐 유(有)에서는 유(有)라거나 무(無)에서 무(無)라는 이론은 성 립되지 아니 한다. 특히 무(無)에서 출발하는 유(有)는 가치 있는 유(有)가 될 수 있어도 유 (有)에서의 유(有)와는 다르다는 말이다.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은 그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虛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竺乾太子之化也" 라 하였다.

곧 현묘(玄妙)한 도(道)를 풍류(風流)라 하되 그 핵은 효(孝)와 충(忠)을 주장하는 공자(孔子)의 뜻이며, 무위(無爲)에 처하고 불언(不言)을 행하는 노자사상과 악(惡)을 짓지 아니하고 제선(諸禪)을 행하는 석가모니의 화육(化育)을 포함한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면 동방문화의 사상을 간단한 말로 표현하여 놓았으며, 그 사상의 구현이 바로 서법예술의 기본원리라 하겠다. 그리하여 서법예술은 이들 삼교(三敎)를 함께 터득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이다.
그러한 다음 문자(文字)로 구성되는 인류 최고의 사상과 이념을 문장으로 엮어 인간 정신 의 순수한 가언(嘉言)을 천부의 개성과 오랜 동안 닦아 올린 학문과 수양으로 쌓아 올린 인 품의 표현이다.
이러한 엄청난 공작(工作)은 부드러운 모필(毛筆)에 검은 먹을 진하게 갈아 찍어 흰 종이 위에 휘둘러 자기의 심미감(審美感)에 비치어 자유자재로 발휘되는 것이 바로 서법예술이기 때문에 동방문화권에 있어서 특유의 예술이며, 더욱 숭고한 영역을 차지하게 될 수밖에 없 다.
이 작업은 정신은 한 곳에 모으되 모든 잡념을 가라앉히고 분향묵념(焚香默念)하며 일필 휘지(一筆揮之)하는 것이라 정신은 붓끝에 집중하게 되며,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전신정 력(全身精力)을 쏟지 아니하면 안 된다. 다만 종이에 먹칠하는 것이 글씨라고 여긴다면 큰 오해만 조장하는 것이 될 뿐이다. 일찍이 이러한 짓을 도아(塗鴉)라 하여 까마귀를 그린다는 뜻으로 써 왔다.
그리고 사경(寫經)할 때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선행하였기 때문에 일자일념(一字一念)이라 는 마음과 몸가짐을 주장하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사경은 불자의 수도로 꼭 거쳐야 할 과 정임은 물론이려니와 종래 많은 서가(書家)들의 사경이 전하는 것을 볼 때 이들이 불제자이 건 아니건 모두 경건한 자세로 집필하여 운필한 자취를 볼 때 스스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마침 '고려 말 조선 초의 서계' 전이 예술의 전당 서예관에서 열렸을 때 처음으로 대하는 직지사 노납(直指寺 老衲) 등곡(燈谷) 학조 대사(學祖 大師)의 서(書)인 「예념미타도량참법 발(禮念彌陀道場懺法跋)」을 배견(拜見)하게 되어 크게 경탄하여 마지않았다.
등곡(燈谷) 대사는 필자에게 18대 백조(伯祖)이다. 등곡 대사는 안행(雁行) 5형제의 맏이 로서 일찍이 출가하여 세조조(世祖朝) 국사(國師)로 기록되어 있다. 집에 전하는 말에 의하 면, 어렸을 때 중국사행(中國使行)에 끼어 온 인사 중 관상을 잘 하는 이가 대사를 보고 "이 아이가 자라서 임금의 연(輦)을 탈 팔자"라 하기에 놀라서 출가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과연 세조대왕이 대사가 지점한 능자리(光陵)를 친감(親鑑)하려 행행(行行)에 모시게 되 었는데 가연(假輦)에 타라는 엄명을 따르다 보니 그 관상이 적중하고 말았다.
등곡 대사로 말미암은 불연(佛緣)은 5백 년이 넘는 셈이다. 지금으로부터 3백여 년 전 필 자의 11대조 삼연(三淵) 선생께서 설악산에 들어가 백연정사(白淵精舍) 영시암(永矢庵)을 구 축하고 십여 년 간 학문을 닦던 중 시자(侍者)가 호환(虎患)을 만나 부득이 필생 영시암에 칩거하겠다는 결심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선생의 출산(出山)으로 영시암은 선방(禪房)이 되어 근년까지 불사(佛寺)가 되었으나 광복 후 회진(灰塵)되어 주초(柱礎)만 남고 '삼연 선생 영시암유허비(三淵 先生 永矢庵遺墟碑)'마 저 화재로 파편만 수습하여 그 자리에 3년 전 영시암 복원에 미력을 다하게 된 것이 필자와 의 불연(佛緣)이라면 불연이라고 하겠다.
경향 각 사찰의 편액(扁額)과 영련(楹聯)을 집필한 것이 적지 아니 하나, 이것도 우연이라 고 할 수 없는 것이 근래 전국 사찰의 편액구, 영련은 두말할 것 없고 사찰기적비 등 무수 한 금석(金石)을 집필한다는 것도 주지화상의 안목과 학식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꼽아 보니, 청도 운문사(雲門寺)·용운사(龍雲寺)·지리산 칠불사(七佛寺)·연곡사· 보은 속리산 법주사(法住寺) 등 몇몇 사찰이 손꼽혀질 뿐이다.
서법예술은 무엇보다도 도야성령(陶冶性靈), 변화기질(變化氣質)하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 한 의의를 살리는 예술일 뿐 아니라, 기(氣)와 세(勢)와 력(力)의 충만한 영활성(靈活性)을 표출하기 때문에 인생은 짧아도 예술은 길다는 깊은 의미를 진실 되게 확인하는 만큼 유학 의 인(仁)과 불교의 윤회와 선도의 자연무위(自然無爲)를 실현하는 참된 삶이라고 하겠다.
서법작품(書法作品)은 생동하는 개체로서 또 그 가운데에 일점일획(一點一劃)이 서로 영 대(映帶)하고 호응하며 일자(一字)의 구성과 일행(一行)의 포백(布白)과 전폭(全幅)의 장법 (章法)이 일맥상통하여 계속(繼續)을 볼 수 있으면서 단속(斷續)이 있을 수 있는 생명체인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불멸하여 그야말로 심경(心經)의 "불생불멸(不生不滅)·불구부정(不垢不淨)·부증불감(不增不感)" 그것이고 또 금강경의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여로역여전 (如露亦如電)·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며 "개대환희(皆大歡喜)·신수봉행(信受奉行)"일 뿐 이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배지숙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