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가족] 아내 야소다라

인욕과 기다림 끝의 출가

2024-04-26     조민기

왕위 계승권 놓고 왕자들이 치열하게 다투거나 경영권 계승을 두고 재벌 가문의 형제가 경쟁하는 이야기는 드라마 단골 소재다. 여기에 출생의 비밀과 배다른 형제, 쟁쟁한 배경을 가진 처가 등이 등장하면 이야기는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족 이야기는 흥행하는 드라마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고귀한 핏줄, 혈통

스스로를 ‘태양의 후예’라 불렀던 석가족은 혈통의 순수함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석가족의 뿌리는 옥까까 대왕과 그의 첫 번째 왕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와 공주들이다. 네 명의 왕자와 다섯 명의 공주를 낳은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옥까까 대왕은 젊고 아름다운 새 왕비를 맞이했다. 새 왕비에게 푹 빠진 옥까까 대왕은 그녀에게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얼마 후 새 왕비는 왕자를 낳았고 자신이 낳은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첫 번째 왕비에게서 태어난, 정통성을 지닌 장성한 네 명의 왕자를 두고 새 왕비가 낳은 갓 태어난 왕자를 후계자로 삼는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첫 번째 왕비를 지지하는 세력과 장성한 왕자들을 따르는 신하들이 반대한다면 왕궁은 피로 물들 것이고 왕국은 분열될 것이었다. 이때, 첫 번째 왕비의 자식들은 왕위 계승권을 놓고 이복동생과 다투는 대신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네 왕자와 다섯 공주는 그들을 따르는 이들이 함께 고국을 떠났다. 이들은 히말라야 부근에 이르렀을 때, ‘까삘라’라는 이름의 수행자를 만났고, 그의 조언을 받아 나라를 세운 뒤 수도의 이름을 ‘까삘라왓투’라고 정했다. 

나라를 세우고, 수도가 정해지자 신하들은 왕자들에게 혼인을 권했다. 혼인을 통해 왕권을 안정시키고 영토를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왕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보다 ‘종족이 훌륭한’ 왕자와 공주를 찾을 수 없다. 종족이 훌륭하지 않은 이들과 혼인하여 자식을 낳으면 혈통의 깨끗함이 더럽혀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이들과 혼인하고자 하노라.”

네 명의 왕자들은 누이인 공주들을 아내로 맞았고, 가장 나이가 많은 공주를 어머니처럼 모시기로 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옥까까 대왕은 혈통의 깨끗함이 굳게 지켜진 것을 칭찬하며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오! 왕자들은 진실로 훌륭하구나!”

이때부터 ‘진실로 훌륭하다’는 의미의 ‘사꺄(Sakya)’, 즉 ‘석가(釋迦)’가 까삘라 왕국을 다스리는 왕족의 성(姓)이 됐다. 

 

콧대 높은 공주, 야소다라

석가족은 친족간의 혼인을 통해 혈통을 지켰고 가까운 친족과의 혼인에서 태어날수록 깨끗한 혈통을 의미했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과 야소다라는 아주 가까운 친척이었고 지극히 고귀한 혈통을 자랑했다. 야소다라는 까삘라 왕국을 세우고 혼인한 왕자들과 공주들이 어머니처럼 모셨던 첫째 공주의 후손이었다. 첫째 공주는 불행히도 피부병을 앓는 바람에 깊은 숲속에서 혼자 지냈는데 그곳에서 같은 병을 앓고 있던 바라나시의 왕을 만나게 된다. 동병상련의 두 사람은 서로를 정성껏 돌보며 지냈고 기적처럼 병이 완치됐다. 그 후 첫째 공주와 왕은 혼인해 새로운 나라를 세웠는데, 그들이 자리 잡은 마을은 숲과 가까워 맹수들의 공격으로 인한 위험이 많았다. 그래서 마을 주변에 가시가 많은 꼴리야 나무를 심었고 그들은 ‘꼴리야족’이라고 불리게 됐다. 

석가족과 꼴리야족은 서로 혼인하며 혈통의 깨끗함을 유지했는데 야소다라의 어머니 빠미따 왕비는 부처님의 고모였고,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 왕비와 고따미 왕비는 야소다라의 고모였다. 즉, 두 사람 모두 석가족과 꼴리야족에서 최고의 혈통인 셈이었다.

숫도다나왕은 아들 싯다르타 태자의 혼기가 차자 태자비를 구하기 위해 큰 연회를 베풀었다. 아들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남달랐던 숫도다나왕은 태자비 후보 처녀들에게 줄 꽃바구니 500개를 준비했고, 소식을 들은 여러 왕과 귀족들은 딸들을 곱게 단장시켜 연회에 참석하게 했다. 싯다르타 태자는 처녀들을 맞이하며 꽃바구니를 직접 건네줬다. 꼴리야의 숩빠붓다왕도 딸 야소다라 공주에게 태자비를 선발하는 연회에 참석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야소다라는 이처럼 공개적인 자리에서, 다른 여인들과 똑같은 후보가 되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태자비를 선발하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결국 야소다라는 가장 늦게 연회장에 도착했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공식은 통했다. 야소다라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눈빛은 500명의 처녀를 가뿐하게 압도했다. 하지만 이미 모든 처녀에게 꽃바구니를 나눠준 싯다르타에게는 남은 꽃바구니가 없었다. 그러자 싯다르타는 꽃바구니 대신 자신이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야소다라에게 끼워줬다. 그 순간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500명의 아리따운 처녀들이 일시에 탄성과 한숨을 내쉬었다. 한순간에 500명의 후보를 조연으로 만들어버린 야소다라는 반지를 받은 후에도 싯다르타와 시선을 마주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싯다르타는 싱긋 웃으며 옷을 장식하고 있던 보석을 하나씩 야소다라에게 건네줬다. 마지막 보석을 받은 후, 야소다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제가 왕자님을 장식해 드리겠습니다.”

등장과 함께 승리를 거머쥔 야소다라는 그 후 모두의 부러움 속에서 싯다르타 태자의 아내가 됐다. 결혼식 날에도 야소다라는 특별했다. 그녀는 가마에서 내린 순간, 얼굴을 가린 비단을 활짝 걷었다. 사람들이 놀라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흠 없는 얼굴, 감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싯다르타와 결혼하기 위해 까삘라 성에 오는 야소다라 공주. 
『석씨원류응화사적(釋氏源流應化事蹟)』의 「실달납비(悉達納妃)」, 
동국대학교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

왕의 딸로 태어나, 왕의 며느리가 됐고, 왕위를 계승할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은 야소다라의 인생은 황금빛 꽃길 그 자체였다. 하지만 향기롭고 아름답게만 보였던 꽃 속에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 있음을 야소다라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꼴리야족의 공주로 태어나 금지옥엽으로 자랐고, 석가족 최고의 남자와 혼인해 최상의 지위를 누렸던 야소다라의 오만함이 무너진 것은 남편이 출가한 후였다. 그때 야소다라는 싯다르타 태자의 유일무이한 아들, 라훌라를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온 나라가 왕자의 탄생을 기뻐하고 있을 때, 싯다르타 태자는 밤을 틈타 왕궁을 빠져나갔고 다음 날 아침 마부 찬나를 보내 가족들에게 출가 소식을 알렸다. 

남편의 출가는 야소다라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이었다. 어떤 여인도 겪어본 적 없던 상황 앞에서 야소다라는 위로와 공감을 구할 상대조차 없었다. 눈앞의 캄캄한 막막함 속에서 그녀는 이를 악물고 남편과의 의리와 태자비의 품위를 지켰다. 싯다르타 태자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 확실해지자 석가족 안에서는 야소다라가 꼴리야족으로 돌아가 재혼하는 것이 어떠냐는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나왔다. 야소다라는 아직 젊었고 혈통도 훌륭했다. 하지만 그녀는 상처를 보듬어줄 친정으로 돌아가 새로운 인연을 찾는 대신 아들 라훌라와 까삘라 왕국에 남는 것을 선택한다. 

숫도다나왕이 보낸 신하들로부터 남편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야소다라는 더욱 강인해졌다. 붓다가 탄생했을 때, 그녀는 다시는 싯다르타의 아내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야소다라는 한 손으로는 과거를 단단하게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수행자의 삶을 따라가려 노력한다. 금은보화와 산해진미가 넘쳐나는 왕궁 안에서 언젠가 다시 만날지 모를, 기약 없는 날을 기다리며 야소다라는 거친 잠자리에서 잠을 자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스스로 절제하는 삶을 실천했다. 

보은 법주사 소장 <유성출가상>의 부분. 오른쪽의 빈 의자는 싯다르타의 출가를 상징한다. 야소다라와 시녀들은 모두 눈을 감고 있다. 

 

재회, 얻은 것과 잃은 것

라훌라가 12살이 되던 해, 부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고향 까삘라 왕국으로 오셨다. 석가족은 부처님을 맞을 준비로 분주했으나 부처님은 제자들과 숲에 머물렀고, 때가 되자 성안으로 들어가 탁발했다. 당당한 태자였던 아들이 발우를 들고 밥을 비는 모습을 본 숫도다나왕은 기절할 듯 놀랐다. 숫도다나왕은 서둘러 부처님과 제자들을 왕궁으로 청해 공양을 올렸다. 

부처님이 왕궁에 오신 날, 석가족은 기쁘고 반가운 마음으로 예를 올리고 법문을 들었으나 야소다라는 방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보고 싶은 마음과 하고 싶은 말들을 꾹 삼킨 채 그녀는 기다린다. 마침내 부처님께서 야소다라를 찾아오시자 그녀는 눈물을 흘린다. 부처님께서 직접 찾아오셨을 때, 야소다라의 마음은 기쁨과 슬픔으로 넘실거렸을 것이다. 숫도다나왕이 야소다라가 지난 세월 부처님을 위해 세속의 즐거움을 버리고 지내온 것을 이야기하자 부처님은 대답한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야소다라가 저를 보살피고 절개를 지켰던 것은 금생만이 아닙니다.”

단둘이 만나 구구절절 자상하고 달콤한 말 백 마디 천 마디를 하는 것보다 숫도다나왕 앞에서 전한 이 한마디로 충분했으리라. 부처님은 그녀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고 계셨고 쓸데없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자신을 인정해준 부처님의 한마디에 야소다라의 자긍심, 자존심, 자존감은 다시 차올랐다. 남은 생을 수행하며 보내야 한다 해도 기꺼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들 라훌라는 달랐다. 부처님이 고향에 오신 지금, 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라훌라의 자리를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초조함에 휩싸였다. 야소다라는 아들에게 말했다.

“저분이 너의 아버지이시다. 아버지에게 가서 물려줄 재산을 달라고 말하거라.”

야소다라가 원한 것은 남편이 마땅히 물려받아야 했던 지위와 재산을 라훌라가 당당하게 계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처님은 라훌라에게 진리를 물려주고, 위없는 깨달음이라는 재산을 주기 위해 그를 사미로 출가시켰다. 12년 전, 남편을 잃고 아들을 얻었던 야소다라는 12년 후, 붓다를 얻고 아들을 잃었다. 

훗날 숫도다나왕이 세상을 떠나고 고따미 왕비를 필두로 석가족 여인들이 부처님을 찾아와 출가를 청했을 때, 야소다라도 함께했다. 그때 야소다라는 세속을 떠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도, 슬퍼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남편과 아들이 떠난 왕궁 안에서 빈 껍데기로 살아가는 삶보다 부처님 곁에서 비구니 교단의 수행자로 살아가는 삶이 야소다라에게는 긴 인욕과 기다림 끝에 만난 평안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아잔타 석굴에 새겨진 붓다의 귀향 장면. 야소다라와 라훌라가 붓다를 대면하고 있다. 
사진 불광미디어

 

조민기 
부처님을 팬질하는 작가 겸 칼럼니스트. 역사 속 인물들의 삶을 따라가며 만난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첫 번째 불서 『부처님의 십대제자』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불교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붓다를 만난 여인들 – 그녀는 다시 태어나지 않기로 했다』 연등회 창착 그림 동화 『친구를 만나러 왔어요』 및 『조선임금잔혹사』 『조선의 2인자들』, 『조선의 권력자들』, 『세계사를 움직인 위대한 여인들』, 『궁녀로운 조선 시대』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