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륜성왕을 꿈꾼 광개토왕] 고구려 불교 이해하기 ➋

불교를 전한 고구려 스님들

2024-03-25     남무희

고구려는 국가 성립 시기부터 북방의 여러 유목 민족과 서남 지역의 중국 민족과 다양하게 교류하고, 그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국가를 발전시켜 왔다. 그러한 과정에서 북방 유목 민족과 서방의 중국 민족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불교를 수용하게 된다. 그 결과 중국에서 활동한 고구려 승려들이 등장한다. 또한 소수림왕 대에는 고구려 국내성으로 불교가 전래됐다. 한편 고구려가 소수림왕 대 이후부터 확보한 요동 지역으로도 불교가 전파됐다. 그리고 광개토왕 대 이후 고구려가 확실히 확보한 대동강 유역의 평양 지역에도 불교문화가 뿌리를 내리게 됐다.

이 글에서는 장수왕 대 평양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고구려 불교의 수용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고구려 승려들의 활동 유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 속에서 고구려가 중국의 북방 유목 민족과 중국으로부터 수용한 불교 사상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도 개략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고려도인(高麗道人)

고구려는 전진(前秦)을 통해 불교를 수용하기 이전부터 석륵(石勒)의 후조(後趙), 모용씨(慕容氏)의 전연(前燕)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이때 후조 또는 전연을 통해서 불교가 전래됐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후조에서는 승려 불도징(佛圖澄, 232~348)의 노력으로 불교가 크게 융성했다.

『양고승전』 「축잠법심전(竺潛法深傳)」과 고려시대에 각훈(覺訓) 스님이 펴낸 『해동고승전』의 「석망명전(釋亡名傳)」에는, 동진의 지둔도림(支遁道林, 314~366)이 고려도인(高麗道人) 또는 이름을 전하지 않는 스님에게 축잠법심(竺潛法深, 286~374)의 높은 덕을 칭송하는 내용을 적은 편지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지둔도림과 직접 서신을 교환할 정도로 불교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고려도인의 존재가 주목된다. 지둔도림이 입적한 해는 고구려에서 불교가 공인된 소수림왕 2년(372)보다 6년이나 앞서고 있다. 이 당시 고려도인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던 청담(淸淡)적인 격의불교(格義佛敎)를 이해할 수 있는 승려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유행한 청담적인 격의불교는 중국에서 불교를 수용할 때, 노장사상을 바탕으로 이해한 불교를 말한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고구려에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이미 중국에서는 지둔도림과 축잠법심의 청담 격의불교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 높은 고구려 출신의 승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양고승전』 「축잠법심전」에서는 ‘고려도인(高麗道人)’이라고 했으며, 『해동고승전』에서는 ‘이름을 잊어버린 스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의 한계 때문에 이 당시 중국에서 활약하고 있던 고구려 승려의 구체적인 법명을 알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중국의 남북조 지역에서 활약하던 고구려 승려들이 다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국내성(國內城)의 불교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봉상왕 2년조(293)에는 전연의 모용외가 침입해 오자 왕이 곡림(鵠林)으로 도피했는데, 당시 신성 태수로 있던 북부소형 고노자(高奴子)가 이들을 물리쳤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여기에 보이는 ‘곡림(鵠林)’이라는 지명이 주목된다.

곡림은 ‘고니의 숲’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라의 쌍림(雙林)에서 열반에 드셨을 때 그 숲이 하얀색으로 변했다는 불교 설화에서 유래하는 지역명이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당시 고구려에서는 후조 또는 전연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이른 시기부터 이미 ‘곡림’이라는 불교 용어를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구려는 3세기 말 무렵부터 불교를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전진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및 『해동고승전』의 관련 기록에는 전진(前秦, 351~394)의 왕으로 있던 부견(符堅, 재위 357~385)이 소수림왕 2년(372) 6월에 순도(順道) 스님을 고구려로 보내면서 불상과 불경을 전한 것으로 나온다. 또한 2년 뒤(374)에는 동진(東晋)에서 온 아도(阿道) 스님이 고구려로 왔다. 이에 다음 해에(375) 초문사(肖門寺)를 세우고 순도 스님이 머무르게 했다. 한편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세우고 아도 스님이 머무르게 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불교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로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에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소수림왕 5년(375)에는 국내성에 초문사와 이불란사라는 고구려 최초의 사찰을 건립했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당시 국내성에 사찰이 건립되면서 순도와 아도 스님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승려들이 이곳에서 활동했을 것이다.

이 당시 고구려에 처음으로 전래된 불교는 당시 중국의 남북조 지역에서 널리 유행하고 있던 청담 격의불교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초전불교의 사상과 신앙에 대해 고구려 왕실은 크게 관심을 표방했을 것이다.

나아가 고구려는 고국양왕 9년에 왕이 ‘불교를 숭신(崇信)하여 복(福)을 구하라’는 교지(敎旨)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국사(國社)를 건설하고 종묘(宗廟)를 수리하라’고 했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이러한 기록으로 당시 고구려 국내성으로 수용된 불교의 성격이 어떠했는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소수림왕과 고국양왕 대에 국내성 지역으로 전래된 불교는 많은 사람에게 인과(因果)의 원리를 알려주고, 현실 세계에서 화(福)를 물리치고 복(福)을 구하게 하는 현세 이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고구려 국내성 지역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순도와 아도는 당시 중국에서 크게 활약하고 있던 불도징 및 석도안이나 그의 제자들이 갖고 있던 청담적인 격의불교의 영향을 깊게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들은 미륵상생신앙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전진의 부견은 인도 아쇼카왕의 통치방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열성적인 불교 신봉자였다. 그렇다면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고 국가적으로 불교를 공인한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은 국가를 통치하는 이념으로 불교의 미륵신앙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면서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해 나갔을 것이다.

 

담시, 승랑, 담초

고구려가 요동 지역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는 이미 동천왕 대부터 있었다. 그 후 5호 16국 시대(317~439)에 전연이 이곳으로 진출하면서부터 요동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게 된다. 고구려가 요동 지역으로 진출했을 때는 전연 세력을 멸망시키고 북중국의 새로운 강자가 된 전진과 친선관계를 맺게 된 372년 소수림왕부터다. 소수림왕 다음으로 즉위한 고국양왕과 광개토왕은 이 지역을 확실하게 고구려의 영토로 확보했다. 

도선(道宣) 스님이 편찬한 『집신주삼보감통록』과 일연(一然) 스님이 펴낸 『삼국유사』에는 요동성에 고려의 성왕(聖王)인 광개토왕이 육왕탑(育王塔)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서술됐다. 따라서 고구려 요동성에는 육왕탑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원(寺院)도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요동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로 담시(曇始)가 주목된다. 담시가 요동 지역에 와서 교화한 기간은 광개토왕 5년(396)부터 14년(405) 무렵까지였다. 담시가 중국의 관중 지역 출신인 것으로 볼 때, 순도와 아도가 고구려에 전한 북조 계통의 불교를 전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다음으로 광개토왕 대를 지난 장수왕 대 요동 지역과 관련된 승려로는 요동성 출신의 고구려 승려인 승랑(僧朗)이 있다. 승랑은 요동성에서 이미 출가한 다음에 중국으로 유학길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중국 남조로부터 이 지역으로 와서 교화 활동을 폈던 승려로는 담초(曇超, 418~492)가 있다. 담초가 청하(淸河) 출신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그는 중국의 북조(北朝)에서 남조(南朝)로 남하했다가 다시 남제의 태조 소도성(蕭道成)의 부탁으로 요동 지역에 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담시는 북조불교를, 담초는 남조불교를 고구려에 전한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왕과 장수왕 대에 요동 지역에는 육왕탑을 중심으로 다수의 사찰이 건립됐을 것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담시와 담초라는 중국의 승려들이 다양한 포교 활동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다가 요동성 육왕탑 부근의 사찰에서 출가한 승랑은 중국의 남조와 북조의 불교를 모두 섭렵했다. 그 결과 승랑은 그동안 여러 갈래로 나뉘어 혼란을 거듭하던 불교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서, 신삼론(新三論) 사상을 정립했다. 신삼론사상의 체계적인 정리로 승랑은 중국불교 사상사뿐만 아니라 한국불교 사상사에서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대동강 유역의 승려들

대동강 유역에서는 중국의 유이민들을 통해 4세기 전반부터 불교가 전래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지역에 전래된 불교는 국가적으로 공인된 국내성 지역의 불교와는 그 성격이 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안악 3호분의 벽화를 통해, 4세기 중엽 이전에 이 지역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던 집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덕흥리 고분은 광개토왕 영락 18년(408)에 축조됐다. 이 고분의 묵서명에는 ‘석가문불(釋迦文佛)’의 제자임을 자처하고 있던 진(鎭)이라는 불교 신봉자가 나온다. 그는 영락 18년에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덕흥리 고분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고구려 고국원왕 2년(332) 무렵에 평양 지역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따라서 4세기 전반부터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평양 지역에는 이미 불교가 전래돼 있었으며, 적지 않은 사찰에서 다수의 승려가 활동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덕흥리 고분벽화에는 ‘칠보공양행사도(七寶供養行事圖)’가 그려져 있다. 따라서 이 당시 덕흥리 고분을 조성한 집단들은 정토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가 대동강 유역의 평양 지역을 확보한 이후, 광개토왕은 재위 2년(392)에 평양에 구사(九寺)를 창건했다. 또한 광개토왕을 계승한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를 단행했다. 그렇다면 평양 지역에는 다수의 사찰이 건립됐을 것이며, 적지 않은 수의 승려들이 활동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승려 가운데 아도와 묵호자 및 정방과 멸구자 스님은 신라로 포교의 길을 떠났다. 또한 신라 소지왕 대에 활동한 분수승(焚修僧)은 고구려 출신의 승려였으며, 신라 장군 거칠부를 한눈에 알아봤던 혜량과 같은 승려도 평양 지역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백제 개로왕 정권을 몰락시켰던 도림(道琳) 스님도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승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불교 사상의 주요 내용

『삼국유사』 「흥법」편에 실려 있는 ‘순도조려(順道肇麗)’의 세주(細註)에는, “순도 스님 다음으로 또한 법심(法深)과 의연(義淵) 및 담엄(曇嚴)의 부류들이 서로 계승해서 불교를 흥기시켰다”라고 기록됐다. 이로 볼 때, 고구려 불교사는 순도 → 법심 → 의연 → 담엄의 부류들로 계승돼 나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해동고승전』 ‘유통(流通)’의 목차는, 순도 → 망명(亡名) → 의연 → 담시(曇始)의 순서로 되어 있다. 이것을 『삼국유사』와 대조하면 법심과 망명이 서로 연관되고, 담엄의 부류와 담시가 서로 연관됨을 알 수 있다. 이로 볼 때, ‘담엄의 부류’는 ‘담시가 전래한 계율을 엄격하게 지킨 부류’로 이해된다.

이러한 고구려 불교 사상의 흐름을 중심으로 평양 천도를 전후한 시기 고구려 승려들의 활동과 그들이 어떤 불교를 수용했는지를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이 요약된다. 

우선 첫 번째는 ‘격의불교(格義佛敎) 단계’다. 이 시기에는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고구려의 도인(道人) 또는 석망명(釋亡名)과 지둔도림이 당시 유행하던 청담적인 격의불교의 사상을 서신으로 교환할 정도로 수준 높은 고구려 출신의 승려들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공인불교(公認佛敎) 단계’다. 이 시기에는 순도와 아도가 당시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으로 들어와 불교를 전파했으며, 고구려 왕실은 이때 불교를 공인했다. 한편 담시와 담초 등이 중국의 남조 및 북조로부터 고구려의 요동 지역에 와서 공식적으로 불교를 전파했다. 신라 하대 활동한 최치원은 이러한 불교의 흐름을 주목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소수림왕 이후부터 문자명왕 대까지 계속되면서,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세 번째는 격의불교뿐만 아니라 공인불교 단계까지 극복하면서 중도공관(中道空觀)에 대한 이해가 점차 심화하는 ‘중도공관불교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승려로는 중국에서 신삼론사상을 확립한 승랑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국내외 문헌 사료뿐만 아니라 불상의 명문 및 금석문 자료를 좀 더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평양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중국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 및 신라에서 활동했던 고구려 승려들의 실체가 더 확실하게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일본에 전하는 자료를 분석한다면, 일본에 진출한 고구려 승려들이 어떠한 활약을 했는지도 밝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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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선, 「고구려의 불교 수용」, 『한국고대사연구』 35,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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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란, 「고구려의 미륵신앙 고찰 - 장천1호분의 예불도를 중심으로」, 『동북아역사논총』 63, 2019.

 

남무희
국민대 교양과정부 강사. 한국 고중세 불교사상사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고구려 승랑 연구』, 『신라 자장 연구』, 『가락국기 평전』, 『신라 원측의 유식사상 연구』 등이 있다. 서울 삼각산 승가사의 승가대사 관련 분야 및 성주산문의 인물과 사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울러 후삼국시대를 살았던 궁예와 신라 경순왕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자료를 분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