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 창간 50주년] 우리스님 한암스님

다시 보는 불광 ② 1978~1981 노사(老師)의 운수(雲水)시절 | 조용명(조계종 원로)

2024-01-31     조용명

 

한암 스님의 입적

우리 스님은 상주지물(常主之物)을 대단히 아끼셨다. 그것은 살림살이를 잘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시물(施物)을 아낀다는 것뿐이다. 항상 “금생에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물방울도 또한 소화하기 어려우니라” 하시는 서산대사의 말씀을 자주 하셨다. 

오직 아껴야 한다는 말씀이요, 그것은 저축하기 위해서 하는 말씀이 아니었다. 대중이 많이 지내기 위해서도 결코 아니었다. 오직 우리 스님은 오뚝하니 앉아서 화두만을 하셨고 물건을 아끼셨고 다른 생각은 없었다. 

혹 누가 돈을 드리면 책갈피에 아무 데나 꽂아 놓으신다. 그리고 찾지도 않으신다. 혹 내가 방을 청소하다가 돈을 발견할 때가 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때 나는 몰래 돈을 가지고 월정거리에 나가서 돈을 써 버린 일이 한 번 있다. 딴 게 아니라 떡을 사 먹었다. 스님께서 돈 쓰시는 것은 못 보았다. 

다만 수좌들이 가면 노자를 주셨는데 으레 2원씩 주셨다. 특별히 스님을 뒷바라지하는 신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궁인(宮人)들이 기도 오면 약값이라고 얼마간 드리고 간다. 그것을 두었다가 길을 떠나는 수좌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대산에서 지내시면서 삼십 년을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셨다. 

그리고 마침내 6·25때 조용히 그 도량(오대산 상원사)에서 영겁(永劫)의 침묵 속에 몸을 숨기시고 마셨던 것이다.

나는 생각할 때가 있다. 저 때에 피난을 나오지 않고 왜 거기 그대로 계셨을까? 그러나 다시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 스님은 이미 때가 다 된 것을 아셨던 것이다. 이미 갈 때가 되신 것을 아시고 피난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시봉들, 대중들 모두는 피난시키면서 당신께서는 그 방에 계셨던 것이다. 오직 시자 한 사람과 신도 한 분이 시중을 들었다. 시자가 낮에 죽을 쑤어 넣고 가서 여쭈었다.

“죽을 드시겠습니까?”

아무 말 없이 앉아 계셨다. 시자는 죽을 가지고 올라가서 뵈었다. 그리고

“스님, 죽이 다 되었습니다.”

하고 갖다 드리니 역시 아무 말이 없으시다. 다시 살펴보니, 이미 입적하셨던 것이다. 아, 우리 스님은 이렇게 말없이 사시다가 말없이 가셨다. 한용운(韓龍雲) 스님이 “이 나라 천지 7천 승려 가운데서 뜻이 굳기는 한암 스님뿐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시는 것을 나는 들었다. 담담히 선방에 앉아서 오직 좌선만 하시던 우리 스님은 변함이 없으셨다. 뒷날 종정스님이 되셔서도 그랬고 열반에 이르러도 또한 변치 않으셨다. 우리 스님은 지금도 적연부동 상적광토(常寂光土)에서 소요하시리라.

 

수좌들과의 문답

내가 산에서 내려 온 후에 먼지 속을 밤낮으로 뛰어다니면서도 밤이면 종종 스님 모시던 시절 일이 꿈에 나타나기도 하였다. 스님 시봉하던 일이라든가, 상원사에서 마지를 지어 들고 법당에 가는 일이라든가 등등…. 

그러나 이제는 그런 일도 까마득히 잊고 지낸다. 그렇지만 한 가지 지금도 역력한 것은 선방에 있을 때에 스님에게 묻고 대답하던 일들이다. 지금 몇몇 당시의 세간 납자들이 스님께 묻던 것을 몇 개 적어 두고자 한다.

단암(檀庵) 스님은 용성 스님 제자다. 선방에서 성정이 알뜰하고 덕이 후한 납자로 알려지고 존경을 받았다. 그때가 병인년 여름이니까 1926년이다. 상원사에서 지내는데 그 해는 유난히 비가 많이 왔었다. 밖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역시 공양 후 차를 마셨다. 그런데 단암 스님이 조실(한암)스님께 여쭈었다.

“스님, 능엄경에 ‘제가환자(諸可還者)는 비여(非汝)어니와(가히 보낼 수 있는 모든 것은 내가 아니거니와) 불가환자(不可還者)는 비여이수(非汝而誰)오?(가히 보내지 못할 자는 이것이 내가 아니고 무엇이오?)’ 하였는데,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조실스님이 가만히 계시더니

“호손(猢猻)이 도상수(倒上樹)니라(원숭이가 거꾸로 나무에 올라가느니라).” 하였다. 

단암 스님은 그 말을 알아듣기에 아직 지견이 열리지 않았음인지 눈을 꿈벅꿈벅하고 의아해 했다. 그러더니,

“무슨 말인지 얼른 이해가 안 가네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스님이 대답하였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물어 오너라.”

이 말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었고 우리 스님의 간곡한 뜻도 함께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 대중이 얼마나 그 뜻을 알고 있었는지…. 대중은 다만 묵묵히 차만 마시고 있었다.

그즈음의 일이다. 하루는 정운봉(雲峰) 스님이 스님께 물었다. 운봉 스님은 얼마 전에 입적한 부산의 향곡선사의 법사이시다. 운봉 스님은 상호가 기묘하게 생겼다. 얼굴이 새까맣고 키도 작고 머리 모양이 아주 기형이었다. 목소리가 매우 아름다워서 잘못된 생각이지만 새를 연상하게 하였다. 

그것도 그런 것이 머리가 앞뒤로 솟아 나오고 턱이 나온 것과 광대뼈하고 참으로 기묘해서 우리들은 뒤에서 별명을 붙이기를 ‘굴뚝새 조실’이라고 하고 혹은 ‘굴뚝새 화상’이라고 하였다. 이 운봉 스님이 한암 조실스님께 묻기를 저 한암 스님의 오도송(悟道頌)을 가지고 물었다.

 

“스님, 스님 오도송에 
‘着火廚中眼忽明 從玆古路隨緣淸(착화주중안홀명 종차고로수연청) 若人問我西來意 岩下泉鳴不濕聲(약인문아서래의 암하천명불습성)
부엌에서 불을 지피다가 홀연히 눈이 밝았으니/ 이 도 좇아 옛길이 인연따라 맑네./ 누가 와서 조사의 뜻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바위 아래 울려대는 물소리는 젖지 않았더라 하리라’ 하셨는데, 
이 글 끝의 「암하천명불습성(岩下泉鳴不濕聲)」이 어떻게 이것이 조사의 뜻이 될 수 있습니까?”

이 게송은 한암 조실스님께서 우두암에서 눈이 열렸을 때에 지은 것인데 이것이 조사의(祖師意)가 못 된다는 것이다. 우리 스님은 가만히 들으시더니 대답하셨다.

“불시여의고(不是汝意故)로 시조사의(是祖師意)니라(이것이 네 뜻이 아닌고로 조사의 뜻이니라).”

하였다. 운봉 스님의 인품을 말한다면 까만 얼굴에 눈은 마치 바늘귀처럼 작다. 이마와 광대가 뾰족 나오고 턱이 또한 뾰족하였다. 종일 침묵하고 좀체 말이 없다. 길을 걷다 비가 쏟아져도 결코 뛰는 법이 없다. 벼락이 쳐도 부동이다. 비록 체구는 작지만 자세는 태산과 같이 부동한 바가 있었다.

운봉 스님이 그 작은 눈을 깜박깜박하고 앉아 있더니, 차 한잔을 훌쩍 마시며 대꾸하였다. 

“스님께서 속서(俗書)에 능한 것을 익히 들었습니다” 하니 스님은 가만히 앉아 계시더니

“착환여시임하객(錯喚汝是林下客)이라(내가 그대를 공부인인 줄 잘못 부를 뻔했다).”

이 말 아래 운봉 스님도 가만히 차를 마시고 대중들도 묵연히 듣고만 있었다.  

우리 스님과 운봉 스님의 문답은 기막힌 험구의 교환이다. 운봉 스님은 조실스님에 대하여 추호도 법을 인정하는 빛이 없고 순 세속 글이나 아는 선비라고 깎아 말하였는가 하면, 이에 질세라 조실스님은 조실스님대로 “이 밥 도적놈!” 하는 투로 몰아세운다. 

말이야 한문 문장 격식으로 조용한 말이 오고 갔지만 거기에 담긴 뜻은 기막힌 험구였다. 하지만 번개가 터질듯한 그런 기상에서도 그대로 가라앉았다. 역시 도인 노름이었다. 

 

마명(馬鳴)보살 주소

유동화(柳東華) 스님의 이야기인데, 동화 스님은 나이가 그 당시 30세는 되었고 용모가 미남형이었다. 그해 여름에 북대(北臺)에서 지냈는데 글을 잘하였고, 혼자 지내더니 귀찮아서 그런지 머리를 안 깎아 장발을 한 채로 있었다.

가을에 내가 중대(中臺)에서 스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찾아왔다. 스님께 예배드리더니 물었다.

“기신론(起信論)에 ‘일체망념(一切妄念)을 수렴제(收斂除)하되 역견제상(亦遣除想)이라’ 하였아오니 어떻게 그 제상(除想)을 제하올까?”

말하자면 망념을 다 보내고 망념을 보낸 상도 또한 없애야 한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제상을 제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스님은 가만히 계시더니 대답하였다.

“문취마명(問取馬鳴)하라.”

마명에게 물어보라는 뜻이다. 기신론은 마명보살이 적은 것이다. 동화 스님은 또 물었다.

“마시성고과벽력(馬嘶聲高過霹靂)”

‘말 울음 소리가 벽력 소리 보다도 더 높은데’라는 말이다. 동화 스님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스님께 절하더니 물러갔다. 

그날 저녁이었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아까 동화 스님께 하신 법문을 스님께 물었다. ‘마시성고과벽력’이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지나칠 수 없었다. 스님께 여쭈기를,

“아까 동화 스님에게 스님께서 이르시기를 ‘마시성고과벽력’이라 하셨는데 그것 참 우습군요.”

“그래 말해 봐라. 무엇이 우습지?”

이렇게 스님께서 물으시는데 나는 할 말이 없어 돌아서면서 “마시성고과벽력” 이렇게 했다. “예끼놈, 남의 흉내만 내면 나중에 원숭이가 된다” 하셨다. 

그때의 스님의 말씀, 그리고 내가 어리광부리듯 속에 있는 의심을 털어놓고 스님께 대들던 그때 상황이 지금도 가슴에 역력하다.  

 

1980년 7월호(통권 69호)와 8월호(통권 70호)에 실린 조용명 스님의 글을 현대 문법으로 일부 교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