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이는 중노릇하지 말라”던 한글 보살, 운허 스님

연재 근현대 스님들의 수행과 사상

2024-02-22     효신 스님
운허 스님

한글 보살

‘큰법당’은 대웅전을 우리말로 옮긴 한글 표기다. 이 한글 편액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건 곳은 경기도 봉선사로, 1970년 법당 중건을 하면서 한글 불사가 이뤄졌다. 큰법당 기둥에도 “온 누리 티끌 세어서 알고, 큰 바닷물을 모두 마시고, 허공을 재고 바람 얽어도, 부처님 공덕 다 말 못 하고”(『화엄경』 보현보살 게송)의 우리말 주련이 걸려 있다.

한글 전용 시대를 사는 요즘에도 ‘큰법당’이라는 한글 편액을 건 절을 만나기는 드물다. 한자의 기세에 눌려 있던 그 시절에 봉선사가 과감한 한글 개혁을 취할 수 있었던 건, 당시 주지였던 항일투사 독립운동가 출신 운허(耘虛, 1892~1980) 스님 덕분이다. 

운허 스님은 생전 유언으로 “‘경전 읽고 번역하던 운허당 법사의 관’이라고 한글로 영정을 써 달라, 이 몇 자가 나의 생애를 다 표현할 것”이라고 신신당부할 만큼 한글 번역에 혼신의 힘을 쏟아낸 분이다. 운허 스님이 불문(佛門)에 들어와 『한글 대장경』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은 그의 항일 독립투사의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 침략국인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민족정신의 고취가 반드시 전제돼야 하는데, 그 계몽을 위한 의식개혁의 기본 수단은 우리말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항일 독립운동가, 교육자, 언론인이었던 운허 스님이 한글 보살로 일생을 마칠 때까지 그 정신들은 하나로 덩이져 있었다. 

 

봉선사 사찰 순례에서 (맨 앞줄 왼쪽에서 4번째)운허 스님과 오른쪽에 광덕 스님

항일 독립투사의 길, 교육불사와 언론활동

이학수라는 본디 이름에서 1962년 이북 5도청에서 ‘이운허’로 고칠 때까지 스님이 사용한 이름은 ‘이시열, 조우석-김종봉-박명하-박용하’ 등으로, 모두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가명이었다. 스님은 평안북도 정주군 신안면 어호동의 유복한 전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당시의 스님 집안 배경은 삼종형(8촌 형)이었던 춘원 이광수 『자서전』에서 엿볼 수 있다. 열한 살에 부모를 잃은 이광수는 친척 집을 전전하던 시기를 보낸 적이 있었다. 외가에서 재당숙댁(운허 스님의 집)으로 갈 때 소회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우리 액내에서는 가장 잘살고 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식구들이 사는 재당숙 집으로 간다. 이 집에는 노적도 있고, 종도 있고, 아직도 숙모들이나 누나들은 대문 밖에를 안 나오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내 맏당숙은 사랑문을 열어 놓고 앉아서 접빈객을 하였고, 가운데 아저씨는 선생이었고, 작은 아저씨는 접장으로 서전을 읽는 새서방님이었다. 백(栢, 이학수=운허 스님)이라는 내 삼종제(8촌 동생)는 나와 동갑으로서 이 빛난 가문의 외아들로 귀염을 받고 있었고, 내 작은 재당숙들은 여자들의 청을 들어 『삼국지』나 『수호지』를 진서 책대로 조선말로 번역해 읽어 주었다. 나는 그것이 무척 부러웠다. … 내가 백을 대할 때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구겨짐 없이 쭉 펴인 천진난만한 성품이었다(『이광수 문학전집- 그의 자서전』(2013, sinyul)).”

유년기 시절 스님의 넉넉한 형편과 화목한 집안 분위기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학식 깊은 집안의 자제답게 스님은 기본교육(한학 『사서』 과정)을 마치고, 열일곱에는 측량학교를 다녔다. 그것은 열세 살(1904년)에 결혼해 열일곱에 딸(이가란)이 태어나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함이었다. 열여덟 되던 봄에 취직해 1910년(국권상실기)까지 임야측량에 종사했다. 그 이후 서른 살에 이르러 불문에 귀의하기까지 만주를 중심으로 처절한 항일 독립투사의 길을 걸었다(물론 스님이 된 후에도 조선혁명당에 가입하여 상해·만주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11년 대종교에 입문하면서 스님은 이름을 ‘이시열’로 바꾸고(호는 ‘단총’), 부산 동래(1909년 10월)에서 조직돼 만주까지 확대된 항일 청년 비밀결사 조직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했다. 이학수에서 이시열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당시 대종교(단군신앙)로 입교함은 종교를 가진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민족정신의 고양을 통한 항일의식의 발로였다. 3·1운동의 불쏘시개가 된 ‘무오독립선언’(1918년)에 참여한 39명 대부분이 대종교인인 데서도 알 수 있듯, 존재 자체가 민족해방 이데올로기인 대종교를 빼고 우리나라 항일 독립운동사는 성립되기 어렵다. 단 한 명의 친일파도 존재하지 않았던 유일한 곳이 대종교였다. 그러나 해방 후,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한국의 정계와 학계를 장악하면서 대종교 연구는 지금까지 금기시된다. 

운허 스님의 대종교 입문은 한글 역경사업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교육자이자 언론인이었던 스님의 본디 성품에서 문자(한글)의 중요성을 인식했겠지만, 대종교에서의 조선어(한글)학자들과의 교류에서 더 깊게 영향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글의 대표주자 주시경도 개신교도에서 대종교로 이동했다. 주시경의 대종교로의 이동은 당연히 그 제자들도 함께하게 됐고, 스님은 이들의 영향으로 조선어학회도 참여하게 됐다.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로 몰려든 기독교는 문화의 전달과 함께 성서 보급을 위해 조선어학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한글학자들이 기독교인이 됐고, 그때 생성된 결과물의 파급력은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독교는 『한글 성서』의 대중화와 함께 침략국의 종교(불교)와 다른 모양과 색깔로 변별력을 띠면서 자기검열의 시간을 이 시기에 형성해 사회의 암묵적 동의를 받아냈다. 반면에 한국불교는 침략국의 불교라는 동색 옷으로 인해 자기반성 및 정체성 확립을 사회적으로 확고히 이뤄내지 못했다. 근대의 시간을 겪지 못한 채 현대로 넘어와 버린 안타까운 경우가 한국불교다.

기독교는 전도를 위해 『성서』의 한글 번역에 매진했고, 이를 읽게 하려고 학교를 세워 한글을 가르치니 한글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은 없다고 할 만큼 진행됐다. 한글 전파의 입장에서 볼 때 국어학자들은 기독교에 대한 고마움을 가졌고, 광복 후 “한국인이라면 한글 보급에 공헌한 기독교에 감사해야 한다”고 피력한 최현배, 김윤경 등에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종교의 입장에서 뒤집어보면, 쉬운 한글로 인해 기독교의 전파가 그만큼 용이했다는 것이다. 

운허 스님은 한글학자들과의 접촉에서 이 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글 역경불사의 당위성을 “예전에는 국문이 없어 번역을 못 했으니 한문으로 배웠지만, 지금은 우리말로 번역한 것을 배우면 글 읽기 위해서 애쓰지 않아도 된다. 뜻만 알면 되지 않는가?”로 밝혔다. 빠른 전파력을 지닌 문자 힘의 무게를 스님은 교육불사와 언론활동을 통해 더 절감했을 터이다. 

스님은 만주에서 1913년부터 1919년까지 교사 및 동창(東昌)학교, 홍동(興東)학교의 설립운영으로 교육불사를 이어갔고, 3·1운동(1919년)이 일어나자 독립운동과 동시에 등사판 통신인 <경종> 발행, 남만주 한족회 기관지인 한글신문 <한족신보>의 사장과 주필을 역임하며 매주 2회(월요일, 목요일)씩 간행, 일제에 의해 <한족신보>가 폐쇄된 후에는 새 기관지 <신배달>(삼원보 배달촌)을 매주 2회씩 간행하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특히, ‘임시정부 개조에 대하여’라는 스님의 사설은 울림이 컸다. 

스님(이시열)의 예리한 문필력에 대한 평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1920년 2월 3일)에 잘 나타나 있다. “(스님의) 평론은 글자마다 단어마다 모두 열렬한 애국지성과 공정한 판단으로부터 나왔으며, 그 중 한 편은 본 신문에서 전 호에 이미 전재했다. 우리는 먼저 이 신문 집필자의 순결한 성의와 사심 없는 태도에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고 밝히고 있다. 스님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문필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광수는 “삼종제와 함께 노래와 고풍 한시를 짓기를 내기했으나 언제나 내가 졌다. 백(栢, 운허 스님)이는 무엇에나 나보다 재주가 승하였다”고 평했다. 

스님은 1921년 일본 행정관서와 경찰서 등을 파괴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가 탈출하는 과정에서 강원도 평강 봉일사에 몸을 숨기러 들어갔다가 불문에 귀의하게 됐다. 이때 인연을 맺은 은사인 경송 스님은 “중노릇 잘하여 조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주면 그것도 독립운동”이라는 가르침을 줬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글 편액을 건 봉선사.
대웅전은 ‘큰법당’이고, 기둥에도 우리말 주련이 걸려 있다.

 

스님의 당부

걸을 때를 제외하곤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을 정도로 스님은 한글 역경불사에 매진했는데, 그 간절함은 “부처님의 본의대로 글과 뜻이 옮겨지고 읽는 이가 감격토록 아름다운 문장 이뤄 한글로 된 대장경이 집집마다 모셔지고, 누구든지 읽게 되어 지혜로운 가르침이 온 누리 곳곳마다 두루 펼쳐지이다”라는 ‘역경발원문’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제자가 스승의 건강을 위해 꿍쳐둔 약 지을 돈도 모두 한글대장경을 펴내는 데 사용하게 할 정도로 스님의 모든 행적은 한글 역경불사로 연결됐다. 당황해하는 제자에게 “그 돈으로 약을 지어다 먹으면 나 혼자만 약을 먹게 되지만, 그 돈으로 『한글 금강경』 책을 펴내어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 그건 부처님 보약을 여러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먹이는 일이니, 그렇게 하자구나”며 설득했다. 그러나 무조건 아낀 것은 아니었다. 가난한 이(문인, 교수, 학자)의 책에는 반드시 책값 및 우편 비용과 함께 손수 ‘귀한 책, 감사히 잘 받았다’는 정중한 편지를 써 보냈다. 스님은 그 당시에도 이른바 재능기부와 재능착취의 경계를 분명히 행하고 있었다.  

사리분별 분명한 운허 스님의 양심적 도덕관은 비구와 대처승의 정화운동을 대하는 태도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스님은 동참을 요구하는 양쪽을 향해 “나는 이쪽저쪽 다 자격이 없다”며 점잖게 거절했다, “지금은 비구승이라 하겠소이다만, 나는 엄연히 처와 자식을 두었던 사람인데 그런 내가 감히 어찌 남의 허물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서 나는 불교정화운동에는 양심상 동참할 자격이 없소이다”며 그 이유를 밝혔다.
입적하기 9년 전(1972년 1월 9일)에 당신 사후의 일을 당부한 ‘다경실 유촉(茶經室遺囑)’에서도 소박하고 어질고 맑은 스님의 성품이 잘 담겨 있다. 

“□장례는 3일장으로 극히 검약하게 하라. □화환, 비단 만장은 사절하라. □대종사라 칭하지 말고 ‘법사’라고 쓰라. □문집을 간행하지 말라. □마음 속이는 중노릇하지 마라.”

‘마음 속이는 중노릇하지 말라’는 스님의 당부는 수행자의 가장 기본 덕망이나 현실에선 본분을 잊고 쉬이 간과한다. 그래서 묻는다. “당신은 마음에 떳떳한 중인가?”  

 

효신 스님
동국대 강사, 철학과 국어학 그리고 불교를 전공했으며 인문학을 통한 경전 풀어쓰기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