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의 뭉클함을 안겨주었던 만 배 수행

만배수행기

2007-09-17     관리자
꽝! 꽝! 망치가 날아온다. 내 몸 위로…
머릿속은 하얗다. 남을 위해 살게 해달라는 소원도 사라졌다.
평생 불법에 의지해 살겠다는 피맺힌 다짐도 온데간데없다.
가족도, 알음알이도, 선업에 대한 욕망도 모조리 자취를 감췄다.
내 머리 속에는 부처님이 없다. 온전히 남은 것은 내 육신의 고통,
‘아프다’는 아우성뿐…

한 평 위 좌복 위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간절한 유혹, ‘도망가자’뿐…
입(口)으로 사는 것은 모두 가짜라는 생각뿐…

이 년 전 초겨울. 나의 ‘만 배’는 처절했다. 내 두 다리로 가지 못하고, 엉덩이를 걸레질하듯 질질 끌고 화장실을 가야 했던 힘겨움이었다. 이런 모습이 절 수행이 생활화되신 분들에게는 ‘엄살’로 보일까? 하지만 하루 24시간 이내에 만 배를 완수해야 하는 일은 아무리 겸손한 태도로 양보한다 해도 ‘죽을 똥(?)’을 싸며 해야 하는 고행임에 틀림없다. 불법과 인연을 맺은 이후에 내가 언제 ‘죽을 똥’을 싸며 부처님 전에 수행해 본 적이 있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만 배’ 동참을 흔쾌히 수락했고 설레는 마음으로 임했다.

그러나 금방 후회했다.
육신은 자신을 예뻐해 주고, 비위 맞추듯 달콤 쌉싸롬하게 먹여주면 내 것이다. 하지만 조복시키려 하고, 아만심의 고개를 내리 누르려 하면 용수철보다 강하게 튀어 오르며 반항한다. 이게 내 몸인지, 내 지옥 덩어리인지 “몸이 말을 안 듣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허약한 정신력을 탓하기보다는 습(習)에 익은 미욱스런 육체가 주인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살살 달래면 육체는 따라오지만 조금이라도 낯선 과부하가 걸리면 처절히 복수하는 육체를 본다.

1만 배, 웬 눈물 헛웃음?

1배(밤 12시), 부처님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찬탄합니다.

500배, 부처님만 떠올리면 그저 감사한 마음뿐, 피어나는 신심 그리고 가족들의 얼굴.

2800배, 온 몸을 다듬이 방망이로 난타당하는 듯한 통증
(3400배 오전 6시경 김칫국에 말은 밥을 모래알 넘기듯 훌훌 삼킨다)

4700배, 포기, 포기하고 싶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이것만이 수행이 아니잖아. 잔꾀가 번뜩인다.

(5200배, 오전 11시경 쏟아지는 졸음을 반찬삼아 점심공양을 한다)
6100배, 도망치고 싶다. 이 좌복에서 1평도 안 되는 이 천 조각 위에서 그런데 이놈의 좌복이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난파선의 구명선 같다. 한걸음만 옮겨도 중생의 어둠 속으로 쑤욱 빨려들어가 버릴 것 같은, 그래도 가야지 ,못 살겄네 , 도망쳐야지.

(7100배, 오후 5시경 실패의 예감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한다)

8600배, 부처님이 도대체 뭐꼬 소원? 배부른 소리허고 자빠졌네. 가족의 얼굴도 까마득히 사라진지 오래. 제발 이 육신 쉬게 해다오. 여기서 끝내고 싶다. 절하다 도망쳤다는 사람들 난 이미 도망친 지 오래네.

1만 배, 웬 청승맞은 눈물 헛웃음이 털레털레 비어져 나오네. 부처님은 어디 계십니까? 안 보이요! 어디 갔소?

절 수행을 통해 아만심을 보고

밤 11시 45분. 23시간 45분이 걸리고서야 만 배는 끝이 났다. 걸레보다 무겁고 거추장스럽던 육신은 아무래도 질려 하는 것 같다. 온전히 자신이 졌음을 인정한다. 육신의 격렬한 저항을 물리친 내 자신에게 기특했다고 칭찬한다. 절의 공덕은 참으로 많다. 전생의 지은 죄업을 없애주고,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삼독심을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하며, 아름다운 몸을 받게 해준다.

또한 무슨 말을 하든지 남들이 믿게 되며 어느 곳에서나 두려움이 없고 부처님이 항상 보호해 준다. 마침내는 극락왕생, 열반의 경계를 터득하게 해준다는 것이 절의 공덕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 절 수행을 통해 가장 절절하게 참회의 뭉클함을 안겨주었던 것은 바로 아만심을 보게 된 것이었다. 어찌 그리 교묘하게 가려져 있었던지, 어찌 그리 절묘하고 치밀하게 내 속에 뿌리내리고 있었던지 뻐꾸기 새끼를 내 새끼로 키우는 탁란을 당한 기분이었다.

‘화 내지 않는 온순한 사람’ ‘감성적이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 ‘똑똑하고 남에게 잣대가 될 수 있는 사람’ 좋은 소리만 기억하자면 대략 이러한 평가를 받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얼마나 큰 집착 덩어리였는지 얼마나 치명적인 내 삶의 ‘독’이었는지 이제는 어슴프레 알 것 같다. 그야말로 ‘개성’ 혹은 ‘카리스마’ ‘착한 사람’ 등의 평가들은 내 속에서 ‘아상’과 ‘자만심’을 드높이는 데 훌륭한 보약들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관념적인 알음알이가 깨어지고

참회심. 지난 삶을 돌아보면 발등을 찧고 싶으리만치 부끄러운 중생심들이 새까맣게 올라온다. 그저 쑥스럽고 붉어지는 얼굴을 감당할 길이 없다. 허나 이러한 ‘견고한 벽돌담 같은 중생심’의 모습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인연들이었다고 애써 위안해본다. 만 배 이후 지금까지 거의 빠지지 않고 108배로 나의 아만심을 지켜보며 살고 있다. 국가와 사회라는 거창한 틀보다는 내 가정 안에서 가족들에게 먼저 아만심이 고개 들지 않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만 배를 하기 위해 1부터 100까지 일련번호를 매기고 100배를 할 때마다 동그라미 표시를 했다. 1배가 마치 저승사자의 팔에 팔짱을 끼라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도망치고 싶을 때 90이라는 숫자 위에 ‘아빠 꼭 힘내!’라는 몇 글자가 어찌 그리 고맙던지 지금도 자식 부처님의 목소리를 잊지 않는다. 관념적인 알음알이에 쩡~ 하고 균열을 준 만 배 수행은 언제나 내 가슴속에서 꿈틀댄다. 내 인생이 흔들릴 만한 ‘통곡의 수행경험’은 없었어도, 만 번을 ‘무릎 꿇고 고개 숙인’ 소박한 수행 경험은 오늘도 절을 하게 한다. 그 사실에 나는 그저 감동하고 또 감동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