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곧은 수행자의 귀의처 뜻 잃은 선비들의 터전, 설악산

[마음속에 담아둔 절]

2023-12-26     노승대
설악산 전경. 사진 불광미디어

설악산은 몸집이 크다. 인제, 양양, 고성군과 속초시에 걸쳐 있다. 하지만 화강암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다 동해와 가까이 붙어 있어 더욱 수려하고 기이하다. 최고봉인 대청봉의 높이는 1,708m로 남한에서는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 다음으로 높다. 

설악산이라는 이름 외에도 설산, 설봉산, 설화산으로 불렸다. 『동국여지승람』에는 “한가위에 덮이기 시작한 눈이 다음 해 하지에 이르러 녹는다 하여 설산이라 한다”고 했다. 

설악산은 영역이 넓다 보니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눈다. 주봉인 대청봉과 북쪽의 공룡능선·마등령·미시령과 서쪽의 한계령에 이르는 능선을 설악산맥이라 하고, 그 동쪽 지역을 외설악, 서쪽 지역을 내설악이라 한다. 또 대청봉 동북쪽에 있는 화채봉과 서쪽의 귀때기청봉·대승령·안산을 경계로 그 남쪽을 남설악이라고 부른다. 

 

인제 한계사지 남 삼층석탑(보물). 사진 유동영

모든 시름을 놓아라

한계령은 백두대간에 놓인 다른 고개들처럼 도로가 뚫리기 전까지 등짐장수들이 넘나들던 길이다. 차가운 시내가 사시사철 흘러가니 한계(寒溪)라고 이름 지었다. 통곡의 세월을 보냈던 김시습도 이 한계의 물을 보며 자신의 심정을 그대로 읊었다. 

“嗚咽寒溪水(오열한계수)     오열하는 한계의 물은
 空山日夜流(공산일야류)     빈 산을 밤낮으로 흘러가는구나.”

그만큼 한계령은 긴 계곡을 가지고 있어 넘나드는 고갯길도 길었다. 양희은의 <한계령> 노래를 들으며 인제에서 한계령으로 들어선다. 한계사지로 가기 위해서다. 한계사지는 장수대에서 200m 거리에 있다. 장수대에 내린 등산객들은 등산로를 따라 대승폭포나 대승령 쪽으로 향하기 때문에 이 절터에 찾아오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안내판도 없고 감추어진 듯 숨어 있는 절터다. 

한용운 스님이 정리한 『백담사사적』에 의하면 한계사는 신라의 자장율사가 647년에 처음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이 자주 나서 여러 번 절 자리를 옮겼는데 그때마다 절 이름을 바꿨다. 운흥사(790), 심원사(987), 선구사(1434), 영취사(1447)로 이름을 바꿔 달았으나 결국 세조 3년(1457)에 지금의 백담사 자리로 옮겼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백담사가 바로 이 절이니 한계사는 백담사의 전신인 셈이다.  

지금 한계사지 절터에는 석물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석물만 보아도 이 절이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은 틀림없다. 금당터 앞의 긴 석축을 보면 자연석을 이가 맞도록 쌓았다. 전형적인 신라양식이다. 한계사지에 남아 있는 남 삼층석탑과 북쪽 언덕 위에 세워진 북 삼층석탑(보물)도 신라 후기의 양식이다. 남 삼층석탑은 동부산장을 지으면서 임의로 옮겨 놓았던 것을 발굴 조사하며 원위치에 다시 세웠다.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국보). 사진 불광미디어

선종의 탯자리, 진전사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宗祖)는 도의국사다. 종조는 종단을 처음 일으킨 스님을 일컫는 말이다. 세간의 한 집안으로 치면 시조와 같은 의미다. 도의국사는 760년경에 태어나 선덕왕 5년(784) 사신을 따라 당나라로 건너갔고 37년간을 중국에서 수행했다. 

도의국사는 헌덕왕 13년(821)에 귀국해 서라벌에 들어가 선종을 소개했으나 당시 신라 사회의 사상적 주도권은 교종이 쥐고 있었다. 교종은 경전의 가르침을 중시했기에 선종의 파격적인 주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의국사는 인연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음을 알고 양양 진전사로 들어가 은거하면서 제자들을 길렀다. 그러나 선의 향기는 차츰 온 천하에 퍼졌고 많은 구도자가 진전사로 몰려들었다. 도의국사는 오직 염거(?~844)화상에게 법을 전했고 염거화상은 보조 체징(804~880) 스님에게 전법했다. 보조 체징 스님은 희강왕 2년(837) 당나라로 건너가 여러 선사를 친견한 뒤 ‘나의 조사가 전한 법 이외에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다’며 3년 만에 귀국한 후 전남 장흥 가지산의 보림사에 가지산문을 열었다. 

도의국사가 처음 선종을 전한 이래 신라 말에는 9산선문이 이뤄졌고 선종의 가르침은 고려와 조선을 거쳐 지금의 조계종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와 정신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당연히 조계종단에서는 도의국사를 종조로 모시게 된 것이다. 

도의국사가 머물던 진전사터에는 승탑 한 기와 진전사지 삼층석탑(국보) 한 기가 남아 있다. 진전사터에 있었던 부도(승탑)는 일찍이 보물로 지정됐지만 누구의 승탑인지 확인할 수 없었기에 ‘진전사지 부도’로 불렸다. 

당시의 부도는 아무나 세울 수 없는 시대였다. 진전사터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부도였기에 결국 도의국사 승탑으로 확정 지었고, 지금은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보물)으로 공식 명칭이 변경됐다.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보물). 사진 불광미디어
진전사지 삼층석탑 기단에 새겨진 아수라상(왼쪽)과 팔부중상. 사진 불광미디어

도의선사탑은 우리나라 승탑의 시작을 알려주는 탑이다. 선종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석탑만 있었고 승탑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웠던 지장, 의상, 원효대사 등 어느 고승도 승탑이 전해지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다. 

국보로 지정된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석탑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신라 석탑의 기준인 석가탑에는 아무런 조각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후기로 갈수록 많은 조각이 나타난다. 진전사지 삼층석탑에는 1층 몸돌 사방에 각각 부처님이 돋을새김으로 나타나 있고 상층기단 면석에는 8부신중이 새겨졌다. 특이하게 하층기단 면석에는 한 면에 천인(天人)들이 두 명씩 모두 8명이 앉아 있다. 

 

설악산 봉정암. 사진 불광미디어

내설악에 들다

외설악은 바다로 향해 있지만 내설악은 내륙 속에 있어 더욱더 내밀한 지역이다. 수행처나 은둔처로 삼을 터가 많다. 그래도 내설악의 암자를 꼽으라면 단연코 봉정암이 첫머리에 든다. 

봉정암은 자장율사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성지다. 자장율사는 당나라로 건너가 수행하다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 등을 받고 선덕여왕 12년(643)에 귀국했다. 귀국한 후 진신사리를 다섯 곳에 봉안했는데 그중 한 곳이 바로 봉정암(鳳頂庵)이다. 

자장율사도 당연히 동국 제1명산 금강산에 진신사리를 봉안하려고 들어갔다. 그러나 어디선가 나타난 오색 빛 봉황새가 길을 인도해 며칠을 따라가니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친 곳에 이르렀고 봉황은 한 바위 꼭대기에서 사라져 버렸다. 봉황이 사라진 바위는 봉황을 닮기도 했고 부처님을 닮기도 했다. 어느 각도에서 보면 불보살이 합장한 모습이다. 봉황이 바로 부처님의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자장율사는 이곳이 바로 인연 처임을 알고 진신사리를 봉안했고 조그만 암자를 세웠다. 봉정암의 시작이니 자장율사가 귀국한 다음 해의 일이다. 

봉정암 오층석탑(보물). 사진 유동영

봉정암 오층석탑(강원도 유형문화재)은 봉정암을 상징하는 석탑이다. 한국전쟁 때도 손상을 입지 않았다. 큼직한 바위 위를 돌출되도록 깎아내고 바로 석탑의 몸돌을 얹었다. 바닥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양식으로 보아서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곧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봉안했을 때는 당연히 탑이 없었다. 

그래도 봉정암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됐다는 표식이 있다. 곧 봉정암에서 가야동계곡으로 넘어갈 때 만나는 오른쪽 큰 바위 면에 ‘석가사리탑(釋迦舍利塔)’이라고 한문 석각을 새겨놓은 것이다. 그 큰 바위 전체가 진신사리를 비장한 사리탑이니 정확한 장소는 더더욱 알 수 없다. 

오세암(五歲庵)도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이다. 이곳에서 조그마한 선실을 짓고 머물던 자장율사는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관음암이라고 이름했다. 주위의 암봉들이 마치 연꽃잎처럼 둘러싸고 있어 깊고도 그윽한 암자다. 

조선 초기까지 면면히 명맥을 이어오던 이 암자에 김시습(1435~1493)이 찾아들었다. 『백담사사적』에는 “세조 2년(1456) 김시습이 관음암에 와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고 기록했다. 이해 6월 김시습은 사육신의 버려진 주검을 거둬 노량진에 묻었으니 그의 나이 22세였다. 

고종 33년(1896)에는 한정옥이 오세암으로 들어온다. 바로 훗날의 한용운 스님이다. 건봉사 등 선방에서 수행하면서도 마음의 의심을 풀지 못했던 한용운 스님은 1917년 12월 3일 밤 10시경 오세암에서 바람에 물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비로소 마음 경계가 열렸다. 

“男兒到處是故鄕(남아도처시고향)    남아가 가는 곳마다 고향인 것을
幾人長在客愁中(기인장재객수중)     그 몇이나 나그네의 근심 속에 잠겨 있었나.
一聲喝破三千界(일성갈파삼천계)     한 소리 크게 질러 삼천세계를 깨뜨리니
雪裡桃花片片紅(설리도화편편홍)     눈 속의 복사꽃이 조각조각 붉구나.”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저서로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 『사찰에 가면 문득 보이는 것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