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도 중생도 다 버린 파격승破格僧, 경허 스님

[근현대 스님들의 수행과 사상]

2023-10-30     효신 스님
경허 스님 진영

부처와 중생의 무경계

세간법과 출세간법은 층위와 방향이 달라 서로 만나기는 어렵다. 세간의 눈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이치가 바로 출세간법이다. 초월의 경계를 지향하는 출세간의 언어는 때론 상식을 벗어난 말장난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일상의 눈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모순적 삶, 언어의 유희를 일평생 즐긴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빈거울(鏡虛) 스님, 성우 경허(惺牛鏡虛, 1849~1912)이다.

만년에 홀연히 절을 떠나 북녘을 떠돌아다니고,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함경도 갑산 웅이방 도하동 서재에서 입적하기까지(64세, 1912년 4월 25일) 스님의 행은 세간의 잣대로는 경계 대상이었다. 이중적인 경허 스님의 모습은 해석하기 참으로 난감하나 그의 도심(道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이런 경허 스님의 일생을 가장 압축적으로 잘 드러낸 한 편의 시가 있다. 

佛與衆生吾不識(불여중생오불식)
부처니 중생이니 나는 모른다. 
年來宜作醉狂僧(연래의작취광승)
평생을 그저 술 취해 미친 중이나 되리.
有時無事閑眺望(유시무사한조망)
어떤 때는 일없이 시선을 팔면,
遠山雲外碧層層(원산운외벽층층)
먼 산이 구름 밖에 층층이 푸르구나.

단순히 언어의 경계에서 보면 그저 술 취한 광기의 중으로 읽힐 수 있으나, 선의 경지에서 보면 경계를 초월한 도인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부처니 중생이니 나는 모른다”는 말은 ‘부처와 중생의 무경계’에 대한 반의적인 표현을 내포하고 있다. ‘부처도 중생도 다 버리라’는 선견(禪見)의 입장에서 알음알이를 벗어난 초월의 언어로 노래하고 있다. “어떤 때는 일없이 시선을 팔면, 먼 산이 구름 밖에 층층이 푸르다”는 스님의 심경은 “바루 하나 들고 천 가의 밥을 빌러” 다녔던 포대화상의 모습이 겹쳐지는 장면이다. 

천장암의 뱀 사건은 경허 스님의 수행력(선정의 힘, 定力)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어느 여름날 밤, 상좌인 만공 스님이 등불을 들고 큰방에 들어가니 어둠 속에 경허 스님이 누워 있었다. 그런데 등불을 비추니 경허 스님의 배 위에 시커먼 독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만공 스님은 너무 놀라 “지금 스님 배 위에 독사가 앉아 있어요”라며 소리 질렀다. 경허 스님은 담담히 “실컷 놀다가 가게 그냥 내버려 둬라”며 개의치 않았다. 만공 스님은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굴렀는데 독사가 똬리를 스스로 풀고 스르르 배 위에서 내려와 뒷문으로 나갔다. 그제야 경허 스님은 “이런 일을 당했을 때는 적어도 마음에 조금도 동요됨이 없어야 공부가 된다”고 만공 스님을 힐책했다.

경허 스님이 쓴 천장암 ‘염궁문(念弓門)’

 

‘콧구멍 없는 소’

경허 스님이 참선 수행 선승으로 재발심하게 된 계기는 환속한 은사 계허 스님을 만나러 한양으로 가는 길에서 일어났다. 스님은 심한 폭풍우를 만나 비를 피하려 마을을 찾았으나, 마침 돌림병이 퍼진 마을에서는 모두 문을 걸어 잠그고 그의 청을 받아 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마을 어귀 당산나무 아래에서 밤을 샜다. 이때 본인도 돌림병에 걸려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껴, 본인의 공부 수준을 자각하고는 생사 해결을 위한 재발심을 하게 됐다.

스님은 동학사로 되돌아와 먼저 학인들을 돌려보낸 후,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나귀의 일도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 왔다(驢事未去 馬事到來: ‘불법의 대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영운靈雲선사의 화답어)’를 화두로 간택해 정진에 들었다. 외부와의 유일한 통로는 주먹밥을 넣을 수 있도록 방문 아래 만든 구멍이었다. 졸음을 쫓기 위해 목 밑에 송곳을 꽂은 널빤지를 받쳐 놓고 그의 용맹정진이 시작됐다. 그런데 스님의 견처는 엉뚱한 곳에서 터져버린다.

석 달이 지난 동짓달이었다. 당시 스님의 시봉자는 경허 스님의 사제 학명 스님의 상좌인 사미 원규였다. 학명 스님은 지나던 길에 제자 원규의 부친인 이 처사를 찾아갔다. 이 처사는 한 소식을 이룬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스님은 대화 중에 “중노릇 잘 못하면 시은에 대한 업으로 소로 태어나지만, 소가 되더라도 ‘코뚜레 뚫을 콧구멍이 없는 소가 되면 된다’”는 이 처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상좌 원규에게 이 말의 이치를 정진 중인 경허 스님께 알아 오도록 시켰다. 경허 스님은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라는 원규의 말에 깨치게 된다(1879년, 12월 보름날). 그야말로 남의 일로 도(道)를 깨치게 됐다.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處)’라는 말은 중국  법안종의 종주 청량 문익(淸凉文益 또는 법안法眼, 885~985)선사의 어록(『청량법안익선사어』·『금릉청량원문익선사어록』, 줄여 『법안록』)에 나오는 표현이다. 경허 스님은 이 말을 듣자 “백천 가지 법문과 헤아릴 수 없는 묘한 이치가 당장에 얼음 녹듯 기와가 깨어지듯” 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스님은 모두에게 참선을 권하는 <참선의 노래>를 부른다.

허다한 신통묘용(神通妙用)의 분명한 내 마음 어떻게 생겼는고?
의심하고 의심하되 고양이가 쥐 잡듯이, 주린 사람 밥 찾듯이,
목마른 이 물 찾듯이, 육칠십 늙은 과부가 아들을 잃은 후 아들 생각 간절하듯,
찰나찰나 잊지 말고 깊이 궁구하여 가되, 일념만년(一念萬年) 되게 하여 
폐침망찬(廢寢忘饌)할 지경에 이르면 대오(大悟)하기 가깝도다.
홀연히 깨달으면 본래 생긴 나의 부처 천진면목(天眞面目) 절묘하다.
아미타불이 아니며, 석가여래가 아닌가.

가고 오고 앉고 누움에 있어 오직 일념으로 정진하면 홀연히 깨달아 본래의 부처를 보게 된다고 한다. 결국 내 부처의 모습이 아미타불이자 석가여래라는 것이다. 석가여래는 세상에 출현해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고, 아미타불은 서방정토에서 중생을 부처의 세계로 맞이하는 분이니 궁극적으로 깨달음의 시작과 끝맺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본래 천진면목의 부처 모습은 아미타불이자 석가여래 두 모습으로 보이나 결국 하나임을 말한다. 그러니, “이 노래를 깊이 믿어 책상 위에 펴놓고 시시때때로 경책하라. 할 말을 다 하려면 바다 같은 먹물로도 다 쓰지 못함이라. 이만 적고 그치니 부디부디 깊이 알기를, 다시 할 말 있으나 돌장승이 아이 낳으면 그때 말하리라”며 여일하게 정진할 것을 강조했다.

경허 스님이 쓴 심우도 병풍, 수덕사 근역성보관 소장

 

중노릇 잘하는 법

아이러니하게도 경허 스님은 후학들에게 계행을 강조했다. 그는 문둥병에 걸린 여자와 동침 등의 숱한 기행으로 그 당시 역행승의 대명사로 인식됐고, 오죽하면 법제자였던 한암 스님이 “법을 따르는 것은 좋으나 행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스님이 <참선곡>에서도 “일체 계행(一切戒行) 지켜가면 천상인간이 수복(壽福)한다”고 하고, <중노릇 잘하는 법>에도 계행을 명시하고 있다.

술은 먹으면 정신이 흐리니 
먹지 아니할 것이요,
음행은 정신이 갈려 애착이 되니 
상관 아니할 것이요,
살생은 마음에 왈칵 성내는 
마음(嗔心) 돋우니 아니할 것이요,
고기는 먹으면 정신이 흐리니 
먹지 아니할 것이요,
거짓말은 내 마음에 사심을 
기르니 아니할 것이요,
도적질은 내 마음에 탐심을 더하니 
아니할 것이요,
파와 마늘은 내 마음에 욕심과 성내는 
마음을 돋우니 먹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머지 일체 것이 내게 해로운 것이니 
간섭지 말지니라.

탐진치 가운데 특히 성내는 마음(진嗔)을 끊기를 거듭 강조하고 재물과 색을 경계해 몸을 잘 살펴야만 공부가 순순히 완성됨을 당부한다. 본인의 기행과는 달리, 계정혜 삼학의 기본 그릇에서 수행의 시작과 마침이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그래서 경허 스님은 출가의 근본 대의를 밝힌다.

잘 먹고 잘 입기 위하여 
중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 되어 나고 죽는 것을 면하고자 
하는 것이니, 
부처 되려면 내 몸에 있는 내 마음을 
찾아보아야 하니, 
내 마음을 찾으려면 몸뚱이는 송장으로 알고, 
세상일이 좋으나 좋지 않으나 다 꿈으로 알고, 
사람 죽는 것이 아침에 있다가 저녁에 
죽는 줄로 알고,
죽으면 지옥에도 가고 짐승도 되고 귀신도 되며, 
한없는 고통을 받는 줄을 생각하여,
세상만사를 다 잊어버리고 항상 
내 마음을 궁구하여, 
부디 신심을 내어 공부할지니라.

중노릇은 ‘잘 먹고 잘 입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처 되어 나고 죽는 것을 면하고자 하는 것’임을 인지하여, 현실의 이고득락(離苦得樂,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누림)의 관점보다는 생사 해탈을 위한 구도심에서 출가승이 되어야 함을 내포하고 있다. 바로 신심을 내는 근본 자리이기 때문이다. 경허 스님이 그러했듯, 예전의 출가는 대부분 어려운 집안 사정에 기인한 경우가 많았다. 역설적으로 세상이 변한 이 시대에서도 한 몸 보존하는 직장의 개념으로 출가를 받아들이고 있다. 보리심이 없는데 무슨 중생교화가 이루어지겠는가?

중이 중노릇만 제대로 하면 세상은 아무 말이 없다. 그 순간, 경허 스님의 말처럼 “산도 사람도 말이 없고, 물 흐르고 꽃이 피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 

 

효신 스님
동국대 강사, 철학과 국어학 그리고 불교를 전공했으며 인문학을 통한 경전 풀어쓰기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