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와 구미 선산] 선산의 탑, 통일신라를 말하다

탑과 사지

2023-09-22     박찬희

“정말 경주밖에 없는 걸까?”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을 꼽자면 제일 먼저 석굴암과 불국사가 떠오른다. 다음으로 경주 남산, 감은사지 삼층석탑, 포석정, 월지(月池, 옛 이름은 안압지)가 뒤를 잇는다. 모두 신라의 수도 경주 지역에 몰려 있다. 경주 이외에 꼽을 만한 지역은 어디가 있을까? 충주에 있는 탑평리 칠층석탑 등 개별 문화유산은 어렵지 않게 떠올라도 지역은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경주에서 서북 방향으로 가면 구미 선산 지역이 나온다. 이곳은 낙동강이 흐르고 강 주위로 너른 들판이 펼쳐지며 산이 주위를 둘러쌌다. 이런 지역은 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고 문화가 발달하기 알맞은 곳이다. 더구나 아도화상이 신라에 처음으로 불법을 전한 곳이 이곳이다. 이 정도라면 눈여겨볼 통일신라의 문화유산이 여럿이지 않을까.
마침 선산 지역에는 통일신라 때 세운 탑들이 전한다. 죽장리 오층석탑(국보), 낙산리 삼층석탑(보물), 주륵사 폐탑이 대표적으로 통일신라 문화의 절정기에 세워졌다. 이 탑들은 ‘공든 탑이 무너지랴’라는 말처럼 오랜 세월 제자리를 굳건하게 지키며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기도 했고, 세월과 인간의 욕심에 무너지기도 했다. 비록 처음 모습과 달라졌어도 탑들은 온몸 깊숙이 간직한 이야기를 언제라도 나눠줄 준비가 됐다.

지금 그 이야기를 들으러 선산으로 떠난다.

죽장리 오층석탑(국보). 죽장사 경내에 있다. 돌을 벽돌 모양으로 만들어 세운 모전석탑으로 분류한다. 높이가 10m에 이르며 벽돌 모양의 오층석탑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탑이다.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마음과 마을을 품은 명작

“정말, 명작이구나!”

선산의 세 탑 가운데 맏이와 같은 죽장리 오층석탑을 먼저 만난다. 죽장사 입구 모퉁이를 돌아서자 탑이 홀연히, 그리고 느닷없이 나타난다. 높이 10m라는 숫자로는 담기 어려운 존재감이다. 탑을 본 순간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탑의 명작으로 널리 알려진 감은사지 삼층석탑이나 고선사지 삼층석탑에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는다.

점점 탑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자 탑은 하늘로 날아오를 기세다. 탑 바로 앞에 서면 탑은 하늘에, 부처님께 잇닿으려는 듯 끝 모르고 올라간다. 이 정도라면 사람들의 기원이 세상 모든 부처님에게 충분히 가닿을 수 있겠다. 탑이 거대하면서도 경쾌하기는 어려운데 이 탑은 두 가지가 적절하게 어우러졌다. 탁월한 수평과 수직의 비례 감각으로 탑을 설계한 통일신라 장인의 안목에 고개를 숙이고 통일신라의 문화적 역량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죽장사와 죽장리 오층석탑

들뜨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탑을 찬찬히 살펴본다. 한옥 지붕처럼 만든 옥개석이 일반적인 탑과 다르다. 경사를 이루며 내려오는 매끈한 선이 아니라 계단처럼 층단을 이뤘다. 이 형식은 주로 벽돌로 만든 탑인 전탑에서 보인다. 그래서 이 탑을 전탑을 본떠 만든 모전석탑으로 분류한다. 독특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1층 몸돌에는 감실이라고 부르는 부처님을 모시는 작은 방을 마련했다. 대개 석탑에는 감실 대신 문의 모습만 새기거나 아예 아무것도 새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연구자들은 이 탑이 8세기 중엽, 혹은 그 이전에 세워졌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번에는 탑을 돌 차례다. 탑을 돈다는 건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로 모아 부처님께 전하는 거다. 또한 탑을 만든 사람들의 마음을 만나는 거다. 탑을 돌자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던 탑의 부재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법처럼 그 숫자가 점점 불어난다. 현재 이 탑은 무려 171매의 부재로 구성됐다. 이 정도라면 통일신라 사람은 블록 쌓기의 달인이라고 할 수밖에. 

몇 바퀴 돌자 이번에는 통일신라 사람들이 보인다. 탑을 설계하고 돌을 깎고 쌓던 장인,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시주한 백성들, 일이 잘 끝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운 스님들, 탑이 무사히 완성되기를 바라며 날마다 합장한 선산 지역 사람들. 탑 부재 하나하나에 그 마음들이 고스란히 담겼다. 마음 하나하나가 모여 탑을 세웠고 탑은 소중한 마음들을 깊이 품고 길이 전했다. 

죽장리 오층석탑 감실

탑을 돌다 처음에 섰던 감실 앞에서 멈춘다. 그리고 그동안 감실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합장했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통일신라부터 지금까지 시대는 달라도 그들은 건강과 행복과 더 나은 세상을 빌며 이 자리에 섰다. 텅 빈 듯한 감실은 그들의 소원으로 가득하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마음은 둥글게 부풀고 감실은 따뜻해 보인다. 앞으로 사람들의 무수한 바람이 감실 안으로 흘러 들어가도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감실은 결코 넘치는 법 없이 늘 한자리를 남겨둘 것이다. 

이번에는 탑을 벗어나 탑 뒤편에 자리 잡은 대웅전 앞으로 간다. 그곳에서 탑이 있는 풍경을 바라보다 깜짝 놀란다. 절 앞으로 마을이 이어지고 마을 앞으로 너른 들판이 펼쳐지고 산이 들판을 감싸 안았다. 탑과 절은 사람들의 삶터를 지켜보는 곳에, 마을과 이어지는 곳에 자리 잡았다. 마을 사람들은 삶터에서, 일터에서 탑을 보며 부처님이 늘 자신을 살펴보고 보호해 준다고 믿지 않았을까? 많은 것이 사라져도 탑은 늘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듬는다.  

 

낙산리 삼층석탑(보물)

낙산리 삼층석탑-아름답지 않은 탑은 없다

“통일신라 때였다. 선산 지역에 살던 오빠와 누이동생은 누가 아름답고 멋진 탑을 쌓는지 내기를 했다. 누이동생은 죽장리 오층석탑을 쌓았고 오빠는 낙산리 삼층석탑을 쌓았다. 내기 결과 더 멋진 탑을 쌓은 누이동생이 이겼다.”

이 지역에 전하는 두 탑을 둘러싼 오누이 전설이다. 낙산리 삼층석탑이 어떻게 생겼기에 이런 전설이 생겼을까? 이번에는 오빠가 만들었다는 전설 속 탑을 만나러 낙산마을로 간다. 

탑은 작고 조용한 마을 끝자락에 서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국가에서 인정하는 보물이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커 보이지 않는 데다 수준이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는다. 죽장리 오층석탑의 감동이 강하게 남은 탓에 착시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만약 죽장리 오층석탑보다 이 탑을 먼저 보았다면 어땠을까?

죽장리 오층석탑과 다른 이 탑의 매력과 가치를 찾기 위해서는 천천히 걸으며 탑에 스며들어야 한다. 느린 걸음으로 탑 앞으로 가자 탑이 두 팔을 벌려 잘 왔다며 환대하는 것 같다. 잠시 후 탑을 돌기 시작한다. 점점 머릿속에서 죽장리 오층석탑은 사라지고 이 탑이 들어온다. 전설의 선입견을 거두고 죽장리 오층석탑과 비교를 멈추고 만난 탑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정겹다. 

낙산리 삼층석탑. 죽장리 오층석탑과 같은 모전석탑이다.

탑 부재들은 서로 맞물리며 지탱하고 있다. 결코 홀로 있는 부재는 하나도 없다.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된 부재들이 차곡차곡 쌓여 높은 탑이 완성됐다. 천 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버틴 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단단하게 이은 연결의 힘 덕분이다. 탑은 이 앞을 거쳐 간 무수한 사람들에게 인드라망의 의미를 말없이 설법한다. 절은 사라지고 터만 남은 지금도 꿋꿋하게 절터를 지키며 소임을 다하고 있다.

이 탑은 죽장리 오층석탑과 여러모로 비슷하다. 감실이 마련됐고 옥개석 윗부분을 계단처럼 만들었다. 이런 점에서 이 탑도 모전석탑으로 분류된다. 연구자들은 8세기 후반에서 늦어도 9세기 초반쯤 죽장리 오층석탑을 본떠 만들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때부터 낙산리 삼층석탑은 사람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고 오늘도 마을을 내려다보며 마을과 함께 나이 든다. 

낙산리 삼층석탑은 모례마을 남쪽에 있고, 주륵사지는 북쪽에 있다. 이곳이 신라불교의 성지로 조성됐음을 알려주는 유적이다. 

 

주륵사지 폐탑-탑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삼층석탑도, 오층석탑도 아닌 폐탑이라니! 탑이 어떤 상태이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선산 지역에서 마지막으로 만날 탑은 주륵사터에 있는 폐탑이다. 먼저 본 두 탑이 마을에 있는 반면 이 탑은 산속에 있다. 그렇다고 깊은 산속이 아니라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이 마을은 신라불교의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했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아도가 디딘 위대한 첫걸음은 훗날 불교가 신라에 뿌리내리는 소중한 씨앗이 된다.  

계곡을 지나 급한 산길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절터가 나온다. 뒤로는 큰 화두 같은 산이 버티고, 앞으로도 옆으로도 산이 둘러쌌다. 지금까지 본 선산의 두 탑이 있던 곳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절터 풍경도 낯설다. 건물터는 이리저리 흩어졌고 그 사이에 무덤까지 보인다. 게다가 탑이 있는 자리 옆으로 건물터가 나란히 이어졌다. 이런 배치는 탑이 마당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그 옆에 건물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죽장사와 비슷해, 연구자들은 죽장사의 배치가 주륵사에 영향을 줬을 거라 추정한다.  

탑을 보자마자 눈이 동그래진다. 탑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에는 우뚝 선 탑 대신 여러 부재가 이리저리 흩어졌다. 눈앞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편이 심란하고 묵직하다. 그동안 이 탑에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

8세기 후반 통일신라 사람들이 정성으로 세운 이 탑은 오랜 시간 주륵사를 빛냈다. 그러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스님도 사라지고 절도 폐허로 바뀌었다. 그 순간에도 주륵사 탑은 홀로 절터를 지키며 주륵사의 법등이 다시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고 탑은 그만 주저앉았다. 일부 탑 부재는 절터를 떠나 다른 용도로 사용됐다. 질서정연하게 모여 탑을 이뤘던 부재들은 어지럽게 흩어졌고 이름도 폐탑으로 불렸다. 

주륵사지에서 발견된 석탑의 부재들. (재)불교문화재연구소 발굴에 따르면, 주륵사지 유물은 구미 지역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비록 제자리를 잃은 부재들이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깜짝 놀란다. 옥개석 아랫부분의 층단은 단순하면서도 세련됐다. 윗부분은 단순한 선으로 균형 잡히고 탄력적이며 긴장감 넘치는 흐름을 만들었다. 탑을 만든 솜씨는 누가 봐도 보통이 아니다. 탑 둘레 네 모서리에는 연꽃을 조각한 돌을 놓은 것으로 보인다. 연구자들은 탑을 만든 솜씨와 모서리에 놓인 돌로 보아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탑인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즉 석가탑과 닮았다고 말한다. 선산의 산속에 석가탑에 버금가는 명작이 있었다. 

만약 탑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주륵사지 탑은 원래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때 상상력이 필요하다. 흩어진 부재를 모아 기단을 쌓고 사각형 몸돌을 놓고 멋진 옥개석을 하나씩 올려가면 어느새 삼층석탑이 완성된다. 일부 사람들은 상상에 머물지 않고 탑을 복원하기 위해 꼼꼼하게 조사까지 했다. 언젠가 주륵사터에 무너지고 흩어진 폐탑 대신 절을 빛내던 삼층석탑이 우뚝 설 날이 오지 않을까. 주륵사지 폐탑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선산 지역의 탑을 떠난다. 이 탑들은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녹아들었다. 만약 통일신라의 불국토를 꼽는다면 바로 이곳이 아닐까. 이쯤에서 첫 번째 질문에 답할 차례다.  

“또 다른 통일신라를 만나려면 선산으로 가야 한다.” 

 

사진. 유동영

 

박찬희
박찬희박물관연구소 소장. 박물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했고 지금은 사람들이 박물관과 문화유산을 즐겁게 만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쓴 책으로 『유혹하는 유물들』, 
『박물관의 최전선』, 『구석구석 박물관』, 『몽골 기행』, 『놀이터 일기』, 『아빠를 키우는 아이』가 있으며 함께 쓴 책으로 『두근두근 한국사』 1, 2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