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지에 불국토 역사를 열어가다

특집 | 생활속의 불교수행 - 전법

2007-09-17     관리자
2002년 부처님 오신 날을 얼마 앞두고 종단의 어른스님과 지극한 신심으로 동참한 사부대중을 모시고 백령도 연화정사 건립을 위한 세계고승대덕발우 및 선서화 전시회를 개최했었다. 그리고 그 전시기금으로 연화정사의 초석이 되는 부지를 마련하였고 불사를 위한 천일기도를 입재하였다.

처음 백령도 불사계획을 얘기하자, 도반과 선후배 및 어른스님들께서는 불교 신도도 몇 되지 않고, 교회가 지천이고, 교통 불편 등 너무도 열악한 환경인데다 자금 한 푼도 없이 뛰어드는 모습을 보고 모두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만류하였다. 하지만 나름대로 자신감과 명분이 있었기에 별 두려움 없이 오히려 평소 생각해 오던 이상적인 도량을 세우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되새기기도 했었다.

그러나 천일기도 입재에 들어가기도 전에 섬의 개신교도들이 사찰 건립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였다. 법적으로나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으나 이교도들이 이미 선점하여 등등한 교세에 대한 불쾌감에서 비롯된 일이었으니 여간 낭패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기독교 성지 백령도에 사찰 건립(관창동)이 웬 말이냐 결사반대.”서해 최북단의 자그마한 섬 백령도의 선착장인 용기포 초입부터 곳곳에 나부껴 흩날리는 현수막을 바라보는 마음 한편에서는 ‘수행력 일천하고 짧은 인생 이곳 백령도에서 순교하는구나.’ 하는 처참한 마음이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함께 불사의 원력을 세우고 천일기도를 입재하였던 스님이 개인적인 이유로 기도입재 불과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서 회향을 하게 되었다. 불사의 시작은 가볍고 당찼으나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현실은 ‘앞이 보이지 않는 미궁의 은산철벽이 이와 같을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참으로 암담하기까지 하였다.

사실 백령도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되었다고 하는 중화동교회(중화동 절터라 불리는 곳인데 110년가량 되었다고 한다)를 비롯하여 10여 곳의 교회가 있으며 오래도록 사찰이 없었던 까닭에 주민들 대부분이 토착화된 교회의 영향력으로 개신교도가 되어 있었으며, 몇 명 되지 않는 불자들도 여간한 신심으로는 사찰로의 발걸음을 옮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연화정사 건립을 위한 백령도 입도 당시 한 불자님의 집에서는 여러 명의 목사와 교인들이 찾아와 사찰 건립에 동참할 때 일어나는 불이익을 감수할 것을 경고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내가 백령도를 처음 접한 것은 인천에 있는 사찰에 주지로 부임하고서 일 년에 한 번씩은 지역의 섬 도량을 참배하리라는 마음을 먹고 나서 세 번째의 만행 길이었다. 몇몇 도반들과 험난한 뱃길을 달려 앞뒤 없이 돌아보는 백령도는 마치 환상의 섬 그 자체였다. 암울했던 냉전의 시대를 마감하고 글로벌 세계화를 지향하는 21세기에 세계유일의 분단국으로 남아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북녘 땅 장산곳이 바로 저편으로 바라다 보이는 서해 최북단 신비의 섬 백령도! 세계에서 두 곳밖에 없다는 천연비행장 사곳 해안과 콩돌 해안을 비롯한 두무진의 기암괴석 등 각종 천연기념물과 맑고 청량한 섬 분위기는 자연스레 나를 매료시켰다.

백령도를 설명하는 와중에 심청의 전설과 연관된 인당수, 연봉바위, 연화리, 장촌, 심청각 등... 특히 만고효녀 심청의 눈먼 아비 심학규가 개천에 빠진 얘기며, 몽운사 화주승이 그를 건져낸 이야기 등 몇 고비의 인연을 돌고 돌아 심청이 마침내 인당수에 몸을 던지게 된 사연 등이 두서없이 펼쳐지는 와중에 몽운사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몽운사와 심청의 전설이 백령도에서 있었던 사실 여부는 근거를 알 수 없는 일이겠으나, 언제부터 무슨 사연 때문인지는 몰라도 백령도에서는 절이 없어졌고 심청을 이야기하지 않으며, 절 골과 절터로 불리어지는 폐사지의 이름만을 섬 한편에 묻어 둔 채 불교는 잊혀져가고 있었다. 또한 불교색이 짙다는 이유로 심청전의 설화도 더불어 수난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불상이 발견되기도 하였던 사찰 터는 식수공급을 위한 저수지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다른 한곳의 절터는 이미 교회가 들어서 기독교도들의 성지화가 되어버린 뒤였으니 오호 통재라!

‘일찍이 우리 한반도는 그 어느 한 곳도 불연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모든 인연처마다 사격을 갖춘 수많은 도량이 수행과 전법의 중심지로서 지혜와 복덕을 닦는 터전이 되어 왔건만, 유독 백령도에만 근자에 인연이 닿지 않아 심청의 효행마저 눈이 멀어 버리고 작금에는 불교의 불모지가 되어버렸구나’ 생각하니 참담하고 숙연한 마음마저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백령도에 걸망을 풀게 된 사연 절절하나, 불보살님의 가피력으로 남북 평화통일을 기원하고 심청의 효행을 염원하며 연화정사 관음대 동산에는 석불로 조성된 위풍당당한 법체의 해수관음을 모시게 되었다.

통도사 축서암 수안 큰스님의 글씨로 ‘효행의집’이라고 현판을 쓴 법당에는 석주 큰스님과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남·북방 불교국가 지도자들의 발우전시관을 개관하는 등 도량 곳곳에 흔적을 채우는 크고 작은 갖은 불사의 사연들이 많은데, 연화정사 굽이굽이 아름다운 창건설화를 스미게 하며 가람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가며 백령도에서의 불국토 역사를 장엄해 나가고 있다. 짧은 기간에 감당하기 어렵게 불어난 백령도 신도님들은 마침내 스스로가 불성종자임을 깨닫고 환희심 충만한 모습으로 연화정사를 기도소리 끊이지 않는 정진도량으로 가꾸어 나가고 있다. 신도님들을 나는 머지않은 훗날에 들려줄 연화정사의 역사이며 창건설화의 주인공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또 연화정사를 후원하는 신도님들은 불자로서의 개인적인 수행과 정진력도 수승하지만, 백령도라는 섬이 어디에 있는지, 언제나 가 보려는지도 모르면서도 “백령도의 연화정사 건립은 불자들의 사명으로 건립하자.”라는 건립 취지에 동참, 발기 모임부터 지금껏 굳건히 지켜오고 있으며, 또 오늘도 노심초사하고 계시다. 아마도 이분들이 아니었던들 오늘날의 연화정사는 아직껏 빛을 발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육지에서 연화정사를 든든히 후원하는 불자님들께는 백령도에서의 연화정사 창건 설화를 함께 이루어가는 창건도반으로서 지극한 마음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후원’이라는 말이 말은 쉽고 듣는 사연 아름다울 지라도 보지도 가지도 않은 절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후원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백령도 연화정사와 맺어진 승속을 초월한 소중한 인연들은 다겁생에 걸쳐 환생한 심청과 몽운사 승려들이 금생에 회향을 서원한 인연들이 아닌가 싶다.

앞으로도 연화정사가 가람불사와 전법수행도량으로서 제 역할을 하기에는 가야 할 길이 아득하다. 하지만 지금껏 이어져 왔던 인연들과 나누고 있는 인연들, 또 다가올 인연대중들이 모두가 함께 연화정사의 주인이 되어 당당함으로 정진하는 우리의 도량이 된 까닭에 갈 길이 먼들 무엇이 두려우랴! 라는 든든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연화정사 종무실에는 석주 큰스님께서 쓰신 ‘수처작주’라는 현액이 걸려 있다. 어느 곳 어느 상황에 처하든지 스스로가 주인이 되라는 말일진대, 이글을 대하는 소중한 인연 대중 모두 병술년 수처작주하시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