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B급 스님들] 종이 만드는 스님들

대동법으로 가중된 스님들의 고된 승역僧役

2023-08-23     오경후

제지(製紙), 사찰의 종이 생산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광해군 즉위년(1608), 대동법(大同法)이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됐다. 당시 백성은 군역(軍役)의 문란, 하급 관리나 상인들이 공물(貢物)을 나라에 대신 바치고 대가로 백성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받아내던 방납(防納)의 폐단으로 피폐한 삶을 살고 있었다. 

대동법 시행으로 그동안 현물과 노역으로 부담했던 의무를 쌀(대동미大同米)로만 대신할 수 있었다. 백성들은 다른 부역을 부담하지 않아도 됐고, 국가의 토목공사나 공물 납부 시에는 그 대가를 받을 수 있었다. 양란 직후 실시된 대동법의 운영은 여러 논란과 한계가 드러났지만, 백성들이 대동법의 실시를 청원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왕릉을 조성하거나 사신(使臣) 접대, 종이 생산과 납부 같은 불시에 발생하는 부역으로 그 수요를 예측할 수 없는 경우 부득이하게 백성이 동원됐다.
대동법 시행은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줬지만, 스님들의 부담은 가중되고 고통 또한 심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조선 건국 초기에도 스님들은 도성(都城) 건설에 동원됐고, 중앙관청에 소속돼 기와나 옹기를 굽거나 서책을 만들고 환자를 치료하는 부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왜란과 호란 이후처럼 그 유형이 광범위하지 않았다. 전란 전에는 사찰 소유 토지 또한 면세의 혜택을 받아서 불교계를 위협할 정도로 심화되지는 않았다. 스님의 부역은 일정한 주거지 없이 상가(喪家) 등을 찾아가 의식(衣食)을 해결하는 스님들만이 담당했을 뿐이었다. 

전란 이후 스님들의 종이 생산과 납부는 전국 대부분의 사찰에서 담당할 정도로 광범위해졌다. 많은 양의 종이가 청나라 조공품(朝貢品)으로 보내졌고, 국가 자체의 수용도 증가했다. 중국을 왕래하는 연행사신(燕行使臣)은 일반적으로 매년 3차례 정기적으로 왕래했는데, 이때 방물지(方物紙, 중국 청나라에 바치는 종이)는 백면지(白綿紙) 6,000권, 세폐대호지(歲幣大好紙) 2,000권, 소호지(小好紙) 3,000권을 합해 총 1만 1,000권을 보냈다. 1643년(인조 21)에는 백면지(白綿紙)와 후백지(厚白紙)를 합쳐 총 8만 7,000권을 보냈으며, 1649년(인조 27)에는 백면지·상화지(霜華紙), 세폐 및 동지(冬至) 등에 쓰일 수량을 합쳐 총 2만 2,590권을 보내야 했다. 1650년(효종 1) 10월과 12월에는 각기 2만 8,500권과 8만 7,000여 권을 합쳐 총 11만 5,500권을 생산해야 했다. 이후 청나라와의 관계가 호전되면서 방물지의 수량도 점차 감소했지만, 한 해에 10만 권을 초래한 사례는 전무후무했다. 

두 차례 전쟁 이후 종이를 생산하던 사찰이 확대되고 사찰이 납부할 종이의 양이 증가한 것은, 관에서 종이를 생산하던 조지서(造紙署)의 역할이 붕괴된 측면도 있지만 대동법 시행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남해 화방사(花芳寺). 남해 망운산 자락에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창건됐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시 왜병에 의해 불탔으며 후에 중창됐다. 화방사는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봉안한 충렬사(忠烈祠)를 수호하는 사찰이었다.

 

종이를 생산하는 승역(僧役)

막대한 양의 종이 생산은 종이 원료 산지가 집중된 전라·경상·충청도를 중심으로 나눠서 정해졌다. 대동법 실시 이후 종이 원료의 중요 생산지였던 삼남지방(전라·경상·충청도)의 닥나무밭이 대동미 납부를 위한 토지가 되어 종이가 귀해졌고, 국가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더욱이 납부된 종잇값 지급의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1654년(효종 5) 특진관 이시방(李時昉)의 말에 의하면, “종잇값으로 포목을 지급하지만, 그 품질이 조잡해 백성과 스님들이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1700년(숙종 26)에는 국가 수요량의 절반은 공인(貢人, 궁궐과 관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던 공납 청부업자)에게 청부시켜 조달하고, 절반은 지방 군현에서 부담토록 했다. 

그러나 이미 토지가 대동미 생산을 위한 땅으로 변한 이상 종이 조달은 쉽지 않았고, 지방 관부에서는 조달해야 할 종이의 일부를 사찰에 부과해 징수했다. 조선 후기 승역(僧役) 가운데 산성의 축조나 방어와 함께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스님들의 종이 생산과 상납이었다. 스님들이 부담해야 하는 각종 공물(貢物)과 함께 각종 종이를 생산하고 납부한 흔적은 당시 자료에서 어렵지 않게 살필 수 있다.

종이 생산과 상납은 폐단 또한 극심해 유서 깊은 사찰이 쇠락하고 스님이 환속하거나 이탈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조선 전기의 종이 생산은 관영제지소인 조지서가 담당해 사찰은 불전간행(佛典刊行) 등 자급자족을 위해 종이를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양란 이후 조지서 혁파와 대동법 시행으로 사찰과 스님들의 종이 생산과 상납이 본격화됐다. 더욱이 청나라의 조공품 요구는 그 수요를 가중시켰다.

사찰은 스님들의 종이 만드는 기술과 함께 종이를 생산할 수 있는 자연적 여건을 잘 갖추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사찰은 대부분 산간 지역에 위치해 종이의 원료인 닥나무가 생육하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다. 특히 삼남지방은 닥의 생육과 공급 등 종이 만드는 여건이 알맞아 종이 생산과 납부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표.  조선 후기 삼남지방 사찰의 종이 납부와 납부처 

영남지방은 그 토질이 닥의 생육에 알맞아 얻기가 쉽고 용도가 넓고 이익이 크므로 절의 업(業)이 됐다. 때문에 영남 70주(州)의 사찰이 공사간(公私間)의 비용을 충당할 정도였다고 한다. 예외도 있어 닥의 일부는 자급자족하고 일부는 외부에서 구입하거나, 아예 닥을 재배하지 않고 외부에서 매입해 종이를 생산하는 사찰도 있었다.
한편 종이 원료인 닥의 산지는 18세기 중엽까지 경상도 14곳, 전라도 12곳, 충청도 2곳에 불과했다. 대동법의 실시로 닥나무밭이 곡식을 심는 땅으로 바뀌어 감소했기 때문이다. 이후 정조의 적극적인 원료 재배 장려책이 시행됐고, 그 정책이 실효를 거두면서 생산지가 크게 확대됐다. 정조 연간에는 닥나무를 재배하는 일이 뽕나무 재배와 함께 수령의 일곱 가지 소임 중의 하나라고 규정할 정도로 중요시됐기 때문이다.

삼남지방의 사찰이 담당한 종이 생산과 납부 방식은 다양하게 전개됐다. 우선 납부처는 여러 곳의 중앙 및 지방 관청에 해당됐다. 중앙 납부처는 성균관(成均館)·교서관(校書館)·예조(禮曹)·병조(兵曹)·군기시(軍器寺)뿐만 아니라 대전(大殿)과 중궁전(中宮殿) 등에도 납부했다. 지방의 경우는 병영(兵營)과 공방(工房) 등에도 납부했으며, 서원에도 축문지(祝文紙) 용도로 납부했다. 특히 전라도 승평부(昇平府)의 대광사는 종이 납부처가 중앙 7곳과 소속 관청 3곳이나 됐으며, 납부하는 종이의 양도 184권 33첩(貼)이나 됐다. 

사찰의 종이 납부는 대부분 현물 납부가 일반적이었지만, 현물 대신 돈으로 대납한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표]에 보이는 경상도 청송부의 쌍계사는 성균관에 납부해야 할 종이 대신 돈으로 대납했으며, 성주목의 안봉사(安峰寺)·용기사(龍起寺) 또한 현물 대신 종잇값을 납부했다. 이밖에 배정된 현물을 5개 사찰이 나눠서 납부하거나 사찰의 사정에 따라 현물 대신 돈으로 대납한 경우도 있었다.

물이 풍부한 곳에 자리 잡은 화방사. 화방사는 종이를 만들어 경상감영(慶尙監營)을 비롯해 남해의 관청과 서원, 서당 외에 한양의 여러 곳에도 납품해야 했다. 
울주군 운흥사지 돌 받침대. 닥나무 껍질을 벗기고 근처 계곡에서 씻은 후 치대는 돌 받침대로 추정한다. 
화방사에는 종이의 재료가 되는 ‘산닥나무 자생지’(천연기념물)가 있다. 산닥나무로 만든 종이는 질이 좋았고, ‘일본에서 들여온 닥나무’라는 뜻의 왜저(倭楮)라고도 불렸다. 

 

종이 납부와 유통망

한편 지방 관청은 사찰의 종이 납부에 대가를 지불했다. 전라도 광양에서는 종이 만드는 스님을 고용한 대가로 50냥을 지불했고, 장성에서는 취서사·망월사 두 사찰의 스님들이 종이를 떠서 공물로 바친 대가로 64냥을 지급했다. 종이 생산과 납부에 따른 지방 관청의 대가 지급은 매우 저렴한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지만, 이미 시행되고 있었던 대동법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지방 관청은 사찰에 처음 사들일 때의 값을 미리 지급하고 완제품을 공급받기도 했으며, 이미 생산된 완제품을 관청에서 구매하기도 했다. 다른 방법으로 사찰에서 생산된 종이는 공인(貢人)을 통해서 납부하기도 했다. 대동법 시행으로 국가 수요량의 절반을 공인에게 청부시켜 지급하는 시책을 실시했는데, 공인이 관청에서 종잇값을 받아 사찰을 비롯한 종이 만드는 장인에게 종이를 구매해 관청에 납부한 것이다. 

영남의 경우, 공인들이 매년 쌍계사와 해인사 등 여러 사찰 및 스님과 종잇값이나 종이의 종류, 공급 기한 등을 약정하고 수거해 갔다. 공인들은 이윤 추구를 위해 저렴하게 종잇값을 지급하고 구입했다. 그들은 “나라에서 쓰는 종이를 납부한다”는 측면에서 관청의 비호를 받았으며, 궁핍한 사찰경제의 약점을 이용해 시중 가격에 비해 1/5 정도의 헐값으로 종이를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스님이 개인적으로 장사하는 사상(私商)과의 거래를 통해 종이를 유통시키게끔 했다. 특히 조선 후기 유명했던 송상(松商, 개성 상인)들은 스님과 체결해 별상지·운화지 등 여러 종이 가운데 가장 좋은 물건을 매입했다. 이렇게 매입한 종이를 청나라와의 사이에 이뤄졌던 밀무역 시장에서 유통시켰다. 
스님들은 헐값에 종이를 매입하려는 공인보다 그 값을 후하게 지급한 송상들과 거래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외에도 스님들은 궁핍한 사찰경제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 직접 종이를 유통시키기도 했다. 

조선 후기 사찰과 스님들이 담당했던 종이 생산과 납부의 부역은 대동법의 시행으로 그 부담이 가중돼 불교계를 크게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동법 체제하에서 종이에 대한 생산과 납부를 통해 그 대가를 지급받은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스님들의 부역이 중앙과 지방 관청의 수탈과 착취의 대상이었다”는 그동안의 평가를 다시 살펴야 하는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남해 용문사 구유. 구유는 ‘비사리 구시’, 혹은 ‘구시’라고도 불린다. 물을 채워 닥나무 껍질을 벗기는 데 사용하는 등 다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여러 사찰에 보존되고 있으며, 일부 사찰에서는 많은 사람을 위한 ‘밥을 담은 통’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사진. 유동영

 

오경후
동국대 사학과에서 「조선후기 사지(寺誌) 편찬과 승전(僧傳)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동국대 불교학술원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조선후기 불교동향사 연구』, 『사지와 승전으로 본 조선후기 불교사학사』 등과 70여 편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