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B급 스님들] 양반가의 제사를 지낸 스님들

성주 안봉사安峯寺 스님들의 다사다난한 일상

2023-08-23     박정미

영당(影堂)과 영당 사찰

흔히 조선은 불교를 억압했던 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 신행하고 기억하며 전승해온 불교문화를 조선 초기 사람들이 한순간도 남김없이 버릴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여전히 스님을 모셔 공양을 올리고 법문을 들었으며, 사찰을 중수하고 불서(佛書) 간행에 동참했다. 

더 나아가 일부 사대부 가문은 조상들의 진영(眞影)을 모신 영당(影堂) 곁에 사찰을, 분묘(墳墓, 무덤) 곁에 분암(墳庵)을 둬 유교와 불교 의례를 함께 행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스님들의 일상은 주로 문집(文集)과 비문(碑文) 등에 전하고,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의 『묵재일기(默齋日記)』와 이준(李濬, 1686~1740)의 『도재일기(導哉日記)』 같은 사대부 일기에도 전한다. 특히 『묵재일기』의 32년 일기 중 23년은 문정왕후가 보우(普雨, 1509~1565) 스님을 중용해 불교를 부흥했던 명종 재위(1545~1567) 시기와 겹친다. 

이문건의 『묵재일기』,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이문건의 성주이씨 집안은 본래 선석산(禪石山) 선석사(禪石寺)에 조상 진영을 봉안했다. 세조의 태(胎, 태반이나 탯줄)가 선석산에 안치되며 절이 철거되자 성주목(星州牧) 서북쪽 10리에 있던 안봉사(安峯寺) 곁에 영당을 마련하고 진영을 봉안했다. 

이문건이 성주로 유배 와서 1546년(명종 1) 1월 처음으로 안봉사 영당에 예배했는데, 거기에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라고 읊은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을 비롯해 그의 아버지부터 묵재의 고조부 이사후(李師厚)까지 조상 진영 12위와 위패 2위가 봉안돼 있었다.

이문건은 안봉사의 주요 단월(檀越, 시주자)이었다. 성주 인근 용기사(龍起寺) 불상 조성에도 시주했고, 당나라 현각 스님의 오도송인 『증도가(證道歌)』를 인쇄했으며, 합천 해인사의 노스님 현희(玄曦)와 자주 교유하며 밤새워 공한 뜻(空法)을 듣기도 했다. 조선시대 사대부로서 다른 이들에 비해 불교에 호의적이었던 이문건의 『묵재일기』를 통해 안봉사 스님들의 일상을 알아보자.

이조년 진영. 이문건의 선조이며 고려 후기 인물이다. 본디 손에 염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조선시대 성주이씨(星州李氏) 후손들이 염주를 지웠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안봉사의 자취

언제 창건됐는지 전하지 않지만, 안봉사는 1459년(세조 5)에 판선종사(判禪宗事, 선종의 최고 승직) 수미(守眉) 스님 등이 인출한 팔만대장경 50질 중 1질을 봉안했다. 안봉사 대장경은 40여 년이 지난 1502년(연산군 8)에 일본국 사신 붕중(朋中)에게 내려져 절을 떠났다. 하지만 명종 대 문정왕후의 선교양종 복립 시 ‘교종문자(敎宗文字)’를 받으며 교종사찰로서 사격(寺格)을 유지했다.

안봉사에는 노스님과 어린 상좌 등 20여 사중(寺衆)이 있었고, 법당과 승방, 조전(祖殿)과 선당(禪堂), 삼보청(三寶廳)과 종각 등이 있었다. 서쪽으로 치우친 좁은 곳에 성주이씨 조상의 영당을 봉안한 영자전(影子殿)이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동암(東庵)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영당은 이문건의 조카 이현배(李玄培)가 성주목사로 부임해 중수했고, 1684년(숙종 10) 봄에 절의 동쪽으로 옮겨진 후 그 곁에 신주(神廚)와 재사(齋舍)가 건립됨으로써 안봉사와 분리됐다. 1896년(건양 1) 황폐해진 사역 안으로 영당을 옮겼으니, 현재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안산영당(安山影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자리가 옛 안봉사인 셈이다.

성주의 안산서원(安山書院). 안봉사(安峯寺) 절터 위에 세워졌다. 안봉사는 대장경 인쇄본이 보관됐던 장소였으며, 성주이씨 영당(影堂)이 들어선 후에도 존속됐다. 안봉사는 조선 후기 폐사됐으며 현재는 안산서원이 들어서 있다. 

 

사주(寺主)·수승(首僧)·삼보(三寶) 소임

안봉사에는 ‘사주’, ‘수승’, ‘삼보’라 불리는 소임이 있었다. ‘사주(寺主)’는 『묵재일기』에서 단 한 번 언급된다. 이문건이 영당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1557년(명종 12) 2월 2일 절에 올랐다. 사주 잠희(岑熙)는 이문건을 위해 공양구를 차리는데, 다음 날 일기에서는 ‘삼보 잠희’라 적혀 있었다. 즉, ‘사주’가 ‘삼보’를 겸했을 것으로 보인다. 

‘수승(首僧)’은 선원(禪院)에서 공부하는 수좌들을 모시는 소임이다. 1552년 4월 6일 안봉사 희오(熙悟) 스님이 수승으로 뽑혔는데, 이문건에게 ‘목관(牧官, 성주목사)에게 수승으로 다른 스님을 정해달라’ 청했다. 이문건은 목관에 고해 바꿔주기도 했으니, 당시 선교양종(禪敎兩宗)이 부활하면서 관에서 수승을 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 차례 소임을 면했던 희오 스님은 1555년 5월경에 수승이었고 그해 7월 13일 희상(希尙) 스님으로 교체됐다. 

‘삼보(三寶)’는 주지삼보(住持三寶)로서 불보(佛寶)와 법보(法寶) 도량에 있는 대중 스님들을 모시는 소임이다. 안봉사 스님들도 ‘다 모아서 데려가는[統領]’ 소임으로 이해했고, 오랫동안 그 자리가 비었을 때는 ‘모름지기 자리를 분명히 해야 한다[須定體]’라고까지 했다. 삼보는 절 살림을 두루 살피고 영당에서 지내는 유교 제례를 준비(택일과 통지 및 제찬 마련 등)하고 법당에서 불교 의례를 행했다. 

삼보 소임은 성주이씨 가문이 미리 사중과 의논해 정하기는 했지만, 매년 2월 영당 제례 후 문중회의 때 뽑혔고, 차문(差文)과 삼보문자(三寶文字)라는 문서를 전달해 공식화했다. 이는 사찰의 주요 소임을 스님들이 아닌 성주이씨 가문의 문중회의 때 뽑는 형식적 한계를 보여준다.

일기에서 삼보는 열네 차례에 걸쳐 뽑혔으며, 성륜(性輪)·지섬(智暹)·지일(智一)·성전(性田)·잠희(岑熙)·희상(希尙)·희오(熙悟)·법담(法淡)·석민(釋敏)·희오(熙悟)·신수(信修)·성원(性元) 등이 역임했다. 삼보의 임기는 대략 1년에서 2년 정도였지만, 이례적으로 지일이 4년을 역임했고 성륜과 신수는 두 차례 소임을 살았다. 잠희·희오·희상은 모두 수승을 거쳐 삼보에 선출된 스님들이었다.

어느 곳에서든지 살림살이가 쉽지 않듯이, 안봉사 삼보 역시 다사다난한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게다가 성주이씨 문중회의로 선출되는 소임에 대해 탐탁지 않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잠희는 삼보로 선출되는 것을 피하려고 영당제 당일에 절 밖으로 나가기도 했고, 희오는 연임을 꺼려 “바꿔주지 않으면 절에 머물지 않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둘 다 안봉사 스님들의 바람에 따라 삼보 소임을 수락했다.

이문건도 삼보 소임의 수고로움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묵재일기』에서 아래와 같이 특별히 두 명의 삼보 스님에 대한 감사를 적었다. 

“1551년 2월 9일. 돌아가신 계담(戒淡) 스님 때에 마련한 논 30두락을 지금까지 제용(祭用)으로 쓰는데, 스님의 기일에 시식(施食)을 하지 않으면 덕을 갚을 길이 없기에 백미 2두로 매년 스님의 기일시식을 지내게 했다.”

“1559년 1월 19일. 안봉사 스님이 와서 병을 앓던 성륜 스님이 어제저녁에 화거(化去, 입적)하셨음을 알렸다. … 슬프다. 절에 공이 많은 분이셨는데 편히 계시지 못하다 돌아가셨구나.”

성주이씨 영당은 선석산 선석사(禪石寺)에 있었으나, 조선 세종 대 왕실의 태실(胎室)이 안치되면서, 안봉사로 옮겨졌다. 1680년(숙종 6) ‘안산서원(安山書院)’으로 사액(賜額)됐다가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됐다. ‘안산영당(安山影堂)’으로 존속하다, 2005년 정비 후 서원으로 복원했다. 
안산서원 내 안산영당(安山影堂). 초상화를 봉안한 사당(祠堂)을 영당이라 한다. 안산영당은 성주이씨 문중에서 나라에 공헌이 있고 귀감이 된 선조들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정기적으로 제향하며 추모하던 건물이다. 

 

불사를 모연한 화주(化主) 스님

안봉사에는 불사를 모연하고 이끄는 화주 소임이 있었다. 1546년(명종 1) 3월 기와교체 불사 화주 석한(釋閑), 1559년(명종 14) 2월 가사불사 화주 학종(學宗)과 4월에 법당중수 불사 권선문에 관인(官印)을 받아낸 극명(克明), 2년이 지난 1561년에 불사를 회향한 화주 신수(信修) 등이 소임을 맡았다. 

1556년 가을에는 승방 조성이 한창이었고, 해를 넘겨 3월 3일에 회향법회를 열었다. 법회에 앞서 안봉사 화원승(畫員僧) 각민(覺敏)은 불사에 쓸 종이꽃을 만들었는데, 이문건은 각민의 승역(僧役)을 미뤄주도록 조처하면서 법회 전날에는 불사에서 쓸 조선망령시식(祖先亡靈施食)의 글을 써서 성륜 스님에게 보내기도 했다. 회향법회는 3일간 거행됐고, 3월 6일에 성륜은 이문건에게 재과(齋果)와 떡을 베풀어 줬다.

1559년 4월 12일 22세의 극명(克明) 스님은 법당 중수 화주를 발원하고 이문건에게 권선문을 가져가 성주목사의 답인(踏印, 관인을 찍음)을 받았다. 이후 일기는 분실돼 활동이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스님은 권선문을 가지고 가가호호 방문하며 선업(善業) 쌓기를 권했을 것이다. 1561년 2월 신수 스님을 새 삼보로 정하려 할 때 신수 스님이 “법당 화주는 삼보 겸임이 불가하다” 했다. 신수 스님은 물론 사중도 법당 화주 소임을 중하게 여겼기에 희오를 삼보로 삼았다. 신수는 화주로서 비용 마련에 남달리 고심했고,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4월 24일. 신수 스님이 와서 ‘상량에 보시가 없어 부득이 삼보가 맡은 큰 소 세 마리 중 한 마리를 빌려 팔아 쓰려 한다’기에, 논 3두락 값어치는 될 거라 알려주었다.
5월 1일. 신수 스님이 소 한 마리를 끌고 와 보이고 장에다 팔려고 갔다가 목면 15필을 받아와 보여주었다. 6월 1일. 신수 스님이 와서 ‘지난 20일과 22일 이틀 동안 기와를 교체하였다’고 말했다.”

법당 중수를 발원한 청년 스님, 법당 화주 소임을 중하게 여긴 신수 스님과 이에 화합한 안봉사 스님들, 귀한 철물을 보시한 이문건, 소를 팔아 법당 중수를 마친 화주 스님 등 안봉사 대중이 함께 행했다.

약사각(藥師閣). 안산서원 위쪽에 약사불을 모신 약사각이 있다. 안산서원 보수 공사 중에 발견됐으며,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본디 이곳이 안봉사 절터임을 알려주는 부처님일까. 
영당에 모셔진 영정. 안산영당에는 성주이씨 22명의 영정을 모셨으나 임진왜란 등으로 소실되어 현재는 13명을 모시고 있다. 12명의 위패도 모셔져 있다. 이장경은 고려 중기의 인물로 성주이씨 문중을 일으켜 세운 중시조(中始祖)로 추존되고 있다. 
‘농서군공 이장경 신도비(隴西郡公 李長庚 神道碑)’.

 

재(齋)와 시식(施食)

이문건이 활동할 당시에는 부모의 재산이 남녀차별 없이 균분상속(均分相續)됐으며, 제사도 형제자매가 돌아가며 지내는 윤회봉사(輪回奉祀)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문건은 집안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을 때, 안봉사에 미리 제수와 제문을 보내 기일시식(忌日施食)을 지내도록 했다. 1551년 8월부터 1566년 8월까지 안봉사 스님들은 법당에서 새벽에 이문건의 고조·양(養)증조·장인·큰누나·아들의 기일시식을 행했다.

이문건의 장남은 병약했기에 안봉사 스님이 1554년 7월 동암의 냇가에서 구명시식(救命施食, 목숨을 구하는 의식)을 행하고 1556년 3월에도 구명시식을 행했지만, 1561년에 세상을 떠났다. 희오 스님이 1561년 8월 14일 새벽 법당에서 칠칠재(七七齋)를 지냈다. 재에 앞선 12일에 안봉사 삼보 법담이 이문건에게 가서 “재미(齋米) 10두면 작은 재를 올릴 만하다”고 알려줬고, 이문건은 다음 날 백미 10두를 안봉사에 보내며 노비 귀손이 대신 참석하도록 했다. 

 

시대를 견뎌낸 안봉사의 스님들

억불의 시대를 견뎌내던 안봉사 스님들의 일상은 다난(多難)했다. 유생들이 향교와 산사에서 모임을 가지거나, 새로 부임한 성주목사가 유생에게 잔치를 베풀 때마다 스님들은 유생들을 대접해야 했다. 나라에서 승군(僧軍)을 뽑아 역사(役事)를 일으킬 때도, 나이 들거나 아픈 몸을 이끌고 성주목에 가서 직접 하소연해야 했다. 심지어 서원(書院)을 건립한다며 안봉사에 있지도 않은 스님 40명을 뽑아 보내라는 황당한 통지를 받기도 했다.

유생 무뢰배들이 절에서 두부를 만들어 먹으며 소란을 피운 일도 다반사였으리라. 보다 못한 스님들이 한마디 했을 뿐인데 느닷없이 한밤에 관군이 들이닥치기도 했다. 1553년(명종 8) 윤 3월 13일 밤 안봉사에 관군이 들이닥쳐 삼보 성전(性田)과 상좌를 데려갔다. 

다음 날 이 일을 전해 들은 이문건이 형방에 알아보니, “송사호(宋師顥) 등 유생 십여 명이 절에서 두부를 만들어 먹다가 삼보에게 욕을 먹었다”고 했다. 이문건은 즉시 목사에게 편지를 보내 스님들을 풀어주길 청하면서 유생 무뢰배들의 작폐를 고했지만, 오히려 “유생을 멸시한 승도들을 늘 미워하던 차에 그 애통함이 골수에 사무친다”는 목사의 답장을 받았다. 삼보 성전은 무려 장 70대라는 과도한 처분을 받고서 17일에야 겨우 풀려났다.

조선 명종 대에 스님들을 위한 과거 시험인 승과(僧科)가 잠시 부활했다. 승과를 보기 위해서는 지방관이 중앙에 이에 관한 보고를 해야 했는데, 이를 ‘진성(陳省)’이라 한다. 안봉사의 희상(希尙) 스님은 1552년(명종 7) 승과인 대선취재(大禪取才)를 보고자 했고, 2월 5일에 이를 관에 요청했다. 그러나 관에서는 관례를 모른다며 응하지 않았다. 이문건의 주선으로 2월 26일이 돼서야 대구 가는 허가증을 겨우 받았고 30일에 대구에서 진성사를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다. 과연 스님이 무사히 승과를 봤는지는 일기에 남아 있지 않다.

수난을 당하기는 성주이씨 조상의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이조년의 진영은 손에 염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안봉사 영당에서 이 진영을 보았던 성주목사의 사위 이이(李珥)가 1559년 2월의 모임에서 염주를 문제 삼았다. 지금 남아 있는 이조년의 진영에는 염주가 지워져 있다. 조선 후기 유교적 종법(宗法) 체제가 강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성주이씨들도 조상의 손에 들려진 염주는 지우고 싶은 과거였을 것이다.

안봉사 스님들은 부지런히 승방을 신축하고 법당을 중수하고서 회향불사·재·시식을 행하면서 힘겨운 역(役)을 감당해 냈다. 사중이 함께하고 단월이 힘을 보태 어두운 시대를 지나왔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스님들 외에도 “安峯僧○○”라고 일기에 적힌 스님들의 이름을 적어본다.

혜숭(惠崇) 영소(靈昭) 덕상(德相) 혜감(惠監) 성정(性正) 세인(世仁) 성원(性源) 혜정(惠正) 신의(信義) 탁선(卓先) 도근(道根) 혜자(惠慈) 수일(守一) 보옥(寶玉) 세청(世淸), 그리고 안봉사 어느 노스님의 상좌인 어린 스님(老僧上座少僧)  

 

사진. 유동영

 

박정미 
2012년 봄부터 이듬해 봄까지 『묵재일기』를 읽고 안봉사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으며, 2015년 숙명여대 사학과에서 「조선시대 불교식 상제례(喪祭禮)의 설행양상-왕실의 국행불교상례와 사족의 봉제사사암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상임연구원으로서 연구원 대중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