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B급 스님들] 두부를 만드는 스님

두부 앞에선 사대부 체면도 사라지고

2023-08-23     공만식

전통 시대 사찰은 종교와 신앙의 공간이었지만, 백성과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공간이자 중생사의 가장 절박한 문제인 음식을 다양한 측면에서 해결해 주던 공간이기도 했다.

사찰은 한국 음식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다. 장류나 김치와 같은 기저 음식에서부터 나물류 음식과 두부, 만두, 유밀, 사탕류 등 별식에 이르기까지 음식 문화와 테크놀로지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 또한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형인 음식 문화를 가지고 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사찰에는 많은 인원이 상주했다. 각종 의례와 행사가 진행됐으며, 많은 이들에게 각종 음식을 제공하는 공간이었다. 속리산 법주사나 충남 논산 개태사의 대형 쇠솥(철확鐵鑊)은 대규모로 밥을 짓고, 장을 담기 위해 콩을 삶는 용도로 사용됐다. 법주사의 석옹(石瓮, 돌항아리)과 석조(石槽, 돌그릇)와 같이 사찰에서는 많은 양의 김치를 담그기 위한 저장 용기나 세척할 수 있는 도구들을 갖추고 있었다.

『삼국유사』 「김현감호」조에 “호랑이에 다친 상처는 흥륜사 장을 바르면 낫는다”는 설화가 있다. 즉, 사찰의 장은 승려들만의 음식이 아니라 일반 백성과 함께 먹고 나누는 식재료였다. 사찰에서 행해진 전문적이고 발달된 장류와 김치류 제조 방법은 민간 사회로 확산해 갔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법주사 철확(보물). 주물로 만든 철제 솥이다.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 두께 3~10cm의 거대한 크기로, 무게는 약 20톤으로 추정한다. 솥의 크기가 커서 “한 번에 승려 3,000명이 먹을 수 있는 장국을 끓였으며, 임진왜란 때 승려들이 이 솥을 이용하여 배식했다”고 전해 온다.
울주군 운흥사지의 석조. 석조(石槽)는 물을 저장하는 기능을 하며, 밑에는 물을 배수하는 구멍이 나 있다.
울주군 운흥사지 승탑과 석조 유물. 운흥사는 신라시대 창건된 사찰이다. 조선시대에 수많은 경전이 목판으로 판각됐다. 승탑 왼편으로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기단석이 남아 있다. 승탑의 기단으로 추정된다. 

 

사찰에서 시작된 ‘점심’

고려시대 사찰은 중국의 음식 문화를 가장 먼저 수용하고 민간에 확산한 곳이다. 중국 당송시대 선종(禪宗) 사찰에는 점심 문화가 있었다. 요즘의 점심이 아니라 끼니 사이에 만두와 면류, 유밀과 같은 음식을 먹는 별식이라는 의미다. 우리나라에서 점심 문화가 시작된 곳이 바로 사찰이다. 

사찰은 중국 당송시대 선종 사찰의 만두류 음식을 가장 먼저 수용하고 전파했다. 채식 만두인 ‘산함(酸餡)’과 ‘산도(酸饀)’를 고려 사회에 전파했고, 이후 고기소를 넣은 육식 만두가 고려 사회에 등장할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만두에 대한 언급에는 항상 사찰과 승려가 빠지지 않는다. 이규보나 이색 같은 고려시대 사대부 문인들이 ‘혼돈(餛飩)’이나 ‘산함(酸餡)’, ‘만두(饅頭)’ 등 만두류 음식들을 승려로부터 얻었다고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찰에서 시작된 음식에는 두 가지 더 있다. 하나는 ‘산갓김치(산개山芥)’이고, 다른 하나는 ‘두부’다. 산갓김치는 고려 후기부터 언급되는데, 톡 쏘는 매운맛이 특별했다. 고려 말과 조선 전기에 사찰에서 사대부가로 제조 방법이 전파됐고, 이후  육류를 곁들인 사대부들의 술자리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음식이 됐다. 조선시대에는 관직을 얻고 승진하기 위해 왕실과 사대부들에게 뇌물로 바치는 음식으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

 

‘두부’의 등장

현재까지 우리 식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음식인 두부는 고려 후기부터 등장한다. 두부에 대한 가장 이른 언급은 고려 후기 사대부인 이인복(李仁復, 1308~1374)과 이색(李穡, 1328~1396)의 시에서 볼 수 있다.

“신도가 스님께 공양 올리는 것이 상례이거늘
산승이 속인을 대접하니 놀랍고 당황스럽구나
눈처럼 쌓인 만두 쪄내니 그 빛깔이 더욱 좋고
엉긴 두부 끓이니 그 냄새가 더욱 향기롭구나
많은 생에 인연이 두터우니 이 어찌 우연이리오
한 그릇 밥의 깊은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을꼬 
(檀越齋僧是故常/ 山僧饗俗可驚惶/ 饅頭雪積蒸添色/ 豆腐脂凝煮更香/ 緣厚多生非偶値/ 恩深一飯恐難當)”
 - 『목은시고』 제35권 중에서

이색은 『목은시고(牧隱詩藁)』에서 두부에 관해 5편의 시를 읊고 있다. 이색이 언급한 두부 요리는 주로 ‘두부탕’이었던 것 같다. 두부탕을 만들 때는 “두부를 먼저 기름에 지진 다음 잘라서 국에 넣고, 국의 향을 더하기 위해 양념으로는 파 뿌리의 흰 부분인 총백을 넣었던” 듯하다. 

두부는 특히 “이가 부실하고 나이 든 사람에게 보양이 되고 알맞은 음식”으로, “맛없는 채솟국과 대비되는 음식”으로 언급한다. 또한 “서진(西晉)의 장한(張翰)이 관직을 버릴 정도로 별미라고 하던 농어회와 순챗국, 화북 오랑캐들의 최고의 음식인 양고기와 유제품(양락羊酪)에 견줄 만한 음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이색이 두부를 “관악산 신방암 주지 스님으로부터 대접받았다” 하여 두부가 사찰 승려에 의해 제공됐음을 알 수 있다. 

두부에 대한 언급은 조선시대에 더 빈번하게 등장한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또한 일암(一菴)과 만덕(萬德)이라는 두 스님(上人)의 초대로 진관사에 자주 가서 두부와 차를 대접받았는데, “향기롭고 연한 두부”라는 묘사로 두부를 애호했음을 알 수 있다. 서거정은 『사가집(四佳集)』에서 ‘두부적[豆腐軟堪炙]’과 ‘두부탕[細截爲羹軟更香]’이라는 두 가지 두부 음식을 언급하고 있다.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을 모두 지낸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의 『소재집(蘇齋集)』으로 두부에 관한 생각을 살펴볼 수 있다. 노수신은 두부를 ‘눈(雪)’이나 ‘유제품(소락酥酪)’ 같은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으며 “고기만큼이나 맛있는 음식”으로 “많이 먹어서는 안 된다(眞宜不多食)”고 걱정할 만큼 맛있는 음식으로 묘사한다. 

다산 정약용도 두부에 관한 많은 시를 읊고 있다. 그는 “두부를 참기름에 지져 먹거나, 뽕나무버섯과 두부를 탕으로 먹은” 듯하며, “두부를 안주로 해 기장으로 만든 막걸리를 실컷 마시곤 했”던 것 같다. 

다산은 「절에서 연포탕을 끓이다(寺夜鬻菽乳)」라는 시를 남겼다. 연포탕은 닭고기를 푹 삶은 국물에 두부를 띠풀로 꿰어 넣고 뽕나무버섯과 송이버섯을 넣고 끓인 두부탕이다. 후추와 석이를 넣고 만든 양념에 찍어 먹었던 듯하다. 

“다섯 집마다 닭 한 마리씩을 추렴하고
콩으로 두부 만들어 대바구니에 담는다
두부를 자르니 주사위처럼 네모반듯한데
띠 줄기에 꿰니 긴 손가락처럼 가지런하네
뽕나무버섯과 송이버섯을 섞어 넣고
향기로운 후추와 석이로 양념을 만든다
승려는 살생을 경계하여 손대기를 꺼려 하니
젊은이들이 직접 소매 걷고 닭을 잡아
다리 부러진 솥에 장작불을 지피니
거품이 끓어올라 위아래로 요란한데
한 번 큰 사발로 먹으니 배 속이 든든하구나
(五家之醵家一鷄/ 壓菽爲乳筠籠提/ 切乳如骰方中矩/ 串用茅鍼長指齊/ 桑鵞松簟錯相入/ 胡椒石耳芬作虀/ 苾蒭戒殺不肯執/ 諸郞韝親聶刲/ 折脚鐺底榾柮火/ 
沫餑沸起紛高低/ 大碗一飽各滿志)”
 - 『다산시문집』 제7권, 「절에서 연포탕을 끓이다」 중에서

사찰에 닭을 가져와 요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승려들이 살생을 기피하고 육류 다루는 것을 싫어해, 젊은 사람들이 직접 고기를 잘랐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사찰은 양반들의 회합 장소로 또는 유흥 장소로도 많이 이용됐고, 양반들이 예고 없이 찾아와 두부를 만들어 내라는 횡포 또한 빈번하게 발생하곤 했다. 

청주 사뇌(思惱)사지 맷돌. 크기가 일반 맷돌에 비해 작은 편이다. 곡물을 갈기보다는 차를 가는 용도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및 사진 제공
양주 회암(檜岩)사지 맷돌. 회암사지에는 조선 초기에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두 기의 맷돌이 남아 있다.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맷돌보다 꽤 큰 편이다. 2~3인 이상의 손길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울주군 운흥사지 맷돌

 

두부를 만드는 절, 조포사

조선시대에는 ‘조포사(造泡寺)’라고 불리는 사찰이 있었다. 왕릉을 관리하며 수리하고 제수와 제기를 마련해, 왕릉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조선 초기에는 능침사(陵寢寺)로 불리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두부를 만드는 사찰’이라는 조포사로 불렸다. 사찰이 주관하는 왕릉 제사에는 육류가 배제된 소선(素膳), 즉 비육류 제사 음식이 올라갔고, 대표적인 제사 음식이 두부였다. 

두부는 오랜 기간 저장하기 힘들고 먼 거리 운반이 곤란해 가까운 곳에서 만들어야 했다. 그렇기에 왕릉에 근접해 있는, 왕실이 선정한 조포사에서 만들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서울 봉은사, 남양주 봉선사, 여주 신륵사 등이 조포사였다. 

1643년 『영접도감의궤』에서 조선시대의 구체적인 두부 요리법을 볼 수 있다. 두부찜은 편두부, 석이버섯, 잣, 파 등의 재료로 만들었다. 조선 세조의 능침인 광릉에 대한 기록을 담은 『광릉지(光陵志)』에 나타난 ‘두부탕 만드는 법’을 보면, “백증(白蒸, ‘蒸’이라는 한자는 찜뿐 아니라 탕湯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사용)은 두부를 모나게 잘라 기름에 지진 다음 간장, 참기름, 후추를 넣고 끓이는 탕”이며, “전증(煎蒸)은 백증과 만드는 법이 같은데 다만 후추를 넣지 않고 끓인 두부탕”이라 하며, “잡탕(雜湯)은 두부를 모나게 잘라 간장, 표고버섯, 죽순, 김, 잣, 참기름, 후추를 넣고 끓인 두부탕”이라고 한다. 두부적(炙)은 두부 꼬치구이인데 일반 사회에서는 꼬챙이 없이도 참기름에 지져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순천 송광사 공양간 뒤 절구통과 절구공이, 공양간 도구들. 건물 안쪽은 반찬을 만들던 채공간이고, 2층은 곡물을 저장하던 창고였다. 

사대부들에게는 분암(墳庵, 묘를 지키는 사찰), 혹은 영당(影堂, 조상을 추모하는 공간) 사찰이 왕실의 조포사 기능을 했다. 조선 초·중기 동부승지를 지낸 묵재 이문건(1494~1567)의 『묵재일기(默齋日記)』에서 그의 가계(家系)와 영당 사찰인 안봉사의 관계를 볼 수 있다. 안봉사는 두부, 메주, 김치, 나물, 참기름, 들기름 등 어육류를 제외한 음식과 관련된 거의 모든 식재료와 땔감을 제공받았고, 이를 가공해 영당에 제공했다. 영당제(影堂祭)가 있는 매년 2월과 다른 모임이 있으면, 안봉사에서는 두부적과 두부탕을 제공했다. 이문건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배 터지게 두부 먹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시 선당(禪堂)으로 내려가 앉아 술잔을 돌렸다. 정경(正卿)이 술을 돌리고 끝마쳤다. 승려가 두부적을 바쳤는데, 적이 맛있어서 많이 먹었다. 배가 불러 편치 않기에 밥은 조금만 먹었다.”

“성륜(性輪)이 두부(연포軟泡)를 바쳐서 나도 많이 먹었다.” “성륜이 떡과 국수를 바치고 또 두부(연포軟泡)를 바치기에 배부르게 실컷 먹었다.” 

현대에 이르러 두부는 저렴하고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식재료가 됐다. 하지만 전통 시대의 두부는 콩을 삶고 맷돌에 갈아야 했으며, 다시 콩물을 끓여 간수를 넣고 눌러야 하는 등 장시간의 노동과 숙련된 기술, 여러 도구가 있어야 했던 귀한 음식이었다. 가정에서 손쉽게 만들어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공주 마곡사 곡식 보관 창고인 고방(庫房)과 통나무 계단. 쥐는 곡식을 보관하는 데 최대 난관이었다. 쥐의 침입을 막기 위해 2층에 곡식을 보관하고 통나무 계단을 놓았다. 사진 노승대
고방(庫房)은 누각으로 지어져 ‘고루(庫楼)’라고도 불린다. 사진 노승대

조선시대에 두부는 왕실의 중요 식재료이자 제사의 필수 제수품이었고, 사회에서도 선호하는 맛있고 귀한 식재료였다. 사찰은 일상적인 불교 의례와 자체 소비, 유생들의 빈번한 모임 등을 위해 두부를 만드는 공간이었다. 조선시대의 사찰, 특히 조포사는 두부를 만드는 조포간을 갖췄고 숙련된 두부 제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두부는 어떤 한 사찰의 이름난 음식이 아니라 조선 팔도 모든 사찰의 음식이었고, 사찰은 두부로 명성을 내기도 했다. 조선시대 사찰에서 만들어진 두부는 삼국과 고려시대에 음식 문화를 이끌어 왔던 사찰의 맥을 잇는 음식이었으며, 때로는 그 명성으로 스님들이 고역을 치르기도 한 음식이었다.  

 

공만식
인도 델리대 박사, 영국 런던대 킹스칼리지 박사(음식학&불교학 수학).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음식문화학 전공담당 대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불교음식학 - 음식과 욕망』이 있으며, 「선불교의 음식과 맛에 대한 시각: 三德과 六味」, 「불교 문헌에 나타난 오신채(五辛菜) 항목의 혼란과 정립에 관한 고찰」 등 많은 논문이 있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