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설을 견딘 소나무처럼 제자리를 지킨 고찰 - 안동 봉정사

[마음속에 담아둔 절]

2023-08-18     노승대

최고의 고건축 박물관 봉정사

한국에는 현재 고려시대 건축물이 6점 남아 있다. 5점은 사찰건물로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조사당,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 영천 은해사 거조암의 영산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이다. 물론 다 국보다. 1점은 강릉의 객사인 임영관의 출입문인 ‘임영관 삼문’이다. 임영관은 없어지고 3칸으로 된 문만 남아 있다. 이 객사문이 고려시대 건축물이어서 국보로 지정된 것이다. 이 고려시대의 건축물들은 여러 번에 걸친 전쟁의 와중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그중에서도 사찰건물은 경상북도에 4점이 있고 충청도에 1점이 있다. 

봉정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7곳 사찰 중의 한 곳이다. 해인사, 대흥사, 법주사 등에 비해 현저히 작은 절이다. 그런데도 봉정사는 당당하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특히 봉정사에는 고려시대의 건축물인 극락전과 조선 초기 건축물인 대웅전이 있다. 두 건물 다 국보다. 조선 초기나 중기의 건물인 고금당, 화엄강당, 만세루가 있고 후기건물인 영산암도 있다. 곧 시대별 건축물을 다 볼 수 있는 고건축박물관이다.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봉정사를 방문한 것도 그만큼 역사적 문화유산이 넉넉했기 때문이다. 봉정사 경내로 진입하려면 주차장에서 옆으로 누운 늙은 노송과 느티나무가 반겨주는 길로 가다가 왼쪽으로 곧게 뻗은 급한 경사의 돌계단 길을 올라가야 한다. 계단 길은 옛 방식대로 울퉁불퉁한 자연석을 사용해 놓은 탓에 길을 잘 살펴 올라가야 한다. 스스로 몸가짐을 낮추고 조심할 수밖에 없다. 

누각 아래에 이르면 천등산봉정사(天燈山鳳停寺) 편액이 보인다. 부드럽고 온유한 글씨체다. 이 편액을 쓴 이는 동농 김가진(1846~1922)이다. 누각 밑을 통과해 돌아서면 만세루 현판이 남쪽으로 걸려 있고 대웅전 쪽으로는 덕휘루(德輝樓) 현판이 걸려 있다. 덕휘루 현판도 동농 선생이 1913년에 쓴 작품이다. ‘봉황새는 천 길 높이로 날면서 덕이 빛나는 곳에 내려온다’라는 옛 글에서 따온 이름이다. 봉정사라는 절 이름에 걸맞은 누각 이름이다. 만세루는 숙종 6년(1680)에 건립된 후 여러 차례 보수된 건물로 그 시대의 건축 수법이 잘 나타나 있는 건물이다. 

 

봉정사 아미타설법도(보물)

대웅전, 국보로 승격되다

다시 단정하면서도 날렵한 대웅전을 향해 서면 왼쪽 건물이 화엄강당이고 오른쪽 건물이 무량해회로 스님들의 거주 공간이다. 얼핏 보아도 화엄강당은 기둥은 짧고 지붕이 큰 듯 보이는 건물이다. 화엄강당의 추녀도 대웅전 추녀 아래로 들어가 있다. 대웅전 건물보다 용마루를 높게 할 수가 없어 자연스럽게 높이를 낮추다 보니 이렇게 균형이 어긋난 건물이 된 것이다. 

대웅전은 봉정사의 주불전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집이며 측면을 ‘八’ 자 모양으로 내린 팔작집이다. 1999년 대웅전 해체복원공사를 하면서 1435년에 쓴 <법당중창기> 등 4종의 묵서(墨書)가 발견됐다. 대웅전은 이미 보물로 지정돼 있었지만 이 확실한 기록이 발견됨에 따라 2009년 국보로 승격됐다. 조선 초기의 건물인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보다 5년 늦게 지은 건물로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건물이다. 

공포 역시 조선 초기의 양식이다. 소의 혀처럼 앞쪽으로 돌출된 쇠서는 우설(牛舌)이라고도 부르는데 초기양식일수록 짧고 거의 수직으로 끊겼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쇠서는 길어지고 장식성이 가미되는데 대웅전 쇠서는 짧고 거의 수직으로 끊겨 있다.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 보면 우선 삼존불 위의 닫집이 눈에 띈다. 천장 안쪽으로 공간을 확보하고 그 안에 작은 공포를 사방으로 설치한 후 다시 그 안에 황룡과 백룡을 그려 넣었다. 이런 형식의 천장을 보개천장이라고 부른다. 이 천장이 후대로 내려가면서 아래로 돌출되어 내려오고 화려한 닫집이 이루어지게 된다. 닫집의 원조라고 보면 되겠다. 

대웅전 닫집
대웅전 내부 연꽃 문양의 단청

대웅전 내부 단청에는 조선 후기에 들어온 민화나 신선, 사군자 같은 그림이 하나도 없다. 불교와 관련된 내용의 불화나 연꽃 문양, 진언 등으로 채우고 있는 것이다. 곧 옛 방식의 법당벽화를 그대로 보존한 법당이라는 뜻이다. 

삼존불 뒤에 걸려 있는 후불탱화는 아미타설법도로 1713년에 그려진 것이다. 역시 보물로 지정돼 있다. 채색은 적색과 녹청색, 군청색을 주로 사용했는데 전체적으로 붉은 색깔이 많이 사용됐다. 18세기 전반 경상북도 지역 불화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탱화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탱화를 1997년 1월 16일에 떼어내면서 탱화 뒤에 가려져 있던 후불벽화가 발견됐다. 조사 결과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묘법연화경』을 설하시던 광경을 그린 영산회상도로 밝혀졌다. 고려시대에는 걸개그림인 후불탱화보다 후불벽화를 많이 그렸는데 그 영향을 이은 벽화가 발견된 것이다. 대웅전이 1435년에 중창됐음으로 후불벽화도 이 시기에 조성됐을 것이다. 조선 초기 후불벽화는 1476년에 그려진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 후불벽화만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봉정사 대웅전 후불벽화도 보물로 지정됐다. 그러나 이 벽화는 보존의 어려움이 있어 벽체를 떼어낸 후 보존 처리를 끝낸 뒤 봉정사 성보박물관에 수장돼 있다. 

대웅전 안에는 고려시대에 만든 작품도 있다. 바로 삼존불이 앉아 계신 불단이다. 1999년 대웅전을 해체 복원할 때 불단의 상판 하부에서 지정 21년(1361)에 봉정사의 탁자를 조성했다는 묵서가 발견되면서 확인됐다. 곧 불단은 고려시대에 조성됐지만 1435년 대웅전을 다시 지을 때 옛 불단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알려주는 것이 불단에 조각된 연꽃 조각이다. 채색 없이 칸마다 연꽃과 연잎만으로 디자인된 그림을 원형으로 얕게 새기고 주위는 진한 녹색으로 처리했는데 같은 그림은 한 점도 없다. 고려시대는 불상 앞에 탁자를 놓다가 후기에 이르러 차츰 공양물을 올리기 위해 불단을 갖추게 되는데 대개가 소박하다.

 

 봉정사 극락전 

단아하게 앉아 있는 극락전

대웅전과 화엄강당 사이를 빠져나가면 바로 극락전이 보인다. 화엄강당 북쪽의 공터에 서면 왼쪽으로는 고려시대의 극락전, 오른쪽으로는 조선 초기의 대웅전이고 정면은 조선 중기의 화엄강당 측면이다. 극락전 앞마당 건너편에도 고금당(古金堂)이라 부르는 조선 중기의 건물이 있다. 예전에는 불상을 봉안한 법당을 금당이라 불렀기 때문에 이 건물도 그러한 역할을 하다가 다른 법당이 들어서면서 고금당이라 불렸을 것이다. 

극락전은 좌우에 화엄강당과 고금당을 두었으나 앞마당 남쪽은 터진 공간이다. 조선시대 사찰건물 배치 방식으로는 누각이 남쪽에 있어야 한다. 실제로 남쪽에 있었던 누각의 이름은 우화루였다. 그러나 1972년 극락전을 해체 복원할 때 우화루는 영산암으로 이전됐다. 곧 봉정사는 두 개의 법당을 중심으로 각각 누각을 가진 두 영역으로 나뉘어 있었던 셈이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정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해체 복원할 때 “창건 이후 여섯 차례나 중수했는데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져 지정 23년(1363)에 다시 중수하였다”는 기록의 상량문이 나왔다. 

봉정사 극락전 내부

극락전은 고려양식의 건물임으로 당연히 배흘림기둥과 기둥 위에만 공포를 얹는 주심포 양식을 갖추고 있다. 기둥은 그 모양새에 따라 민흘림과 배흘림으로 나뉜다. 민흘림은 기둥 위가 좁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넓어지는 기둥이고 배흘림은 아래에서부터 3분의 1지점이 가장 두텁고 아래, 위쪽으로 점점 더 가늘어지는 기둥이다. 서양권에서는 ‘엔타시스(entasis)’라 부르는 양식이다. 

극락전도 맞배지붕이라서 측면의 모습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고려 건축양식의 목조가구를 다 볼 수 있는 특징을 갖추고 있다. 우선 두 손을 합장하고 있는 듯한 솟을합장이 뚜렷이 보인다. 

위쪽의 나무 부재를 받쳐주는 화반(花盤)도 특이하다. 연꽃 봉오리를 기본으로 하고 봉우리 가운데에 동자기둥을 세워 위쪽의 소로를 받게 했다. 이러한 형태를 솟을화반동자라고 부른다. 완벽한 고려양식이다. 

내부는 천장의 모든 서까래가 드러난 연등천장이다. 물론 고려건축물이라서 전돌이 깔려 있었다. 중앙에는 후불벽을 치고 극락전의 주불인 아미타부처님을 모셔 놓았다. 불단 귀퉁이에는 4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닫집을 시설했다. 이 닫집은 고려 말의 다포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설치물이다. 또 이러한 닫집이 조선 초기에 천장으로 올라가 보개천장이 된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2022)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