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당간 강릉 삼척] 명주 지역 부처님 – 한송사와 신복사

몸, 마음 낮춰 만나는 강릉 절터와 불상

2023-06-27     박찬희

 

산과 바다, 그 사이의 절터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의 도시 강릉. 그곳은 예부터 동해안의 핵심 도시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또한 자연 풍경이 뛰어나 신라의 화랑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사로잡았다. 역사 깊은 도시답게 곳곳에서 오죽헌, 선교장, 경포대와 같은 뛰어난 문화유산을 만난다. 그뿐인가, 시내 중심부와 외곽에 자리한 여러 절터도 보석처럼 빛난다. 

이제는 절터로 남은 절들은 오랫동안 강릉 사람들과 삶을 함께했다. 절의 문을 활짝 열어 간절한 마음을 들어주고 깨달음의 길로 이끌었다. 지금은 텅 빈 듯 보이지만 절터에는 그들의 오랜 발걸음이 켜켜이 쌓였고, 간절한 믿음이 진하게 녹아 있다. 때문에 절터는 빛을 잃은 폐허가 아니라 한 명 한 명의 기원이 응축된 살아 있는 현장이다. 절터를 간다는 건 그들이 낸 발걸음과 마음을 읽어내고 보듬어 내 마음과 잇는 일이다.

강릉의 절터는 다른 지역의 절터와 달리 큰 바다와 웅장한 산 사이에 자리 잡았다. 강릉 서쪽을 남북으로 가로지른 산이 오대산이다. 이 산은 웅장하면서도 신성해 보여 부처님과 보살들이 머무는 특별한 세상처럼 다가온다. 오래전 오대산이 문수신앙의 성지가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강릉 앞은 넓고 시원한 동해 바다가 펼쳐졌다. 바다는 평화로운 듯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큰 파도가 휘몰아치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해진다. 인간의 예측을 훌쩍 뛰어넘는 바다는 어딘지 인생길과 깨달음의 길과 닮았다. 강릉의 산과 바다는 절의 일부처럼, 용맹 정진하는 스님의 화두처럼 강릉의 절터를 따라다닌다.

 

한송사지 - 흩어진 보살상을 찾아가다

강릉의 절터 가운데 먼저 한송사지를 찾아간다. 고려시대와 강원도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인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이 있던 곳이다. 한송사지는 강릉 외곽의 포구인 남항진과 잇닿은 소나무 숲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지금은 군부대 안에 포함돼 직접 보기는 어렵고 먼발치에서 어림짐작할 수밖에 없다. 울창한 소나무 숲을 보면 옛날 이 지역을 찾던 이들이 빼놓지 않고 들렀던 절답게 매력적이었을 것 같다. 절터에는 보살상을 받치던 대좌가 깨진 채 남아 있으며 몇 해 전에는 절터의 역사와 규모를 제대로 밝히기 위해 발굴을 했다.  

한송사는 삼국시대에 창건됐다고 전한다. 원래 이름은 문수사였다. 절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창건 당시 문수보살과 문수신앙을 중요하게 여겼다. 오랜 기간 문수사였던 절 이름이 한송사로 바뀐 건 대략 17세기 초반 무렵이었다. 19세기 중후반 한송사는 심각한 자연재해를 입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심각한 피해 속에서도 땅에서 솟아났다는 설화를 간직한 문수보살상과 보현보살상은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그러나 역경을 이겨낸 보살상의 시련은 이쯤에서 끝나지 않았다. 두 보살상 가운데 온전한 보살상은 인근 암자로 옮겨 봉안되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한 일본인이 이 보살상을 보고 욕심을 내더니 급기야 일본으로 반출했다. 일본으로 간 보살상은 도쿄제실박물관(현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서러운 타향살이를 하다가 한일 협정을 계기로 1966년 드디어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그때 고향인 강릉 대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갔다가 지금은 오랜 여정을 마치고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얼굴과 오른쪽 어깨를 잃은 보살상은 일제강점기 때 군청으로 옮겨졌고 지금은 오죽헌 곁에 있는 오죽헌·시립박물관에서 강릉의 불교문화를 알려주고 있다.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 오죽헌·시립미술관 소장, 사진 문화재청

보살상을 만나려면 두 박물관으로 가야 한다. 먼저 절터에서 가까운 오죽헌·시립박물관에 전시된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을 찾아간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한 분이 아니라 두 분이 나란히 전시됐다. 한 분은 국립춘천박물관에 있는 석조보살좌상을 똑같이 만든 것이다. 나란히 전시된 모습이 반갑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지만 두 상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살펴보고 사라진 부분을 상상하기 좋다는 점에서 큰 도움이 된다. 연구자들은 이 상을 생김새 등 여러 근거를 들어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뛰어난 솜씨로 신체와 옷 주름과 장식을 섬세하게 조각해 살아 있는 듯하다. 국립춘천박물관의 보살상과 전체적으로 비슷하면서도 손과 발의 자세나 장식과 옷 주름은 변화를 줘 개성을 드러냈다. 

국립춘천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국보). 사진 국립춘천박물관 제공

이번에는 국립춘천박물관에 있는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국보)을 만날 차례다. 넓은 방 가운데 홀로 전시됐고 유리장에 들어 있지 않아 가까이 다가가 이쪽저쪽을 마음껏 보기 좋다. 보살상 아래에 한송사지에 남아 있는 대좌를 바탕으로 만든 대좌를 놓아 원래 상태에 가깝게 전시했다. 이 보살상은 보는 방향에 따라 인상과 느낌이 달라진다. 특히 예불을 드리는 낮은 높이에서 올려보면 보살상의 미소가 더 깊어진다. 옆에서 보면 보관과 머리카락에 색칠했던 흔적이 잘 보이고 뒤로 돌아가면 보살상의 뒷모습에서 보살상이 걸어온 길과 그동안 이 상에 간절한 소원을 빌었던 수많은 사람이 상상된다. 

보살상은 거칠거칠한 화강암이 아니라 부드럽고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 더욱 반짝거린다. 이 모습이 어쩐지 바닷가에 자리 잡은 한송사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상은 얼굴과 어깨가 온전하게 남아 오죽헌·시립박물관 보살상에서 받은 아쉬움이 감탄으로 바뀐다.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으며 손과 발은 자연스러워 지금이라도 움직일 것 같다. 몸을 오른쪽으로 살짝 돌렸는데, 본존인 비로자나불을 향해 몸을 돌린 자세일 가능성이 높아 이 보살상을 문수보살로 추정하고 있다. 

보살상을 떠나기 전 이런 상상을 한다. 만약 훗날 인연이 닿아 두 보살상이 자리를 같이한다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그동안 만난 세상 사람들 이야기로 끝이 없지 않을까?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

신복사지 - 공양하는 마음을 느끼다

이번에는 바닷가의 한송사지를 떠나 신복사지로 간다. 낮은 산이 아담한 절터를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그래서인지 도심 부근인데도 고요하고 아늑하고 편안하다. 늦은 오후 부드러운 햇살이 살며시 내려앉으면 잠잠하던 절터가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절터 아래쪽에서 보고 있으면 이곳을 골라 절을 지은 옛 스님의 놀라운 안목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신복사는 통일신라시대 사굴산문을 연 범일선사가 문을 열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발굴 결과 연구자들은 그보다 시기가 내려간 고려 전기에 개창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오랫동안 법등을 유지하던 신복사는 조선 중기 무렵에 명맥이 끊긴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절터에는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과 신복사지 삼층석탑(보물)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살상과 삼층석탑은 뛰어난 작품으로 주목될 뿐만 아니라 공양상과 탑이라는 점에서 여러 연구자로부터 깊은 관심을 받았다.

공양상은 탑 앞에서 몸을 낮추어 공양을 올린다. 공양상의 시선을 따라가면 부처님 같은 삼층석탑과 만난다. 공양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뒤에서 공양상처럼 앉아 탑을 향해 두 손을 모은다. 땅과 조금 가까워졌을 뿐인데 경건해지면서 공양상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 오는 걸 느낀다. 자세를 바꾸니까 곧 마음까지 바뀐다. 공양상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낮이나 밤이나 지금까지 이 자세로 끊임없이 공양을 올렸다는 걸 생각하면 뭉클해진다. 높은 관 위에 우산 같은 보개를 씌워준 선조들의 세심한 마음 씀씀이가 더욱 고맙다.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보물)과 석조보살좌상. 탑 앞에서 공양하고 있는 보살의 모습이 오대산 월정사의 석탑 및 보살좌상과 비슷하다. 이 같은 형식은 원주 법천사지에서도 발견된다.

공양상이 쓴 원통형 관이나 얼굴 생김새는 한송사지 보살상과 무척 비슷하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한송사지 보살상을 모델로 삼아 이 상을 만들었을 것으로 본다. 비록 눈과 코는 오랜 세월을 겪는 동안 원래 모습과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서 오히려 변치 않는 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 같다. 탑 앞에서 공양을 올리는 공양상을 『법화경』의 「약왕보살본사품」에 근거한 것으로 해석해 약왕보살로 추정하는 사람이 많다. 공양을 받고 있는 삼층석탑은 간결하면서도 굳건하고 세련됐다. 가만히 탑을 보고 있자면 부처님께서 공양상을 대견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고려 사람들은 공양상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는지 원주 법천사와 오대산 월정사 탑 앞에도 이러한 공양상을 만들었다.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국보). “탑 앞에 약왕보살 석상이 손에 향로를 들고 무릎을 괴고 앉아 있는데…”라는 기록이 있어, 『묘법연화경』에 근거한 ‘약왕보살(藥王菩薩)’로 추정하기도 한다. 본래 월정사 석탑 앞에 있었는데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시내의 절터 - 절터에 쌓인 기원

지금까지 강릉 외곽의 절터를 살펴봤고 이번에는 강릉 시내로 들어간다. 큰 도시의 시내에서 절터를 만나는 일은 흔하지 않다. 옛날에는 시내에도 절이 많았겠지만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자취를 감췄고 그 자리는 다른 용도로 바뀌어 흔적마저 희미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릉 수문리 당간지주는 숨바꼭질하듯 주택가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다. 절터 대부분이 집으로 바뀐 지 오래고 땅속 깊숙이 묻힌 당간지주만이 통일신라시대부터 이곳에 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만약 당간지주마저 없었다면 이곳에 절이 있었는지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강릉 수문리 당간지주(보물). 강릉 일원은 신라시대에 명주(溟州)로 개칭됐으며, 강릉에는 지금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도독(都督)이 부임했던 곳이다. 지금의 강릉 중심가에 거찰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당간지주다. 당간지주란 절 행사를 알릴 때 절 입구에 세우는 당간(幢竿, 깃발을 단 장대)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기둥을 말한다. 
강릉 대창리 당간지주(보물).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나 사각형 기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수문리 당간지주와 멀지 않으며, 강릉 도심에 있다. 

마지막으로 강릉 대창리 당간지주를 찾아간다. 수문리 당간지주가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 잡은 반면, 대창리 당간지주는 번화한 시장통 큰길가에 당당하게 서 있다. 수문리 당간지주에 비해 땅에 묻힌 부분이 적어 훤칠한 생김새가 잘 드러났다. 이 당간지주 역시 통일신라시대 때 만들어졌다. 이곳에 있던 것으로 알려진 탑 부재와 불상이 오죽헌·시립박물관 야외에 전시됐다. 하지만 탑은 부재를 많이 잃어버렸고 불상은 얼굴을 비롯한 여러 부분이 손상돼 안타까움이 크다.   

수문리 당간지주나 대창리 당간지주 가까운 곳에 강릉대도호부 관아가 있던 걸 보면 예전에도 이곳이 강릉의 중심부에서 가까웠을 가능성이 높다. 오랫동안 발걸음으로 분주했을 이곳은 강릉 사람들에게는 일상적인 신앙 공간이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굳건한 당간지주를 보며 든든한 마음으로 절에 들어가 마음 다해 예불을 올리며 간절한 염원이 부처님께 가닿기를 기원했다. 지금은 절터가 풍경처럼 녹아들어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지만 그동안 이곳에 쌓인 사람들의 마음을 펼쳐 잇는다면 오대산을 몇 번이나 감쌌을지 모른다.

지금까지 한송사지, 신복사지, 시내의 절터를 둘러봤다. 예배자의 눈높이로 불상을 보고, 순례자의 마음으로 절터를 걷고, 역사가의 눈으로 사람들을 상상하고, 구도자의 자세로 잠시 절터에 생각을 내려놓는다면 어느새 절터는 과거에서 현재로 바뀐다. 만약 강릉을 찾는다면 이 절터를 꼭 기억하고 방문하면 좋겠다. 그리고 신복사지 공양상처럼 몸과 마음을 낮춰 절터에 어린 선조들의 지극한 마음 한 자락과 만난다면 더욱 좋겠다. 

 

사진. 유동영

 

박찬희
박찬희박물관연구소 소장. 박물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했고 지금은 사람들이 박물관과 문화유산을 즐겁게 만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쓴 책으로 『유혹하는 유물들』, 『박물관의 최전선』, 『구석구석 박물관』, 『몽골 기행』, 『놀이터 일기』, 『아빠를 키우는 아이』가 있으며 함께 쓴 책으로 『두근두근 한국사 1, 2』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