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사유상] 일본에 모셔진 반가사유상

코류지와 츄구지의 반가사유상

2023-05-23     지미령

1910년부터 교토를 동서로 가로질러 운행하는 아라시야마 열차가 있다. 1량의 차량이 집과 집 사이의 좁은 철길을 따라 굽이굽이 돌면서 옛날부터 유명했던 행락지마다 정차한다. 봄에는 좁은 철길 사이로 벚꽃이 흩날려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여름에는 교토의 습하고 더운 날씨에 지친 관광객들을 순간이나마 열차의 바람으로 달래준다. 

단풍이 깊게 물든 가을날의 아라시야마 열차 밖 풍경은 일본에서 꼭 봐야 할 단풍 풍경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여하튼 아라시야마 열차를 타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사색하게 만드는 운치가 뛰어난 열차이다. 이 열차가 정차하는 역 중 하나가 우즈마사 코류지역이다. 역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한국인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는 불상을 봉안한 코류지(廣隆寺, 광륭사)가 있다.

 

쇼토쿠 태자의 절, 코류지

코류지는 쇼토쿠 태자(聖德太子, 성덕태자)와 인연이 깊은 절이다. 사료에는 쇼토쿠 태자가 호류지(法隆寺), 시텐노지(四天王寺), 츄구지(中宮寺), 다치바나데라(橘寺), 하치오카데라(蜂岡寺), 이케지리데라(池後寺), 가쓰라기데라(葛城寺) 이들 7개의 사찰 건립에 관여했다고 전한다. 이 중 하치오카데라가 이번 글에서 소개하는 코류지의 다른 이름이다. 코류지는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한반도계 도래인 하타씨(秦氏)의 씨사(氏寺)로 알려져 있다. 하치오카데라 이외에도 하타기미노데라(秦公寺), 우즈마사데라(太秦寺) 등의 별칭을 가질 정도로 역사적 존재감이 큰 사찰이지만, 그에 비해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많은 절이기도 하다. 『일본서기』에 코류지 창건과 관련한 기록을 잠깐 소개해 볼까 한다. 

“603년, 태자가 모든 군신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부처님상을 가지고 있는데 누가 이 상을 얻어 공손히 예배하겠는가.’ 이때 하타 가와가쓰가 나아가 ‘신이 예배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곧 불상을 받아 하치오카데라[코류지]를 조성했다.”

기록에 따르면, 코류지는 쇼토쿠 태자에게 받은 불상을 봉안하기 위해 건립한 사찰이었다. 한편, 『코류지연기』(838)와 『코류지자재교체실록장(廣隆寺資財交替実録帳)』(890)의 첫머리에는, “622년, 같은 해에 사망한 쇼토쿠 태자의 공양을 위해서 (코류지를) 건립했다”라고 또 다른 건립 연유를 들고 있다. 즉, 코류지는 603년과 622년 두 개의 창건설을 가진다. 이에 대해 603년에 코류지 건립을 시작해 622년에 완성했다는 해석과, 603년에 지은 하치오카데라[코류지]와 622년에 건립한 다른 사찰이 후에 합병해서 현재의 코류지가 됐다는 해석이 있다. 

 

코류지 미륵반가상

코류지 삼산관 반가사유상 

1982년에 새로 건립한 코류지 영보전(靈寶殿)에는 우리가 가장 보고 싶은 불상인 국보 목조 삼산관[미륵보살] 반가상이 봉안돼 있다. 보관을 쓰고 있어서 일본에서는 일명 ‘보관 미륵’으로 유명해진 불상이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인간 실존의 최고 모습’이라고 극찬했고,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는 “너무나 부드럽고 미묘하고 조화롭다”라고 명문을 남기는 등 많은 예술가가 이 불상의 매력에 매료돼 찬탄해 왔다.

코류지의 미륵반가상을 보는 순간 누구나 한국의 국보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떠올릴 것이다. 머리에 쓴 낮은 삼산관과 전체적 모습이 유사해 동일 계통의 불사(佛師)가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작품이다. 코류지 반가사유상만의 특징을 소개하자면, 우선 갸름하고 통통한 얼굴에 가는 눈, 두 뺨과 턱의 우아한 양감에서 드러난 미소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늘씬한 상체와 함께 뺨 가까이에 댄 오른손의 엄지와 약지가 서로 맞대고 있고, 다른 손가락들을 미묘하게 구부려 사색에 잠긴 모습은 이 불상 최고의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불상은 왼손을 오른 다리에 올려 참배하는 이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아래로 이동시킨다. 불상의 아랫부분은 풍성한 치맛자락이 대좌를 덮으면서 묵직하게 떨어져 상반신과는 다른 화려함마저 감돈다. 전체적으로 목조 특유의 부드러움과 우아함을 내뿜고 있는 아시아 최고의 수작 중 하나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코류지 미륵반가상은 언제 코류지에 봉안됐는지, 누가 제작했는지 등의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 있다. 우선 603년에 쇼토쿠 태자가 하사한 불상은 기록이 없어 어떤 불상이었는지는 알기가 어렵다. 『부상략기(扶桑略記)』(12세기)에는, “코류지연기(廣隆寺緣起)에 의하면 쇼토쿠 태자에게서 받은 불상은 미륵불이다”라는 재미있는 기록이 전한다. 문제는 『코류지연기』(9세기)에는 쇼토쿠 태자가 내린 불상이 미륵불이라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부상략기』가 참고로 한 코류지연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존재한다.

코류지 미륵반가상의 얼굴과 손끝을 맞댄 측면 부분

불상과 관련해 『일본서기』에는, “616년 7월, 신라가 사신을 파견해 불상 1구를 보내와 하타데라(秦寺)에 안치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많은 이들이 이 내용을 근거로 신라가 보낸 불상이 여기서 소개하는 미륵반가상이고, 하타데라는 코류지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부상략기』의 기록은 ‘쇼토쿠 태자의 불상과 신라의 불상을 혼돈해서 생긴 일종의 해프닝’이라는 견해지만,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여하튼 코류지 미륵반가상은 관람자도 깊게 사색하게 만드는 문제작임에는 틀림없다.

 

궁궐의 여성들이 머문 절 츄구지, 보살반가상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불상을 하나 꼽으라고 하면 아마도 츄구지(中宮寺, 중궁사)의 보살반가상이 세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츄구지는 수수께끼로 뒤덮인 코류지와 달리 비교적 명확한 사찰이다. 

천수국수장. 출처 세계미술도보 일본편, 제6집, 1944년 11월 발행, 東京堂書店

이 절은 국보인 보살반가상과 함께 고구려계 도래인이 제작에 참여한 자수 그림, 천수국수장(天壽國繡帳)으로 유명한 절이기도 하다. 츄구지는 호류지 동원의 몽전(夢殿) 옆에 있다. 원래는 현 위치에서 동쪽으로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건립한 칠당가람의 비구니사찰이었다. 16세기 말경 황족의 여성들이 주지직을 수행하는 문적(門跡) 비구니 사찰로 승격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츄구지 본당은 1968년에 완성한 콘크리트 건축물로 창건 당시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지만, 본당 주변을 둘러싼 황매화가 아름다운 절이다. 

츄구지는 쇼토쿠 태자가 건립한 7개의 사찰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나 창건에 관한 당시의 구체적인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10세기경에 저술된 『쇼토쿠 태자 전력(聖德太子轉曆)』에는 “태자가 어머니인 하시히토(間人) 황후가 머무는 곳을 절로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쇼토쿠 태자가 자신의 어머니가 죽자 어머니의 궁을 사찰로 조영했다는 내용이 현재는 정설로 굳어졌다. 

츄구지 반가사유상. 출처 츄구지 홈페이지

츄구지를 처음 방문하는 이들은 본존불인 목조 보살반가상이 까맣다는 사실에 놀랄 수도 있다. 원래는 불상에 채색을 입혔지만, 보존을 위해 검은색으로 옻칠을 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됐다. 이 반가상은 아스카시대(6~7세기)의 작품으로 높이가 약 132cm에 달하는 상당히 큰 불상이다. 사찰 내 기록에는 본존이 여의륜관음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10세기 이후에 불린 이름이다. 원래는 미륵보살 반가상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현재는 목조 보살반가상으로 부른다. 

츄구지의 보살반가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반가사유상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두상이다. 일월식보관이나 삼산관을 쓰지 않고, 정수리에서 머리를 두 개로 묶은 미키마우스와 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뒷머리는 양 갈래로 늘어뜨려 천상의 부처님보다 인간의 모습에 가깝다. 

츄구지 반가사유상. 출처 츄구지 홈페이지

또 다른 특징은 자세다. 다른 반가사유상이 몸과 얼굴을 앞으로 살짝 기울인 자세라면 츄구지 반가상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거의 정면을 응시한 자세다. 마치 국립중앙박물관 삼산관 반가사유상의 얼굴이 11~12살의 장난기 가득한 소년의 얼굴이라면, 츄구지는 이제 막 사회에 나가는 긴장과 기대를 동시에 분출하는 청년 얼굴에 가깝다. 코류지는 청년기를 지난 보다 성숙한 얼굴로 한 편의 인간 성장사를 보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츄구지 보살반가상을 최고의 순간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간 조용한 미소다. 코류지 반가상의 오른 손가락 끝 선이 최고의 순간을 만들었듯이 말이다. 츄구지 보살반가상은 철학자와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듯하다. 철학자 와츠지 테츠로(和辻哲郎)는 『고사순례』에서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저 피부의 검은 광택은 참으로 신기하다. 이 불상이 나무이면서도 청동으로 만들어진 듯한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은 그 맑은 광택 때문일 것이다. 광택이 미묘한 살집과 몸의 요철을 매우 섬세하게 살리고 있다. 이 때문에 얼굴 표정이 섬세하고 부드럽게 나타난다. 지그시 감은 그 눈에 스며들 정도의 아름다운 사랑의 눈물이 실제로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와츠지 테츠로만큼은 아니어도 필자 역시 이 보살반가상과 심심한 에피소드가 있다. 약 25여 년 전 여름, 필자는 처음 츄구지를 방문했다. 현재는 관리자가 본당을 계속 지키고 있지만, 필자가 처음 방문할 당시에는 관리자가 없었다. ‘아, 책에서 봤던 보살반가상이 이거구나’ 정도의 가벼운 생각으로 잠깐 들렀다. 하지만 한여름의 비가 갑자기 오랜 시간 내리기 시작했다. 필자는 네다섯 평 안팎의 다다미방에서 혼자 앉아 중앙의 미륵보살반가상과 왼편에 걸린, 비록 복제품이긴 해도, 천수국수장을 번갈아 바라보며 1시간여 비를 피했다. 방 밖의 빗소리와 함께, 방 안에는 미륵보살반가상과 천수국수장, 그리고 필자뿐인 하나의 우주를 경험했다. 지금 생각해도 황홀한 경험이었다. 이후 필자는 수십 번 츄구지를 방문했지만, 첫 느낌을 넘어선 경험은 하지 못했다. 참으로 싱그러운 여름을 선사해 준 불상이었다.  

 

지미령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일본 교토 불교대학에서 일본 불교미술사를 전공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인천대, 동국대 등에 출강했다. 일본 미술을 독특한 시각으로 연구하며, 아시아의 불교미술 교류에 관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